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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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작화 : [연재소설] 흙의 소리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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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3] 국립국악원, 판소리 <춘향가> 中11_판소리_춘향가 중_쑥대머리_작은 노래와 반주 12_판소리_춘향가 중 쑥대머리_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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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3] 국립국악원, 판소리 <춘향가> 中2 06_판소리_춘향가 중_산세타령_반주 3 07_판소리_춘향가 중_사랑가_노래와 반주 6 08_판소리_춘향가 중_사랑가_작은 노래와 반주 2 09_판소리_춘향가 중_사랑가_반주 3 10_판소리_춘향가 중_쑥대머리_노래와 반주 6 본 음원은 창자가 있는 음원, 반주음원으로 구분 편집하여 누구나 저작권의 제한 없이 자유롭게 다운받을 수 있도록 한 음원입니다. 숙련도에 따라 반주음원, 작은 노래와 반주음원, 노래와 반주음원을 선택하셔서 다운 받으신 후, 음원을 틀어놓고 반복연습을 하는 등 개인이 직접 공연의 장을 열어 국악을 즐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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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3] 국립국악원, 판소리 <춘향가> 中01_판소리_춘향가중_방자가춘향부르러가는데_노래와반주.mp3 (1.2M) 02_판소리_춘향가중_방자가춘향부르러가는데_작은노래와반주.mp3 (1.2M) 03_판소리_춘향가중_방자가춘향부르러가는데_반주.mp3 (1.2M) 04_판소리_춘향가중_산세타령_노래와반주.mp3 (1.8M) 05_판소리_춘향가중_산세타령_작은노래와반주.mp3 (1.8M) 숙련도에 따라 반주음원, 작은 노래와 반주음원, 노래와 반주음원을 선택하셔서 다운 받으신 후, 음원을 틀어놓고 반복연습을 하는 등 개인이 직접 공연의 장을 열어 국악을 즐길 수 있습니다. 본 음원은 창자가 있는 음원, 반주음원으로 구분 편집하여 누구나 저작권의 제한 없이 자유롭게 다운받을 수 있도록 한 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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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3] 국립국악원,판소리 <흥보가> 中[mp3] 국립국악원,판소리 <흥보가> 中 06_판소리_흥보가 중_화초장타령_반주 07_판소리_흥보가 중_제비몰러 나가는데_노래와 반주 08_판소리_흥보가 중_제비몰러 나가는데_작은 노래와 반주 09_판소리_흥보가 중_제비몰러 나가는데_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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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3] 국립국악원,판소리 <흥보가> 中01_판소리_흥보가 중_돈타령_노래와 반주 02_판소리_흥보가 중_돈타령_작은 노래와 반주 03_판소리_흥보가 중_돈타령_반주 04_판소리_흥보가 중_화초장타령_노래와 반주 05_판소리_흥보가 중_ 화초장타령_작은 노래와 반주 본 음원은 창자가 있는 음원, 반주음원으로 구분 편집하여 누구나 저작권의 제한 없이 자유롭게 다운받을 수 있도록 한 음원입니다. 숙련도에 따라 반주음원, 작은 노래와 반주음원, 노래와 반주음원을 선택하셔서 다운 받으신 후, 음원을 틀어놓고 반복연습을 하는 등 개인이 직접 공연의 장을 열어 국악을 즐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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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문체부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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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한국의 소리와 아세안의 선율이 조우하는 10곡 10색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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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C한국음악프로젝트] 타악과 플라멩고의 이색적인 만남, groove& ‘살 part.2’ 라이브 연주 영상2020 제14회 21C한국음악프로젝트 대상 수상팀 groove&의 ‘살 part.2’ 2020년 수상팀의 또 다른 명품 창작곡 영상 "독보적인 리듬으로 세계를 사로잡을 여성 타악팀 groove&!” [groove&] 같은 학교 타악 전공 선후배로 만나 음악적 고민을 나누며 만들어진 여성 타악 앙상블 팀으로, 여성의 섬세함을 더욱 꼼꼼하고 탄탄한 짜임새로 무대 위에서 발현시켜 나가고자 한다. 관객과의 소통을 통해 사라져가는 장단을 다시 세상 위에 올려놓고, 아티스트로서의 재능과 역량을 풀고 융합하는 과정에서의 ‘합’ 그 이상의 음악을 만들고자 한다. This group is a female percussion ensemble composed of percussion major students, who met in the same school and shared their musical struggles. Their goal is to express on stage the delicateness of women through a meticulous and solid structure. By communicating with the audience, they aim to bring the disappearing rhythm and beats of Korea back to the world and create music beyond the combination of talent and capacity as artists in the process of expressing and merging it. [살 part.2 / "SAL pt. 2”] 2019년에 처음으로 선보인 ‘살’이라는 곡을 재편곡하여 새로운 곡으로 재탄생시켰다. 넘실대는 도당굿의 가락을 활용하여 즐거움에 초점을 맞춰 달관하여 놓아준다는 ‘놓음’을 바탕으로 뿌리고 흩는 ‘살’을 표현했다. 이번 곡에서는 플라멩코 기타가 함께 연주된다. 플라멩코는 노래와 춤, 기타의 음악적인 기교가 융합된 스페인의 민속예술로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유래하여 지금까지 전해져오고 있다. 플라멩코 기타에서만 표현되는 타악기적인 요소와 장구에서 찾아낸 의외의 울림에 집중해본다. This piece is a rendition of a new arrangement of "SAL,” a composition that was first released in 2019. Incorporating dodanggut’s wavy rhythms, the scattering nature of "SAL” is expressed by focusing on the pleasure of "letting go” and being unbound by worldly matters. Flamenco guitar is a part of this new accompaniment. Flamenco is a Spanish folk art form that originated from Andalusia, Spain, which integrates song, dance, and guitar performance with musical techniques and has been passed down to the present day. This piece focuses on a percussive element that can only be rendered through the use of flamenco guitar and the unexpected resonance of Janggu. 작곡 / 이상경, 박성진 반주장구 / 이상경 사물장구 / 손민주 별신굿장구 / 김하경 플라멩고 기타 / 박성진(객원) Composition / Lee Sang-kyung, Park Sung-jin Janggu (Low Tone) / Lee Sang-kyung Janggu (Normal) / Sohn Min-ju Janggu (High Tone) / Kim Ha-kyung Flamenco guitar / Park Sung-jin (guest perfor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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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콘서트 판] 매화타령 - 이춘희 & 이미리 & 최정아[국악콘서트 판] 매화타령 - 이춘희 & 이미리 & 최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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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해를 맞아 소놀이굿 알기소놀이굿은 황해도 · 경기도 · 충청북도를 비롯한 중부지방과 강원도 영서지방에 분포하는 소먹이놀이에서 나왔다. 이것은 정월 대보름과 팔월 한가위에 벌인다. 대보름에 농사의 풍년을 빌고, 한가위에 대풍에 감사를 올리는 것이다. 소는 궁둥이를 마주 대고 허리를 굽힌 두 사람 위에 멍석을 덮어서 꾸민다. 앞 사람은 두 손에 쥔 고무래로 머리를 삼고, 뒷사람은 작대기나 싸리빗자루를 꼬리대신 휘두른다. 소 머리에 짚을 두툼하게 씌우고, 소 얼굴을 그린 종이를 붙이기도 한다. 몰이꾼이 소를 데리고 마을의 집집을 찾아다니며, 이들의 뒤를 풍물패와 젊은이들이 따른다. 문에서 ‘음메 음메’ 울어 주인이 나오면, 몰이꾼은 "옆집 누렁 소가 싸리꼬챙이와 쌀 뜨물이 먹고 싶어 왔으니, 푸짐하게 내시오.” 외친다. (싸리꼬챙이는 산적을, 뜨물은 술을 가리킨다.) 주인은 준비했던 술과 음식을 낸다. 풍물패는 가락을 높여 신명을 돋우고, 소는 덩실덩실 춤춘다. 주인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흥겨운 춤 마당을 펼친다. 몰이꾼은 "올 농사 대풍 들고, 두루 평안 누리시오.” 덕담을 늘어놓는다. 경기도와 충청도 일부에 분포하는 거북놀이도 소먹이놀이의 하나이다. 수숫대나 짚으로 거북을 꾸민 점이 다를 뿐 내용은 같다. 경기도 안성군 서정리 거북놀이에 소와 송아지가 등장하는 까닭도 이에 있다. 충청남도 천안시 일대에는 1960년대 초에도 한가위날 농기를 앞세운 풍물패와 맷방석을 뒤집어쓰고, 수수잎을 꼬리로 삼은 거북이 그리고 도롱이 차림의 질라래비(몰이꾼)로 구성된 거북놀이패들이 마을을 돌았다. 한 집에서 "들어와 놀아라.” 하면, 우물 · 부엌 · 장독대 · 마루 · 방 등으로 다니며 고사 덕담으로 축원을 올렸다. 안주인은 마루에 쌀과 돈 그리고 정화수 한 그릇을 차린 성주상을 놓고, 술과 음식을 내어 대접하였다. 질라잡이의 "거북아 거북아 놀아라, 만석 거북아 놀아라, 천석 거북아 놀아라.” 하는 소리에 풍물 가락이 울리면 거북이와 사람들이 덩실 덩실 춤을 추었다. 한 바탕의 신명떨음이 끝난 뒤, 거북이 일행은 다른 집으로 갔다. 소놀이굿은 평안남도 평양, 황해도의 평산 · 연백 · 봉산 · 신계 · 곡산 · 신금천, 경기도의 양주 · 파주 · 연천 · 고양 · 장단 · 포천 · 시흥, 서울의 노량진과 왕십리, 강원도 원주, 충청북도 진천읍 일대에 분포하였지만, 오늘날에는 양주에만 남아 있다. 소굿 · 쇠굿 · 소놀음굿 · 마부타령굿 등으로 불리는 이 굿(중요무형문화재 제70호)은 경사굿의 하나로, 무교의 제석거리 뒤에 벌인다. 제석거리에서도 자손창성 · 수명장수 · 농사풍년을 비는 까닭에 소놀이와 어우러졌을 것이다. 따라서 놀이라기보다 의례에 가깝고, 연극적인 요소도 갖추었다. 소머리는 짚을 두툼하게 싼 고무래에 얼굴 그림을 붙이고, 뿔은 짚으로, 귀와 혀는 짚신이나 고무신 바닥으로, 고삐는 명주 또는 광목으로, 몸뚱이는 반으로 접은 큰 멍석 안에 5, 6명이 들어가 꾸민다. 이밖에 한 사람이 멍석을 뒤집어쓰고 송아지 구실을 한다. 원마부는 검은 전립과 남색 전복에 홍띠를 매고 오른손에 삼신부채, 왼손에 고삐를 쥔다. 채찍을 든 곁마부도 같은 차림이다. 무당은 제석거리에서처럼 흰 고깔에 흰 장삼을 걸치고, 흰 제석부채를 든다. 굿은 12거리와, 무당과 마부의 대화와 타령, 뒤풀이 등으로 구성된다. 바깥 마당에서 ‘행추물림’을 한 다음, 서낭기를 마당 옆에 세우는 과장이 첫째거리이고, 마루에서 펼치는 둘째는 부정거리이다. 마루 북 · 동 · 남쪽에 맨 시렁에 열 두 신을 위한 ‘사위삼당’을 설치하고, 마루 북쪽에 삼신상을 차린다. 안마당에서의 셋째거리는 불사맞이거리로, 호구 · 말명 · 신장 · 대감 · 창부 · 걸립신을 들먹인다. 본향인 넷째부터는 마루에서 벌인다. 다섯째는 조상을 위한 초가망거리이며, 여섯째거리에서 혼령들이 차례로 들어와 넋두리를 한다. 대감을 위한 일곱째는 창부타령으로 마감하며, 여덟째의 성주거리에서 성줏대를 들고 집터를 돈 뒤, 굿이 끝 날 때까지 마루에 모신다. 아홉째는 산상거리이고, 열째거리(별상)에서 마부는 앉은 무당과 산마누라 노랫가락을 부른다. 열한 번째(신장)에서 오색기(五色旗)로 점을 치며, 열 두째의 산신대감거리는 대감거리와 같다. 열 셋째에서 제석을 마루에 모신 뒤, 안방으로 들어가 쌀을 담은 말 위에 올라서서 공수를 내리고, 다시 마루로 나와 중타령 · 바라타령 · 제석타령을 읊조린다. 이 뒤부터 무당과 마부가 문답을 나누며, 마부는 재담과 함께 타령을 늘어놓는다. 무당이 "마부, 소장수” 하고 부르면, 마부는 "기산(箕山) 영수(潁水) 별곤건(別坤乾) 소부(巢父) 허유(許由)가 나를 찾나?” 하며 여러 사람을 들먹인다. 다시 소장수 이름과 소 내력을 물으면, 전국 각지의 소시장을 들고 나서 "은산에서 은을 뜨고, 수물 천냥을 잔뜩 싣고 들어왔으니, 이 소는 어운지고 시운진 소니, 이 댁 가중에서 사시오.” 권한다. "보물을 그렇게 많이 싣고 왔다니, 보물타령이나 들려주오.” 하는 요청에, 나라와 마을의 복을 빌고 나서 "이 댁 성주를 이룩할 제, 천금산(千金山)의 금을 뜨고 만금산(萬金山)의 은을 뜨고, 명산(命山)에 가서 명을 뜨고, 복산(福山)에 가서 복을 뜨고, 재수산에 가 사망 뜨고, 삼신산의 재수를 받아, 은자 보물은 스물 천냥, 한 쪽에 달이 돋고 또 한 쪽에 해가 돋아, 일광이면 월광이요, 월광이면 일광인데, 일광 월광 단월광에 이 댁 가중에 진연이요.” 축원한다. 이어 치레타령이다. 머리치레에서 "인력거꾼의 상고머리… 이마가 벗겨져서 대머리” 하며, 이런 저런 사람의 머리 생김을 주워섬긴다. 대청 성주를 위한 절치레에서는 전국 각지의 절 이름을 들먹이고, 뿔치레에서는 소 뿔을 비롯하여 새우 · 사슴 · 쳇불에 이르기까지의 뿔타령을, 귀타령에서는 잎사귀 · 돌쩌귀 · 당나귀를 끌어낸다. 이어 눈 · 입 · 이 · 혀 · 꼬리 · 다리 · 굽 · 빛깔 · 복색 · 굴레타령으로 넘어간다. 곡식타령에서는 각지의 벼 종류를, 성주타령에서는 전국의 나무를, 소장수 마누라 복색타령에서는 여인의 여러 가지 치장을, 집 타령에서는 재목 · 살림살이 · 집치장 등을 들먹이고, 이 집에서 태어난 아이가 잘 자라나, 장원 급제하여 부귀공명을 누릴 것이라 읊조린다. 이어 경사굿이다. 열 넷째는 호구, 열 다섯째는 성주, 열 여섯째의 신(神)거리는 아홉째거리와, 열 일곱째의 창부거리는 성주거리와 같으며, 여러 신들을 배웅하는 뒷전거리로 끝난다. 황해도 평산의 소놀음굿은 천상놀이와 지상놀이로 이루어졌다. 천상놀이에서는 옥황상제의 명에 따라 세상에 내려온 제석이 인간을 탄생시키고 조선국을 세우는 내용을 타령으로 부른다. 지상놀이에서는 마부가 소를 끌고 밭을 갈면, 애미보살이 씨를 뿌리고, 지장보살이 김을 매며, 신농씨가 생장을 돌보는 동작을 펼친다. 이밖에 소 부리기 · 농구 다루기 · 방아찧기 · 재수와 복 빌기 · 아기 점지하기 등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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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백중놀이 [국가무형문화재 제68호]밀양 백중놀이는 국가무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된 밀양의 대표적 문화예술이다. 매년 음력 7월 보름경에 경상남도 밀양 지방에서 지주들이 마련해준 술과 음식으로 하루를 즐겁게 노는 데서 유래한 성인남녀놀이이다. 머슴들이 7월 보름경 진(辰)에 해당하는 날(용날)을 택하여 지주(地主)들이 마련해준 술과 음식으로 하루를 즐겁게 노는 데서 연유한 두레굿이다. 농사일을 한고비 넘기고 난 뒤 마을사람들과 한데 어울려 풍장을 치며 풍년 들기를 비는 고사와 위안잔치로 구성되는 한판의 마을축제 마당이다. 잡귀막이굿과 농신제로 이루어지는 유교식의 마을동제가 행해진 후, 본놀이로 작두말타기, 양반춤, 병신춤, 범부춤, 오북춤 등의 춤판이 벌어지고 뒤이어 마지막엔 이 놀이에 참가한 모든 구경꾼과 놀이꾼이 함께 어울려 신명 속으로 빠져드는 놀이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놀이는 두레먹기·호미씻기[洗鋤遊 : 세서연]·호미걸이라는 명칭으로 중부이남지방의 농촌에서 흔히 볼 수가 있다. 밀양에서는 이날을 흔히 ‘머슴 날’이라고 하며, 이날의 놀이를 ‘꼼배기참 놀이’라 부르기도 한다. ‘꼼배기참’이란 밀양 지방의 사투리로 밀을 통째로 갈아 팥을 박아 찐 떡과 밀에다 콩을 섞어 볶은 것, 그 밖에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머슴들에게 점심·저녁으로 주는 음식을 말한다. 이 ‘꼼배기참’은 자주 얻어먹을 수 없는 귀한 음식으로 머슴 날에는 반드시 이 음식이 나오게 되어 있으므로 ‘꼼배기참’을 먹으면서 논다는 데서 ‘꼼배기참 놀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 밀양에서 백중놀이가 다른 지방에 비하여 성행하였고 그 놀이에 개성이 강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 지역은 농경지가 많아 농사가 잘 되고 살기가 좋았기에 촌락공동체로서의 농경의식이 발달할 수 있었다. 또한 ‘불당골’이라 불려 오던 부북면 퇴로리 일대에 본거지를 두고 살았던 사당패(광대)와 한말 때 토호나 대지주 행세를 하면서 살았던 아전(衙前)출신들의 모임인 보본계원(報本契員)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밀양은 양반과 천민의 차별이 심한 곳으로 천민들이 풍물에 의지하여 신명나게 놀면서 울분을 해소하였던 것 또한 지금의 백중놀이를 형성함에 있어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백중놀이가 벌어지게 되면 행사의 주관은 열흘 전부터 대농가의 큰 머슴들 중에서 인기가 있는 사람을 좌상(座上)과 무상(務上)으로 뽑아 일을 보게 하였다. 이렇게 뽑힌 좌상과 무상은 대농가나 그해 경사가 난 집, 또는 혼인한 집 등을 찾아다니며 술과 안주를 추렴하고, 방목(放牧)하던 소가 다른 집의 논밭에서 곡식을 뜯어먹은 적이 있는 소 임자에게서 벌금으로 돈이나 술·안주를 요구하기도 한다. 음식이 장만되면 그날 경치가 좋은 장소에 모여 하루를 마음껏 놀고 즐기게 된다. 높은 예술성을 가지고 있어 서민예술의 표본이 되는 「밀양백중놀이」의 주요종목은 농신제(農神祭)·작두말타기·춤판·뒷놀이 등으로 이루어진다. 농신제는 먼저 나팔을 길게 서너 번 불면 농악이 울리면서 오방진굿을 하고 고사터를 깨끗이 하는 잡귀막이굿에서 시작된다. 마당에는 저름(쌀 창고)대로 만든 농신대[農神竿]를 세우고, 농신대를 중심으로 몇 바퀴 돈 다음 농신대를 향하여 서면 고사를 지낸다. 고사는 북을 세 번 울려 신장(神將)을 강신하게 한 뒤 축문을 읽는다. 고사가 끝나면 각자가 준비한 주머니에 쌀과 콩, 그리고 기원문을 넣어 신대에 매단다. 이어서 술과 안주를 먹으며 ‘어사영’, ‘모심기노래’ 등 밀양의 민요를 부르며 어울려 논다. 작두말타기는 머슴들 중에서 농사장원을 선정하고 그 장원을 작두말(지게목발로 만든 말)에 태워 풍물을 치면서 놀이판을 돌아 시위하는 놀이다. 작두말에는 좌상과 무상이 작은 삿갓을 뒤집어쓰고 올라타 양반 행세를 하기도 한다. 이때는 째보양반·고자양반·벙어리양반 등이 나와 양반을 욕보이는 풍자놀이를 하기도 한다. 춤판은 양반춤에서 시작된다. 이어서 머슴들이 풍물장단에 맞추어 양반을 몰아내고 각기 난쟁이·중풍잽이·배불뚝이·꼬부랑할미·떨떨이·문둥이·꼽추·히줄래기·봉사·절름발이 등의 병신춤을 추며, 이어서 범부춤과 오북춤이 추어진다. 범부춤과 오북춤은 밀양 지방에만 전승되는데, 범부춤은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장구잽이 앞에서 개인기를 선보이는 춤이며, 오북춤은 다섯 사람의 북잡이들이 원무(圓舞)하거나 원심원외로 이동하면서 추는 춤이다. 이 놀이의 특징은 장식품에 있어서 농신대가 특이하고 악기는 사장고와 물장고 같은 것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또한, 병신춤은 다른 춤과는 달리 다양하고 본격적인 놀이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차별대우를 받은 상민과 천민들의 서러움이 전체놀이에 익살로 표현되어 있는 점과 춤사위가 힘차고 의젓한 ‘매김새’를 주축으로 한다는 점이다.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기예능보유자로 하보경(하보경, 보유종목 : 양반춤·법무춤)과 김상룡(김상룡, 보유종목 : 오북춤)이 인정되었으나, 1997년 하보경이 작고하여 현재는 김상룡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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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씻김굿 [국가무형문화재 제72호]전라남도 진도지역에서 전승되는 천도굿으로 망자의 극락왕생을 위해 행하는 무속의례.천도굿이다. 망자의 극락왕생을 빌고 천도하는 굿은 전라도에서는 씻김굿, 제주도에서는 귀향풀이, 경상도에서는 오구굿, 황해도에서는 진오귀굿, 서울에서는 새남굿, 평안도에서는 다리굿 등으로 다양한 명칭이 사용된다. 진도씻김굿은 죽은 이의 영혼이 이승에서 풀지 못한 원한을 풀고서 즐겁고 편안한 세계로 갈 수 있도록 기원하는 진도지역의 굿을 말한다. 1980년 국가무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되었으며, 2001년 채계만, 김대례, 박병천, 박병원 보유자를 중심으로 한 보존회원의 실연을 바탕으로 기록화 사업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물인 기록영상과 기록도서에는 진도씻김굿의 준비과정, 연행, 전승현황 등이 담겨 있다. 춤·음악·소리·사설등의 분야에서 문학적·음악적·무용적·민속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한 초상집에서 행해지는 절제되면서도 단아한 춤사위와 아름다운 소리를 담은 음악 등은 예술성이 뛰어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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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판소리(Pansori epic chant) 의 역사 ( Video :English subtitles)판소리의 발생 판소리의 발생에 관해서는 아직 뚜렷한 정설이 없다. 다만 무가기원설, 육자백이토리설, 판놀음기원설, 광대소리기원설 등 여러 가지 학설들이 쏟아져 나와있다.어진 화랑제도에서 판소리의 뿌리를 찾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화랑제도가 과거제도로 바뀌면서 예능에 능통한 일부 화랑들은 남사당을 조직하여 유랑하기도 하였고, ‘광대’란 말 역시 화랑의 방언이기에, 판소리의 근원을 신라의 화랑에 두는 게 옳다는 주장이다. 한편, 전라도 무속을 배경으로 한 무가에서 판소리가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특히 판소리의 음악적·문화적 풍신이 전라도 무속과 유사하고, 초기 소리 광대들의 출신이 거의 무당이었으며, 무당들 중에는 전라도 지방출신이 많았다는 점 등에서 판소리의 기원을 전라도 지방으로 유추하는 것이다. 판소리는 본래, 18세기 일반 서민들의 호응이 절대적으로 뒷받침 되어 독립하고 발전한 예술 장르였다. 그러나 이후, 점차 양반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양반들의 기호에 맞는 내용으로 변화하였다. 양반들은 사설의 윤색과 개작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19세기 후반, 고창의 신재효(1812∼1884)는 구전(口傳)으로 전수되던 판소리 사설 가운데 여섯 바탕을 직접 문자로 정리하는 업적을 세웠다. 또 중인으로서 아전 출신이었던 그는, 풍부한 재력을 바탕으로 많은 판소리 제자를 배출하고 후원하기도 했다. 판소리를 생성시킨 주도 세력 또한 한강 이남의 시나위권,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무격(巫覡)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오늘날에도 시나위권의 단골(丹骨)들이 부르는 서사무가(敍事巫歌)의 연행 형태, 장단, 음조 등에서 판소리와 유사한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 주장은 타당성을 갖는다. 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혼돈과 격변의 시간을 거쳐 급격히 확대된 평민층의 현실적인 불만과 욕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하층의 천민으로서 신분 변화를 꿈꾸던 무격(巫覡)들의 이상이 결합하여, 판소리라는 새로운 민속 예술이 탄생했다. 전승 정보 지금까지 발견된 판소리 사설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 영조 30년(1754년), 만화(晩華) 유진한(柳振漢)이 지은 <만화집(晩華集)> 의 <춘향가> 한시(漢詩) 사설 200구(句)이다. 또 문헌 자료 <관우희(觀優戱)>에 의하면, 늦어도 정·순조 때에 12종의 판소리 바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과거에 급제하면 광대와 재인(才人)들을 불러 3일유가(三日遊街)하고 홍패고사(紅牌告祀)를 지내던 풍습이 있었는데, 정조 때의 가난한 선비였던 송만재(宋晩載)는 잔치를 베풀 수 없었다. 그래서 <관우희(觀優戱)> 라는 글로 이를 대신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판소리 12 마당에 관한 최초의 문헌으로 주목받고 있다. 관우희(觀優戱)에는 <심청가>,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장끼타령>, <옹고집>, <왈자타령>(↔무숙이타령), <강릉매화전>, <가짜신선타령>(→숙영낭자전) 등 12바탕 판소리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어, 당대에 성행했던 판소리의 규모와 내용 등을 익히 짐작하게 한다. 예능보유자 숙종 말 이후 영,정조 때에는 우춘대, 하은담, 최선달과 같은 명창이 있었다. 또 순조 무렵에는 권삼득, 송흥록, 모흥갑, 염계달, 고수관, 김제철, 주덕기, 황해천, 박유전, 송광록 등의 명창이 있었는데, 이 중 여덟을 골라 '전기 8명창(前期 八名唱)'이라 한다. 이때는 특히 판소리의 음악적 수준이 크게 향상되어, 권삼득의 설렁제, 모흥갑의 강산제(→東강산제), 염계달·고수관의 경드름과 추천목, 김제철·신만엽의 석화제 등 독특한 음악적 더늠이 나온 시기다. 그 밖에 동편제의 시조(始祖)인 남원 운봉의 송흥록, 중고제의 시조(始祖)인 경기도 여주 염계달의 활약도 두드러지며, 순창에서 태어나 보성 강산에서 살았던 서편제의 시조(始祖) 박유전 역시 판소리의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가왕(歌王)으로 불리던 송흥록은 진양 장단을 완성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철종 무렵에는 박만순, 이날치, 송우룡, 김세종, 장자백, 정창업, 정춘풍, 김찬업, 그리고 김정근, 한송학 등이 활약하였는데, 그 중 여덟을 골라 '후기 팔명창(後期 八名唱)'이라 한다. 전기 팔명창 시대가 판소리를 제각기 다른 스타일의 동편, 서편, 중고제 등의 유파로 분화시켰던 시기였다면, 후기 팔명창 시대는 이러한 유파적 특성과 음악적 특색이 정착되고 더욱 심화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후기 팔명창 중에서 박만순·송우룡·장자백·김찬업은 동편제를 이었고, 이날치·정창업은 서편제를, 김정근·한송학은 중고제를 각각 계승하여 널리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또 이후 고종 후기에서 일제하 1930년대까지는 '오명창 시대(五名唱 時代)'라 일컬어진다. 이 때 활약했던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박기홍, 유성준, 김채만, 전도성 등의 명창 중 다섯을 골라 '오명창(五名唱)'이라 부르곤 하는데, 대개 송만갑, 이동백,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을 꼽는 게 일반적이다. 판소리 명창은 『조선창극사』에 따르면 조선시대 영조 말기 정조 초기에 하한담·최선달 등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순조 무렵에는 권삼득·황해천·송흥록·송광록·모흥갑·염계달·김제철·신만엽·방만춘 등의 명창이 활동했다. 또 고종 초까지는 박유전·박만순·이날치·김세종·송우룡·정창업·정춘풍·장자백 등의 명창이 활동했다. 20세기 초까지는 박기홍·전도성·김창환·이동백·김창룡·김채만·정정렬 등이 활동했다. 판소리는 점차 무대화되다가 여성국극단에 의해 여성창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오늘날 판소리 예능보유자로는 춘향가에 김여란·김연수·김소희(본명 김순옥(金順玉)), 심청가에 정권진, 흥보가에 박녹주·강도근, 수궁가에 정광수(본명 정용훈(丁榕薰))·박초월, 적벽가에 박동진·박봉술·한승호(본명 한갑주(韓甲珠))가 인정되었으며 이후 춘향가에 오정숙, 심청가에 성창순·조상현이 인정되었다. 또한 춘향가에 성우향(본명 판례), 흥보가에 박송희(본명 정자), 적벽가에 송순섭이 새로 인정되었다.(2006년 상황) 현대로 넘어온 1940년 이후에는 김정문, 정응민, 공창식, 장판개, 조몽실, 임방울, 김연수, 박동실, 정광수, 성원목 등의 남자 명창과 이화중선, 박녹주, 김여란, 박초월, 김소희 등의 여류 명창이 나타나, 각기 판소리의 일가를 이루며 널리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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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판소리 명창 송순섭의 삶과 예술관논문초록 Abstract People used to call Unsan Song Soon Seop Master of Pansori, a man of never give in to adversity or tenacity singer. Relatively late age in his 22, he started practicing Pansori and learned from various renowned Masters like Gong Dae Il, Kin Joon Sup,Park Bong Sul, Kim You Su, coming and going Gwangju, Busan, Seoul. Specially, he learned almost 20 years from his teacher Park Bong Sul , , . He is the only person who mastered fully that <3 madang>. Thus currently, he is evaluated a Master, as being a successor of Dongpyeonje Pansori connecting tradition after ‘Song Hong Rok - Song Wu Ryong – Song Man Gap –Park Bong Rae – Park Man Jo –Park Bong Sul.’But for Unsan, it took 50 years fro him to became such a figure. During the period, he learned from number of teachers not to mention of his endless self study. Even after over his 50, he practiced continuously his own Sori-Korean traditional sing, while brought up his students, as a result of which in 1994, at his age 54, he could win finally Jangwon-Presidential Prize at Jeonjudaesasup Competition. In the year 2000, he fell down in sick due to stroke while putting his best effort for the development of Pansori the country’s cultural asset. However, he never yield to such misfortune with determination to die while performing Sori, thus, he could complete sing for 3 hours for which finally he was designated as a Holder of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No.5 Pansori in May, 2002. This is the reason why Unsan is being called a man of chiljunpalki- never give in adversity or tenacity singer. Also, , he worked 24 years in Busan the place where he could have special ties by his teacher Park Bong Sul for the development of Kukak-Korean classical music –of Busan with his best effort. As stated, the reason he devoted his life time to Sori is his thought that Sori contains the spirit of our Nation for which he directed various Changguk performances –Koreal traditional Opera_ such as , , etc. In addition, he put emphasis on Saseol, rather than formal technique,because he has a belief that the true strength of Pansori lies in breathing together and communicating with public through singing the truth of life. In conclusion, Unsan is a Sorigawangdae truly loves Pansori desires many people to feel & enjoy the beauty & value of Pansori, as being a Master in our age who could devote his life for itPeople used to call Unsan Song Soon Seop Master of Pansori, a man of never give in to adversity or tenacity singer. Relatively late age in his 22, he started practicing Pansori and learned from various renowned Masters like Gong Dae Il, Kin Joon Sup, Park Bong Sul, Kim You Su, coming and going Gwangju, Busan, Seoul. Specially, he learned almost 20 years from his teacher Park Bong Sul , , . He is the only person who mastered fully that <3 madang>. Thus currently, he is evaluated a Master, as being a successor of Dongpyeonje Pansori connecting tradition after ‘Song Hong Rok - Song Wu Ryong – Song Man Gap –Park Bong Rae – Park Man Jo –Park Bong Sul.’ But for Unsan, it took 50 years fro him to became such a figure. During the period, he learned from number of teachers not to mention of his endless self study. Even after over his 50, he practiced continuously his own Sori-Korean traditional sing, while brought up his students, as a result of which in 1994, at his age 54, he could win finally Jangwon-Presidential Prize at Jeonjudaesasup Competition. In the year 2000, he fell down in sick due to stroke while putting his best effort for the development of Pansori the country’s cultural asset. However, he never yield to such misfortune with determination to die while performing Sori, thus, he could complete sing for 3 hours for which finally he was designated as a Holder of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No.5 Pansori in May, 2002. This is the reason why Unsan is being called a man of chiljunpalki- never give in adversity or tenacity singer. Also, , he worked 24 years in Busan the place where he could have special ties by his teacher Park Bong Sul for the development of Kukak-Korean classical music –of Busan with his best effort. As stated, the reason he devoted his life time to Sori is his thought that Sori contains the spirit of our Nation for which he directed various Changguk performances –Koreal traditional Opera_ such as , , etc. In addition, he put emphasis on Saseol, rather than formal technique, because he has a belief that the true strength of Pansori lies in breathing together and communicating with public through singing the truth of life. In conclusion, Unsan is a Sorigawangdae truly loves Pansori desires many people to feel & enjoy the beauty & value of Pansori, as being a Master in our age who could devote his life for it 목차 목차 판소리 명창 송순섭의 삶과 예술관 / 박길희 1 I. 머리말 1 II. 삶과 활동 4 1. 어린 시절과 어머니 4 2. 판소리 입문 및 스승들과의 만남 7 3. 소리꾼으로서의 활동 13 III. 운산의 예술관 18 1. 민족적 주체의식 고취 18 2. 관객과의 진정한 소통 추구 23 IV. 맺음말 27 |참고문헌| 29 |Abstract|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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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판소리 명창 이일주( 李一珠)의 생애와 예술논문초록 판소리 명창은 소리의 실천을 통하여 문화의 정수를 계승·창조함으로써 민중 측의 평가와 선택을 받아 민족문화 총체의 형성에 기여하는 사람이다. 판소리의 사설이나 그 음악적 특성 등을 알아보는 것도 좋지만, 판소리의 전승자요 연주자인 명창을 논하는 것도 판소리 연구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판소리는 구두전승예술이기 때문에 후계자에게 전수하고 죽으면 그 전수한 것 이외에는 각 명창에 대한 것은 모두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대단한 명창이었다는 말만 몇 가지 에피소드와 더불어 무슨 전설처럼 전해진다. 그래서 옛 명창을 논하기가 힘이 든다. 판소리를 할 때, 나아가서는 학문적 작업의 대상으로 삼으려 할 때, 지난날의 명창에 대한 검토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부각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한 예술가의 생애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데는 여러 가지 까닭이 있을 수 있겠다. 첫째 한 예술가의 삶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를 들 수 있고 둘째, 그 예술이 속하는 문화와의 단절을 중시해서 관심이 집중되는 경우 등을 상정할 수 있다. 그런대로 가장 중요한 것은 후자의 경우일 것이다. 종래의 이력서식 생애를 가지고는 도저히 그 예술이나 그가 속한 문화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이미 작고한 명창들의 생애사는 틀에 맞춰서 모든 것이 재구성되고 말았기 때문에 안타깝기 그지없다. 세월이 더 흘러가면 짜맞추기식 명창론이 더욱 심화되어 예술을 알기 위한 생애사는 전혀 쓸모없는 것이 될 가능성이 짙다. 이러한 문제를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명창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명창 이일주(李一珠)는 충청도에서 출생하여 전라도에 터를 잡아 동초제 2대 전수자로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 2호로 지정되어 있는 현존하는 소리꾼이다. 그의 판소리는 국창 이날치의 증손이라는 가계의 내력과 함께 특히 부친 이기중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는 "동초 김연수바디”를 오정숙 명창으로부터 이어받아 전북을 동초제의 성지로 끌어올린 주역이기도 하다.부친 이기중의 영향으로 판소리에 입문한 이일주는 당대를 대표했던 박초월, 김소희 문하를 사사하면서 명창들의 음악세계를 물려받음과 동시에 새로운 바디 탄생을 예고할 수 있었다. 그 후 동초제 여류명창 오정숙을 만나 5바탕에 적공함으로써 판소리계의 이목을 받아왔다. 타고난 목구성과 피나는 수련으로 성음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는 평가를 받는다. 동초제 심청가로 전주대사습에 도전하여 1979년 영예의 장원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써 자타가 공인하는 명창으로 거듭나기에 이른다. 그 후 1982년 도문화상 수상과 함께 1984년에는 전라북도 최초의 무형문화재가 되었다. 1986년부터 전라북도립국악원 창악교수로 초빙되어 2001년까지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그 결과 전국 최다 대통령상 수상자를 배출하기도 하였다.한편 1990년 KBS 국악대상에 선정되었으며, 2006년 12월에는 목정문화상을 2007년 11월에는 동리대상을 수상하였다. 소리에 임하는 정열도 대단하여 1981년 심청가 완창발표회를 시작으로 1983년 춘향가, 1990년 수궁가, 1992년 흥보가 등을 국립극장에서 완창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신나라 레코드사의 초청으로 남도민요, 판소리 5바탕이 완창 취입되어 출반되고 있다.이상에서 이일주의 생애 및 예술 활동과 예술 세계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현존하는 판소리 명창의 일대기를 조감할 때, 이일주에 대한 연구는 단편적인 생애사와 음반의 해설서의 단편적인 언급만 이루어지고 있으며, 판소리사적 위상에 걸맞은 이일주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에 본고는 이일주의 생애와 예술을 필자와의 대담을 통하여 실상의 명쾌한 접근을 이루었으며, 왜 이일주가 판소리사에서 새롭게 주목되어야 하는가를 자세히 살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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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송순섭 판소리 연구논문초록 송순섭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현역 동편제 소리꾼이다. 판소리의 위상이 세계적으로 증대된 오늘날, 판소리 ‘보존’과 ‘발전’을 위해 힘을 기울이는 송순섭의 노력은 더욱 눈길을 끈다. 본 연구에서는 송순섭이 지금까지 형성해 온 예술세계를 살피기 위해 종합예술인 판소리의 장르적 성격을 살리고자 공연학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공연학은 인류학의 인접학문으로 인류학의 방법론이 작용된다. 이러한 배경 하에 문헌자료 및 음반자료를 중심으로 전개된 종래의 판소리 연구의 방법론에 송순섭 본인과의 면담 조사를 첨가하였다. ‘판소리 연구’ 이름 아래 송순섭의 창극 활동까지 주목한 것은 공연학적 판소리 연구의 전제조건인 공연자 검토 단계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기 때문이다.예술세계 구축에는 성장과정이나 과거의 기억, 사승·교류 관계 등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때문에 송순섭의 예술세계를 고찰하기 전에 제Ⅱ장에서 생애사 기술을 시도하였다. 출생부터 현재까지 ‘가족 관계와 판소리계 입문→박봉술과의 만남→김연수와의 교류→전수자로서 시련→인간문화재로서 후손 교육’이라는 통시적인 흐름에 따라 정리하였다. 송순섭은 박봉술을 직계 스승으로 모심으로써 정통 동편제 계승자로서의 의식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김연수와의 교류를 통해 사설의 중요성과 적극적인 창작 의욕을 길렀다. 또 전수자로서 내림소리의 완창 공연에 진력하는 모습과 인간문화재 지정 후 교육자로서의 면모 확대 양상을 살폈다.송순섭의 주된 활동 내용은 판소리의 공연 및 사설 정리, 창극 공연의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제Ⅲ장에서는 내림소리 공연 및 사설 정리에 주목하여 여기에 나타나는 예술세계를 살폈다. 내림소리 세 바탕은 현존 판소리 다섯 바탕 가운데 동편제적인 요소가 강하다. 탄탄한 구조와 간략한 사설이 남성적이라는 동편제를 대표하는 특징은 송순섭에 와서 더욱 강화되었다. 송순섭 창본은 음악·문학·연극적 견지에서 수용자 입장을 최대한 고려하여 형성되었다.즉 청관중의 청각적 재미 추구, 독서물로서 가치 확장, 사설 압축과 너름새 확대가 그 창본의 특징이다.제Ⅳ장에서는 창극 공연에 주목하여 그 예술세계를 살폈다.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한 창극에서는 대부분 일본과의 불행한 역사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기서는 송순섭의 애국애족 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한편 설화나 동화 속의 이야기를 주제로 삼은 창극에서는 한국적인 정서를 전하였다. 송순섭의 창극에는 연출적 지향이 셋으로 대분된다. 청관중 지향으로 오락성 강화, 후계자 지향으로 교육적 활용, 작중인물 지향으로 제의성 강조가 그것이다.제Ⅴ장에서는 송순섭 판소리의 판소리사적 가치와 의의를 확인하였다. 송순섭이 가진 특징적인 세 가지 면모에 주목하여 그 가치와 의의를 고찰하였다. 첫째 ‘국악 불모지를 개척한 소리꾼’으로서 부산에 거주한 24년 동안 국악 부흥을 위해 진력하였다. 부산에서 변함없는 국악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그의 노력이 밑바탕된 결과라 하겠다. 둘째 ‘동편제 소리를 계승하는 소리꾼’으로서 송흥록을 시조로 한 동편제 법통을 간직하고 있다. 셋째 ‘창극인으로서 소리꾼’으로서 창극 공연을 통해 국악계 내외의 정신적 거리를 줄여줌과 동시에 국악계의 미래를 쌓아가는 후손 교육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본래 ‘한국 고유의 민속예술’이었던 판소리는 ‘세계의 소리’로 의의가 확장되었다. 이에 따라 판소리계는 ‘보존’과 ‘발전’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극복해야만 한다는 사명을 따게 되었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본 연구에서는 송순섭에 의한 ‘후학 양성’과 ‘국악계의 문호 해방’을 제시하였다. 시대 요구에 적합한 활동을 의욕적으로 지속하고 있는 송순섭이야말로 판소리를 한 층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소리꾼이라 믿으며, 21세기 판소리와 소리꾼으로서의 참모습을 전망하였다.Song Sun-seop is current dongpyeonje professional performer who is designated as a holder of No. 5 Pansori , an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property. Today when the fame of Pansori is increased internationally, Song Sun-seop's effort trying to 'preserve' and 'develop' the Pansori pays more attention. This study tried the Performance Studies approach emphasizing the genre features of Pansori as a composite art in order to investigate his art world which has been formed until now. The Performance Studies as a related study relates to the anthropology, so the methodology of anthropology is used in this study field. This study added the data from interviewing Song Sun-seop to the existing methodology used in previous Pansori studies, which were developed around the literature review and music album data under such background. Under the title of 'Pansori Study', the reason that this study focused on his activity in Changguk(Korean traditional opera) was because the activity was a necessary factor for the stage of reviewing performer as the precondition of Pansori research using the Performance Studies approach.The performer's growth process, his remembrances, his relationship with teachers and successors are reflected in forming the art world. So, before reviewing Song Sun-seop's art world, this study tried to describe his life history in Chapter II. From the birth to today, his life story is described in time order under the subtitles of his family and his entrance to the Pansori world → his meeting with Park Bong-sul → his exchange with Kim Yeon-su → his ordeal as a Pansori bearer → his teaching successors as a human cultural asset. By being directly taught by Park Bong-sul, he established the consciousness as the orthodox bearer of dongpyeonje. Through his exchange with Kim Yeon-su, Song Sun-seop recognized the importance of narration called as saseol in Pansori, and raised active creation spirit. Besides, this study investigated his appearance taking full efforts in performance of naerim-sori(ancestral sound of voice and music) in full as the bearer of dongpyeonje and his expanded ability as a teacher after being designated as a human cultural asset.Song Sun-seop's major activities can be divided into 3 categories: performances of , , ; the saseol summarization; the performance in Changguk. Chapter III focused on his naerim-sori performances and saesol summarization, and investigated his art world seen in these activities. 3 batang(version) Pansori works of naerim-sori have the strongest features of dongpyenje among the existing 5 batang Pansori works. Dongpyeonje's representative, masculine features of solid structure and simple are more reinforced by Song Sun-seop. His changbon(a vocal music script) was composed in fully considering the receiver from the aspects of music, literature and drama. That is, the increased auditive interest for audience, the expanded value as the reading text, the compressed saseol and the expanded neorumsae (motions) were the features of his changbon.In Chapter IV, this study focused his performances in Changguk and investigated his art world around such activities. Most Changgeuk by Song Sun-seop based on historical figures have the background of Korean's misfortunate history colonized by Japanese. In this section, Song Sun-seop's patriotic spirit can be seen. Meanwhile, in Changguk dealing the tales or fables, he delivered Korean emotions to the audience. His performances in Changguk are divided into 3 directional orientations: the audience-orientation for reinforcing the amusement, the successor-orientation for educational utilization, and the character-orientation for emphasizing the proposal feature.Chapter Ⅴ identified Song Sun-seop's value and meaning as a professional performer in the Pansori history. This study focused on his 3 aspects as a performer and investigated their values and meanings. First, he have took full efforts for re-boosting the gukak(Korean traditional music) for 24 years while he has lived in Busan as the performer developing the barren land against gukak. Gukak's constant popularity in Busan may be the result from his efforts. Second, as the successor of the songs of dongpyeonje, he succeeded to the dongpyeonje line originated from Song Heung-rok, the ancestor of dongpyeonje. Third, as the performer playing the Changguk, he has greatly contributed in narrowing the psychological distance between gukak world and out world through several Changguk performances as well as training disciples to be responsible for future gukak world.Pansori, which was originally the Korean unique folk art, expanded its meaning into the world sound. Accordingly, the Pansori world came to have the mission to solve the both challenges of 'preservation' and 'development'. To solve these matters, this study proposed the both solutions of training disciples and opening the door of gukak world. Believing that Song Sun-seop consistently doing activities suitable for the current age's needs would be the professional performer to leading the Pansori to a higher plane of achievement, this study forecasted the Pansori's status in 21C and Song Sun-seop's true appearance as a professional perfor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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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김동진류 대금산조 연구논문초록 본 연구는 김동진류 대금산조의 음악적 특징을 고찰하는 것으로 김동진의 생애사 연구를 통해 그의 음악활동과 김동진 대금산조 형성을 논구하고, 김동진류 대금산조의 음악적 특징을 고찰하는 것으로 본 연구를 통해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첫째, 김동진의 생애사를 검토하여, 그의 음악활동이 기반이 되어 김동진류 대금산조가 형성되었음을 밝혔다. 어린 시절부터 남도예인들의 풍류를 보고 자라며 자연스럽게 국악인으로서 입문하게 되었고, 고수로 활동한 그의 형 김동준 및 당대의 뛰어난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의 음악세계를 확장하였으며, 김동진류 대금산조를 탄생시켰다. 둘째, 김동진류 대금산조의 독자선율을 추출하기 위해 김동진이 영향을 받은 강백천류 대금산조 및 한주환류 대금산조와 선율 비교분석을 한 바, 조 구성과 선율 진행에 있어 강백천의 가락보다는 한주환의 가락과 매우 유사한 점이 많음을 알 수 있었다. 보편적으로 김동진류 대금산조는 시나위더늠의 산조로 인식되고 있으나 시나위더늠의 강백천류 대금산조 및 소리더늠의 한주환류 대금산조와의 비교분석을 통해 김동진류 대금산조는 소리더늠의 한주환류 대금산조와 관련성이 깊다. 조의 구성에서도 강백천류 대금산조에는 우조보다 계면조로만 나타난데 비해, 한주환류 대금산조와 김동진류 대금산조는 조의 명칭만 다를 뿐 대부분 동일한 조로 구성되어 있다. 셋째, 강백천류 대금산조의 독자선율 중 유사·반복선율을 분석하여 그 가락을 여타 음악과 비교 분석한 결과, 김동진류 대금산조의 특징적인 선율은 남도의 판소리와 민요 선율에서 기악화된 선율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밝혔다. 이상 본 연구의 의의는 첫째, 대금산조의 명인 김동진은 성장과정에서 주변의 음악적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였다.둘째, 보편적으로 김동진류 대금산조는 시나위더늠의 강백천류 대금산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소리더늠의 한주환류 대금산조와 더 깊은 관련성이 있음을 밝혔다.셋째, 김동진류 대금산조에 존재하는 선율 중 다수는 판소리와 남도민요의 선율을 기악화 한 것임을 조명하였다.김동진은 유년시절 판소리 명창들과의 조우가 잦았고, 성장 후 상경하여 ‘종로패’란 이름으로 민속악의 명인들과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창극, 무용, 민요 등의 반주와 시나위 합주, 대금산조 독주 등의 연주활동을 통해 민속예인으로서의 왕성한 음악인생을 펼쳤으며, 김동진류 대금산조를 완성하여 후대에 계승토록 하였다.다만, 그의 뛰어난 예술성에도 불구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 버린 점과 더불어 지역적인 한계로 인해 많은 연주자들에게 전해지지 못하였다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본 연구를 통해 김동진류 대금산조의 맥이 오롯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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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선우일선의 신민요 연구초록 일제강점기 우리 음악계는 신민요라는 서양음악의 영향을 받은 음악 사조가 발생·유행하면서 전환기를 맞게 된다. 국악계와 대중음악계가 모두 신민요에 주목하며 일시적 경향으로서 신민요가 아닌 대세적 음악으로 신민요를 수용하게 된 것이다. 특히 1934년 로 데뷔한 선우일선은 이러한 신민요의 대중적 입지를 공고히 한 대표적인 가수로 1940년대 초까지 활동하면서 많은 신민요와 민요, 가요곡을 발표하였다. 또한 선우일선의 신민요는 오늘날까지 남북한에서 민요 혹은 가요라는 이름으로 널리 보급되며 불리고 있다. 이 논문은 선우일선 신민요의 음악적 특징을 비롯해, 오늘날 선우일선의 신민요가 어떤 방식으로 수용되고 있는지를 연구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선우일선이 부른 신민요의 특징 중 하나는 토속적인 단어를 사용하거나 순 우리말의 입소리를 가장 잘 활용한 소리꾼이라는 것으로 언어선택의 탁월성을 들 수 있다. 전달성의 어려움 때문에 ‘고어’ 내지 ‘토속어’를 노래속에 담아내는 것이 쉽지 않음에도 선우일선의 신민요속에는 아름다운 옛 언어들이 자연스럽게 노랫말로 사용되고 있다.선우일선 신민요 선법의 특징은 경토리의 곡들이 대부분이고 가끔 메나리 토리와 육자배기 토리도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선우일선이 경서도 소리에 능통했다는 뜻인데, 민요조로 된 서도잡가 , 경기민요 , , 과 메나리조 민요 , , 등 많은 민요음반을 남겼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반면 유행가를 많이 부르지 않은 덕분에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다른 신민요 가수와 달리 일본식 요나누키 음계가 주를 이루는 곡은 거의 없으며, 장음계와 화성 단음계를 이용한 흔적도 보인다.선우일선의 신민요 가운데 가장 많이 보이는 선법은 경토리 계열이며 이러한 경토리 계열의 신민요는 주로 신경토리와 신반경토리로 신민요로 나뉜다.선우일선의 신민요 가운데 오늘날까지 활발히 전승되고 있는 곡은 , , , , 등 약 10여곡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제대로 간직한 채 전승되는 곡이 있는가 하면 아예 다른 느낌의 곡으로 변화하여 불리고 있는 곡들도 있다.(중략) The musical world of Korea was at a turning point, as Sinminyo(new folksong), the trend of music affected by western music, emerged and became popular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The Korean classical music circle and the Korean popular music circle all have accepted Sinminyo, noting its value, not in a passing phase but in the mainstream.Particularly, Seonwooilseon who debuted back in 1934 with the song [Catching the flowers], made Sinminyo become widely popular and continued her singing career, releasing Sinminyo, folk songs, and popular songs, as a representative singer until the early 1940’sAlso, Seonwooilseon’s Sinminyo, widely known as a folk song or a popular music in South and North Korea to this day, is still sung.In this thesis, the goal is to gain a understanding of how Seonwooilseon’s Sinminyo has been accepted and the characteristics of Seonwooilseon’s Sinminyo.One of the characteristics of Seonwooilseon’s Sinminyo is her excellent choice for the language, as a singer using indigenous terms and expressions as well as YIBSORY of pure Korean words.Though it is not easy to express archaic words or indigenous words through the songs due to the difficulty of communicating ideas and feelings, beautiful traditional words are naturally being used in her lyrics.The mode of Seonwooilseon’s Sinminyo features that many of her songs are Gyeongtori, and some are Menaritori and yukjabaegitori.This means Seonwooilseon was a woman versed in Gyeonseodosori, and this can be confirmed that she released many records of folk songs such as from Seodojapga, , , from Gyeonggiminyo, , , from Menariminyo, and so forth..On the other hand, because she didn’t sing many popular songs, unlike other Sinminyo singers around the same time, few of her songs had Japanese Yonanooki scale and some even show major scales and harmonic minor scales.The most remarkable mode of her Sinminy is in Gyeongtori category, and this kind of Sinminy is mainly divided into Singyeongtori and Sinbangyeongtori.So far, about ten songs such as , , , , habe been inherited among Seonwooilseon‘s Sinminyo, but some have been sung in original versions while others have been changed to new versions."Of these, and are inherited into and from Gyeonggiminyo, into from Seodominyo. However, they are inherited not in original versions but in new versions, for political reasons or melodic complex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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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경기민요 명창 묵계월의 생애사 연구논문초록 본 논문은 경기민요 명창 묵계월의 생애사Life history를 통해, 경기민요의 근․현대사를 정리함으로써, 전통예술의 학론적 기반을 구축하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명창의 생애사’란 명제의 특성상 가계家系는 물론, 특히 ‘구술심전口述心傳’에 의한 도제식徒弟式 전수傳受 교육상 사승師承 관계를 예의 주시했다. 묵계월의 가계는 당시 대부분의 가창가歌唱家가 그러했듯이 한미寒微해 11세부터 20세까지 양어머니에 의해 교육된 소리꾼으로 출발했지만, 중요무형문화재로 선발된 이후 비로소 예인藝人으로서의 신분 상승, 나아가 그 영예에 충실하고자 자신의 사명감에 솔선수범率先垂範하였음을 증명하였으며, 사승관계를 통해 경기민요에 관심 갖게 된 동기 및 그 학습과정과, 공연 및 음반활동, 특히 경기민요연구회 결성과 연구회 활동, 나아가 경기민요의 무형문화재 등재 과정을 경기민요의 발달사적 차원에서 정리하였다. 물론 이상의 정리 작업이 참고문헌을 통한 연구·정리가 아니라. 온전히 한평생(80여년) 경기민요 가창자로 살아온 묵계월과, 40여년 스승으로 모시고 함께 활동해 온 연구자와의 대담 녹취는 그 어떤 유형의 문헌적 기록 이상의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녔으며, 노령으로 인한 기억상실은 몇몇 문헌에서 보충하므로, 묵계월 개인의 전기적 가치 이상 경기민요의 발전사적 가치 및 미래 제시적 연구물이고자 하였다. 특히 목계월·안비취·이은주 3인을 주축으로 한 경기민요연구회의 세 명인은 경기민요 무형문화재로 등재된 이후, 이들 명인은 생활인으로서의 명창이 아닌, 공인, 이른바 예인藝人으로서의 품위는 물론, 사명을 다 했음을 무대공연 및 왕성한 음반활동, 그리고 민속예술의 대중화에 기여한 민속공연활동의 시례를 다양한 팜플렛 및 초대장·홍보게시물 등 자료 제시를 통해 예증했다. 그 중 특히 묵계월의 남다른 업적은 거의 독보적으로 이문원 소리선생으로부터 전수傳受해 완창完唱해 오던 송서율창誦書律唱의 맥을 제자 유창에게 전수傳授해 2009년 서울시 문화재 제 41호 송서율창 보유자에게 계승하므로 스승의 도는 물론, 당대에서 끊어질 뻔했던 한 전통예술의 맥을 이었다는 점에서 참다운 사도師道를 다했다 할 것이다. 이 밖에도 묵계월의 문하에는 인간문화재 보유자 2명, 전수조교 4명, 전수 장학생 5명, 대통령상 수상자 9명, 경기민요 이수자 36명 등 많은 후학을 양성하므로 민속예술가로서는 물론, 위대한 교육자의 역할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예능 못지않게 중시한 인성교육의 면면을 점검하고 예증하였다.따라서 묵계월 명창 한 분의 생애사 논고였지만, 이 논고를 통해 초기 한국 민요의 발달 과정은 물론, 앞으로 국악인 모두가 사명처럼 수행해야 할 과제를 제시하므로 경기민요의 발전사 및 위대한 교육자로서의 면모를 밝혀 후학의 귀감으로 삼고자 했다.This article aims to establish an academic basis of Gyeonggi folk song, a type of Korean traditional art by examining the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of Gyeonggi folk song through the life history of a master singer Muk Gyewol. Following the typical definition of ‘life history’ of a master singer, the article particularly focuses on both the pedigree, and the unique relations between a master and pupils that are formed especially when obeying to masters and his or her teachings are considered as strictly absolute and such teaching are usually orally passed down to the pupils.As most other singer families did in Korea, Muk’s family had low social status. When she was eleven, Muk started her career as a professional folk song singer under the teachings of her stepmother, which continued till she turned to twenty. It was not until she was selected as an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when she was finally upwardly mobile. The article shows how Muk took the initiative and set an example of a master singer in order to devote herself to the honor of the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Also the article attempts to explain Muk’s reasons and motivations to get involved in Gyeonggi folk song, the learning process, performance and other activities such as forming Gyeonggi folk song research association and its activity by thoroughly understanding the relations between a master and pupils. Moreover, the process of listing Gyeonggi folk song as an Intangible Cultural Property was examined from the aspect of the development of the Gyeonggi folk song.This research is not just conducted through the examinations on references or previous researches. It also includes the record of conversation between the researcher who has been a pupil of Muk for about 40 years and Muk herself who has lived as a master singer of Gyeonggi folk song for her whole life. Surely it is more valuable resource than any other literature records on this topic. However, Muk’s loss of memory due to old age was supplemented by other literature records. Hence, the article proposes more than just an individual biography: the valuable development of Gyeonggi folk song and its future value. After they were designated as an Intangible Cultural Treasure, Muk Gyewol, An Bi-chwi, and Lee Eun-joo, who are master singers as well as the main figures of the Gyeonggi folk song research association, not only maintained dignity as a public figure but also greatly performed their mission as a master singer. The article also illustrates it through their stage performance, active involvement in recording and shows how folk performance contributed to popularization of folk art by investigating various pamphlets, invitations and advertisements of the performance.The unique and great achievement of Muk Gyewol is in her making great efforts to teach and passing down her skills to her pupils, which can be seen as unequaled. She had carried on the legacy of singing Songseo-yulchang that she learned from her teacher, Lee Munwon and succeeded to her pupil, Yoo Chang who were designated as the 41 Intangible Cultural Treasure of Seoul in 2009. As a result, it can be said that Muk prevented the tradition from being broken off. Surprisingly, under Muk’s teaching there are two students who hold the designation of Human Cultural Asset, four apprentices as assistant instructors, five apprentices with scholarship, nine awardees of President Prize and thirty six students who completed the Gyeonggi folk song course. She fostered numerous pupils and fulfilled the mission both as a master singer and folk artists. Furthermore, she not only focused on the students’ skills as a singer but also paid close attention to build students’ upright character as an individualIn conclusion, the article deals with the life history of a master singer, Muk Gyewol and covers the overall history of Korea’s Gyeonggi folk song. Also it shows how Muk Gyewol has set an example of a great teacher for the future generation and successfully fulfilled her mission as a master singer through her whole life. Finally it suggests tasks that are assigned to other younger Korean folk sing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