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신문TV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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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희 '살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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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이북5도 무형문화재축제 성황리에 막을 내리다이북무형문화재연합회는 19개의 이북무형문화재 단체와 함께 지난 10월 15일 토요일 오후 2시에 상명아트센터 계당홀에서 ‘이북5도 무형문화재 축제’를 선보였다. 이북무형문화재연합회가 주관하고 국립무형유산원과 행정안전부 이북5도위원회가 후원하는 이번 축제는 2012년 제1회를 시작으로 올해 제11회를 맞이하는 축제로 이북5도 소속 무형문화재 단체 19종목이 함께 무대를 만들었다. 실향민의 아픔을 노래하고 통일을 기원하는 춤으로 만들어 내는 제11회 이북5도 무형문화재 축제는 이북5도 무형유산의 상징적 의미를 감동으로 함께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북5도 무형문화재연합회(이사장 차지언)는 우리 전통문화와 예술은 우리 민족의 긍지이며 특히 이념과 사상을 초월한 이북5도의 전통 예술은 평화 통일과 민족 번영의 상징이 될 것이며, 통일 염원의 의지를 담은 ‘이북5도 무형문화재 축제’는 모두에 감동을 전하며 마음이 하나 되게 하는 무대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고 전한다. 이북무형문화재연합회 참가 19개의 단체 황해도 무형문화재 제1호 만구대탁굿, 제2호 산염불, 난봉가, 제3호 놀량사거리, 제4호 화관무, 제5호 최영장군당굿, 제6호 대동굿, 제7호 황해도배뱅이굿 평안남도 무형문화재 제1호 평양검무, 제2호 향두계놀이, 제4호 평남수건춤, 제5호 평안도배뱅이굿 평안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영변성황대제, 제3호 평안도다리굿, 제4호 평북농요 함경남도 무형문화재 제1호 돈돌날이, 제2호 퉁소신아우 함경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 애원성, 제2호 두만강뗏목놀이소리, 제3호 함북선녀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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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이북5도 무형문화재축제이북무형문화재연합회는 19개의 이북무형문화재 단체와 함께 지난 10월 15일 토요일 오후 2시에 상명아트센터 계당홀에서 ‘이북5도 무형문화재 축제’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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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 예능보유자 김천흥의 '춘앵무'심소(心韶) 김천흥(1909~2007)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해금과 일무), 39호 ‘처용무’ 예능보유자로 활약했다. 이왕직 아악부 아악수장, 국립국악원 원로사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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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일과 해금플러스'+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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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필하모니홀 대극장에서 선보인 국립국악원 종묘제례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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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제1회 서울국악축제' No 마스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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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무 진유림의 오색춤판진유림, 그녀는 우리시대 명무로서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와 제97호 살풀이 이수자로 전주대사습놀이 장원을 비롯하여 한국국악협회 국악대전 대통령상을 수상한 춤꾼이다. 승무는 승려들이 추는 속칭 '중춤'이라 하지만 불교의식에서 승려가 추는 춤이 아니고 흰 장삼에 붉은 가사를 어깨에 매고 흰 고깔을 쓰고 추는 민속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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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도립국악단, 아리랑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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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국악] 2018 남북정상회담 만찬식에 듣는 해금과 옥류금"해금은 오직 두 줄로 소리를 내죠. 남과 북, 적대와 평화 그리고 그 속의 웃음줄과 울음줄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남측 해금과 북측 옥류금의 합주로 만찬의 막을 열었던 두 악기에 대해 그는 "소리를 내는 방식이 다르지만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 냈다”며 "남과 북도 화음을 내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북한은 1953년부터 민속악기 개량 사업이 시작되었다. 옥류금은 1970년 이후 만들어졌고, 김정일 전 위원장이 이름을 직접 지었다. 현이 33줄인 발현악기이고 중국 연변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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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창 안숙선국창으로 불리는 안숙선은 어린 시절부터 각종 학생 명창대회에 입상하면서 '남원의 애기명창'으로 불렸다. 31세에 국립창극단에 입단해 〈별주부전〉의 토끼 역, 〈심청전〉의 심청 역, 〈춘향전〉의 춘향 역 등 주역을 두루 맡았다. 38세부터 51세까지 박봉술 바디 〈적벽가〉, 김소희 바디 〈춘향가〉, 정광수 바디 〈수궁가〉, 김소희 바디 〈흥보가〉 등 판소리 다섯 마당을 모두 완창했다. 같은 해 남원춘향제 전국판소리명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안숙선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보유자(2022-) 1949년 전북 남원 출생8세에 이모 강순영에게 가야금을 배우며 국악에 입문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남원국악원에서 수학19세에 서울로 이주, 만정 김소희 문하에서 판소리 공부1986년부터 1990년까지 판소리 다섯 바탕 완창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2013~2015)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특임 교수(2022-)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1997-2022)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1998-2013) 국립창극단 제4,7대 단장겸 예술감독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회 조직위원장 남원춘향제 제전위원회 제전위원장 동아국악콩쿠르 자문위원회 자문위원 훈장 2021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1998년 프랑스 문예공로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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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에서 28년만에 열린 남북합동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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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중계]국민심사단이 평가하는 제16회 과천 전국 경기소리 경창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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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류스타 1호, 피카소도 반한 최승희최승희(崔承喜·1911~1969)는 1937년부터 1940년까지 3년 6개월 동안 미국과 유럽, 중남미를 순회하며 주요 극장에서 독립적인 무용 리사이틀을 개최한 원조(元祖) 한류스타 1호이었다. 최승희는 "파리에서는 세계적 미술가 피카소, 그밖에 콕트(장 콕토?), 마티스, 데고부라 장고푸드 등 제씨였는데 그분들이 제 무용을 열심히 관람해 주었습니다"라고 밝혔다.(잡지 ‘삼천리’(1941년4월호)인터뷰) 프랑스 파리 샤요극장 공연(1939년6월15일)은 피카소와 마티스 등 파리의 쟁쟁한 예술가도 관람할 만큼, 주목을 받았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국내 신문에도 보도될 정도였다. ‘삼천명이나 들어가는 극장의 객석을 전부 만원시켰을 뿐 아니라 불란서의 극단, 영화계, 화단의 명사들을 일당에 모아놓고 최 여사 독특의 세련된 예술로써 끝까지 미혹시켜 이 불란서예원에 대화제를 제공하고 있다 한다. 그날 밤에 모인 명사들 중에는 피카소, 마티스, 로당상을 필두로 미셸 시몽(영화배우) 등이 있었다 한다. ‘( ‘구주의 인기를 독점한 파리의 최승희씨’, 조선일보 1939년7월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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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봉농악을 지키는 양진성 예능보유자양순용 명인의 기예는 그의 아들 양진성과 양진환에게 이어지고 있다. 양순용 선생의 호는 필봉(筆峯). 국가무형문화재 제11-마호 임실필봉농악 기예능 보유자. 전라북도 임실 출신. 보유종목은 상쇠이다. 본업은 농업. 언변이 좋고 기억력이 비상하여 꽹과리를 잡으면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상당히 강하다. 양순용이 작고한 후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된 임실필봉농악 공연에서는 양진성이 상쇠를 잡아 아버지의 대를 이어 근사한 공연을 펼쳐, 보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 일이 있다. 장남과 차남은 남원민속국악원에서 부친의 맥을 잇고 있다. 1988년 8월 1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호남 좌도 농악을 대표하는 판굿이다. 곡성(谷城)농악, 남원금지(南原金池)농악과 함께 남원상쇠 전판이(田板伊) 계보에 들어간다. 1920년경 상쇠 박학삼을 초빙하면서 예부터 내려오던 당산굿, 마당밟이 등의 단순한 농악이 높은 수준의 농악으로 발전했다. 농악대는 큰기, 영기, 나팔, 대포수, 창부, 조리중, 양반, 각시, 무동, 농구(상쇠의 제자), 화동, 꽹과리, 징, 장구, 북 등 40여 명으로 구성된다. 현재 전승하고 있는 농악의 종류는 섣달 그믐날 치는 매굿, 정초에 치는 마당밟이, 정월 초아흐렛날 치는 당산굿을 비롯하여 대보름날 행해지던 노디고사굿, 찰밥걷기농악, 대보름 뒤 마을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딴마을에서 치는 걸궁굿(걸립굿), 두레굿 등이 있다. 또한 정초에 집집을 돌면서 뜰볼비굿을 하고 나서 날을 잡아 넓은 마당에서 밤을 지새며 벌이는 판굿이 유명하다.판굿은 임실필봉농악 중에서도 가장 예술성이 뛰어난 것으로 꼽히는데 채굿, 호허굿, 풍류굿, 삼방진, 머지기, 가진영산, 노래굿, 춤굿, 수박치기, 등지기, 군영놀이, 도둑잽이, 탈머리의 순서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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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놀이 명장, 이광수의 신명195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이광수는 전문연희패(남사당)를 이끌던 부친 이점식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풍물과 함께 생활, 남사당패 행중으로 활동하며 타고난 예술적 천재성을 발휘했다. 남운용, 최성구 등 대가들로부터 꽹과리를 사사 받았다. (사)민족음악원을 창단한 이광수(북)는 김덕수(장고), 최종실(징), 생전에 상쇠를 맡았던 고 김용배 명인(꽹과리)과 더불어 1978년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사물놀이를 창시한 주역들이다. 사물놀이로 전 세계를 누비며 한국 전통문화의 전령사 역할도 하고 있다. 사물놀이는 사물(四物) 즉, 꽹과리 · 장구 · 북 · 징 등 네 가지 악기 놀이(연주)라는 의미다. 야외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 구성의 풍물놀이를 1978년 무대예술로 각색한 것이 사물놀이다. 이광수 명장은 1957년 남사당패에 입문했고 10살때인 1962년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후 꾸준한 공연활동을 펼치다 1993년 민족음악원을 창단해 지속적으로 활동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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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무형 문화재 제2호. '양주 별산대놀이' (楊州別山臺놀이)경기도 양주시 주내면 유양리에 전승되는 가면극. 음악 반주가 따르는 춤이 주가 되며, 대체로 8과장이나 10과장, 12과장으로 세분하기도 한다. 파계승(破戒僧), 몰락한 양반, 사당, 하인, 그 밖의 젊은 서민들의 등장을 통하여 현실 폭로와 풍자, 호색(好色), 웃음, 탄식 등을 보여 준다. 국가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양주楊州 별산대놀이는 서울 지역의 본산대놀이를 받아들여 18~19세기 중엽에 현지에서 재현하였다. 양주에서 본산대를 초청해서 연희한 시기는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대 초로 알려져 있다. 양주 별산대놀이의 현지 정착과 관련하여 김성대의 증언과 이두현의 조사는 18세기 후반인 1760~1800년대 정착설을 뒷받침하며, 이 밖에 채록자 미상의 1957년본은 19세기 초반인 1820~1830년대 정착설, 송석하와 최상수의 기록에 바탕을 둔 19세기 중반인 1850~1860년대 정착설 등이 있다. 위의 세 가지 견해는 양주 별산대놀이의 정착 시기가 대체로 18세기 후반~19세기 중반에 걸쳐 있음을 방증한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정착했다는 견해는 문맥으로 보아 정착보다는 산대놀이를 시작했다는 시각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19세기 초반에는 양주의 산대놀이가 확실히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양주 별산대놀이는 서울의 본산대놀이 중에서 각각 아현 산대, 사직골 딱딱이패, 구파발 산대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는 세 가지 영향설이 존재한다. 양주 지역에서 세 곳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언이 나오는 것을 보면, 양주 지역에 온 본산대패가 일정하지 않고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이는 본산대패들이 지방 공연으로 공연 날짜 약속을 지키기 어려웠고, 특히 초파일이나 단오, 추석 등과 같은 세시 명절이 끼어 있을 때에는 여러 지역에서 초청하는 관계로 본산대패들이 중복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다양한 본산대패들이 다녀갔던 것으로 보인다. 양주에서 산대놀이가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초기에 이을축李乙丑이라는 인물이 중심이 되어 관아의 잡역雜役에 종사하던 하층민들이 적극적으로 전승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또한 관에서 산대놀이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관아가 있는 읍치邑治 지역이라는 특성 등이 두루 영향을 미쳤다. 한편 하급 관리뿐만 아니라 거사・한량들도 전승에 참여하였다. 특히 양주에서 놀이가 성행할 때에는 곳곳에서 많은 구경꾼과 장사치들이 모여, 상인들에게 자릿세나 찬조금을 받아 비용을 충당하기도 했다. 연희자 김성대는 1910년대 놀이판의 분위기를 증언하면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크게 떠드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엿장수・임시 술판 등의 움막이 형성되어 난장이 형성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양주 별산대놀이가 매우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18년 무렵에 퇴기退妓 박옥화가 당시 성행하던 양주 별산대를 기녀들에게 연습시켜 상업적인 전국 순회공연을 시도했으나 춤이 제대로 되지 않아 실패하였다. 한편 1926년에서 1927년 무렵에는 성북동, 지금의 동구마케팅고등학교 밑에 있는 넓은 마당에서 탈춤 공연이 있었으며, 1929년 9월 12일 조선박람회 개장 시기에는 동대문 밖의 붕어우물 근처에서 수차례 공연하였고 그해 겨울에는 조 대비趙大妃의 거처인 경복궁의 자경전慈慶殿에서도 탈춤 공연 등이 있었다는 점에서 양주 고을 이외의 비정기적인 외부 공연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양주 별산대놀이는 일제강점기 말에 강제로 중단되었다가 광복 후에 다시 단오 행사로 복원되었으나, 6・25전쟁으로 탈이 소실되고 다수의 연희자들이 사망하면서 타격을 입게 된다. 이후 1964년 사직당 주변이 산사태로 소실되었으나, 같은 해 12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고 여덟 명이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다. 이후 사단법인 양주 별산대놀이 보존회가 결성되고 전수관이 건립되었으며, 체계적인 전수 교육과 놀이마당에서의 정기적인 공연이 이루어져 전승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시대에 따른 양주 지역 공동체와 별산대놀이의 변화양상을 보면, 크게 5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인 19세기에는 관官과 민民의 밀접한 관련 속에 산대놀이가 지역 공동체 문화로 정착이 되었다. 연희 주도층은 관아의 하급 잡역부와 상인 계층이었다. 당시 초파일 공연의 실시와 무계巫系의 핵심적 참여로 산대놀이는 무속・불교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녔다. 따라서 이 당시 양주 별산대놀이는 지역의 세시적 대동놀이로 전승되었다. 2기는 갑오개혁 이후부터 1920년대까지의 시기로, 산대놀이가 민民 중심의 상업적 성격을 지니며 지역 공동체 문화의 중심으로 전승되었다. 상업성이 강화되면서, 지역의 판주와 상인층이 개최를 주도하면서 난장도 형성되었다. 또한 종교적 성격이 약화되고 연희 시기가 다양화되어, 상대적으로 놀이성이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일시적으로 외부 공연이 시도되었지만, 지역에서 벌이는 세시적 대동놀이의 구심체 역할을 여전히 수행했다. 3기는 1930년대 이후의 일제강점기 후반기로, 일제의 억압에 의해 세시적 공연이 중단되고, 마을이 빈한한 농촌으로 바뀌게 되어 전승이 침체되었다. 당시 산대놀이는 일부 주민들의 내적 욕구에 의해 자발적인 신명풀이의 형태로 전승되었다. 4기는 광복 이후부터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이전의 시기로, 복원과 중단이 반복되면서 전승력이 약화되었다. 광복 후에 비세시적인 상업적 공연을 통해 복원하려는 시도는 전쟁으로 타격을 입었으며, 산대놀이는 지역 문화의 구심체에서 마을 단위의 놀이로 축소됨과 동시에 공동체적 성격도 약화되었다. 5기는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이후로, 관의 재정적 지원이 증가하면서 체계적 전승이 이루어지고 외부 공연이 점차 증가한 시기이다. 하지만 관의 영향력 증가와 자체 전승 기반의 약화, 탈지역화 현상으로 말미암아 지역민의 공동체 문화로서 지녔던 위상은 크게 약화되었다. 양주楊州 유양동 지역에서 최소 150년 이상에 걸쳐 양주 별산대놀이가 전승될 수 있었던 배경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양주는 도시로서의 기반을 지닌,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고을이었다. 비교적 큰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초기 연희자들이 도중都中이라는 조합을 설립했다. 도중은 본래 상인들의 조합으로, 이를 통해 상인 세력이 연희의 전승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양주는 일찍이 본산대의 놀이패를 불러 놀이판을 벌일 정도로 물적 기반이 형성된 곳이다. 또한 일찍이 교통이 발달해서 서울에서 함경도 지역으로 나아가는 주요 길목이라는 점도 양주 별산대놀이의 전승에 영향을 미쳤다. 둘째, 양주는 읍치邑治(고을)로서 행정의 중심지였다. 조선 후기에 주내면을 별도로 이곳 읍치 지역에만 2,000여 명의 인구로 이루어진 큰 고을이 형성되었고, 목사 거주의 관아가 있어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따라서 향리 및 관속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었으며, 초기 정착 시기에는 관의 하급 잡역부들이 직접 놀이에 참여하였다. 하급 관속들은 놀이에 참여함으로써 자신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지속시켜 왔으며, 관과 민의 매개 역할을 수행했다. 셋째, 양주는 서울과 근접하여 본산대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애오개・구파발・녹번의 본산대패는 단오가 되면 양주에 찾아와 놀이판을 벌였으며, 양주 주민들은 이들의 놀이를 배워 정착시켰다. 넷째, 이곳은 문화적인 포용성을 지닌 고을로, 관 주도의 양반 문화적인 성격과 더불어 무속적 성격과 민간신앙, 세시놀이를 바탕으로 한 기층 문화가 조화를 이룬 곳이다. 다섯째, 양주 지역 주민의 강한 신명성을 들 수 있다. "양주는 춤에 미쳤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탈춤의 전승에 적극적이었으며, 유일하게 본산대패의 탈놀이를 정착시킨 곳이다. 기능이 출중하고 신명 있는 많은 탈꾼을 계속 배출했으며, 일제강점기 이후 본산대가 약화되면서 양주는 산대놀이의 본고장이 되었다. 한편 무속을 바탕으로 한 소놀이굿이 형성된 것도 이 지역의 신명을 증대하는 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여섯째, 양주는 전통성이 강하여 세시풍속이 활성화되었고, 전통연희가 잘 보존된 곳이다. 양주에서 산대놀이가 연희되는 시기는 다양하다. 양주는 초파일에 국사당제, 단오 성황당제, 3월 4일 산신제・기우제를 지낼 정도로 전통성이 강한 고장이다. 특히 초파일이나 기우제 때에는 산대놀이 탈춤을 추기도 했다. 양주는 현재도 중요 무형문화재인 양주 별산대놀이, 양주 소놀이굿 이외에도 경기도 지정 문화재인 양주 농악, 양주 상여・회다지소리, 양주 향토문화재인 양주 들노래 등이 전승되는 무형문화재의 보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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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금릉빗내농악, 2011년 제52회 한국민속예술축제 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1958년 ‘제 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라는 명칭으로 시작한 한국민속예술제가 올해로 63회를 맞이한다. 아쉽게도 코로나19 여파로 61회,62회 경연은 축소되었지만, 2022년 현장의 생생한 공연이 기대된다. 김천시 개령면 빗내길 118 에는 2003년도부터 전수관을 지어 지금까지 빗내농악 보존과 전승을 위해 오늘까지 오고있다. 빗내농악이 다른 농악과의 큰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농악의 성격을 이야기 할때 크게 3가지로 본다. 1. 농사 기원설 2. 걸립 기원설 3. 군사 기원설 이 중에 빗내농악은 군사악의 정점에 있는 농악이다. 이러한 학술적 배경에서 2019년에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8호에서 국가무형문화재로 승격된 결정적인 이유이다. 가락이 경상도 특유의 빠르고 남성적이며, 판채의 놀음놀이들도 힘차고 빗내의 어른들이 말씀하시길 "군대에서 점호 취하고 적을 둘러싸는 등 군사훈련하는거다."라고 많이 말씀하신다. 타지역과는 차별되게 대북이 장구 앞에서서 양북채를 들고 웅장하게 노는 모습은 흡사 전투할때의 돌격대를 연상케 한다. 특히나 후반부에 나오는 진굿에서는 이러한 군사적인 특징이 격정적으로 나오는데 가세진, 홑진, 접진, 팔자진, 학익진, 대진풀이 같은 용어가 여기에서 나온다. 다가오는 9월 24일 서울 중앙박물관에서 "유네스코등재 기념 위대한 유산, 오늘과 만나다"무대에 출연할 예정이다.(김천금릉빗내농악보존회 권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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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돌아온 2022 파워풀 대구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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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표정의 권원태 줄타기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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