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신문TV 뉴스목록
-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웃다리농악'농악은 농부들이 두레를 짜서 일할 때 치는 음악으로, 꽹과리·징·장구·북과 같은 타악기를 치며 벌이는 음악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다. 굿·매구·풍장·금고·취군 등으로도 불린다.웃다리농악은 충청·경기지역의 농악을 가리킨다. 농악의 과정은 인사굿·돌림벅구·당산벌림·칠채오방감기와 풀기·무동쾌자놀이·소고절굿대놀이·십자걸이·사통백이·원좌우치기·네줄좌우치기·쩍찌기·풍년굿·고사리꺾기·도둑굿·소고판굿놀이·무동꽃받기·개인놀이·뒷풀이·퇴장굿의 순서로 진행된다.웃다리농악은 다른 충청·경기농악들과 구성에 있어서 서로 유사성을 갖는데 이것은 각 농악단의 상쇠들이 1950년에 만들어진 남사당패에 관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칠채가락과 무동타기는 다른 지역과 구분된다.
-
가야금산조와 거문고산조의 명인. 녹야 김윤덕녹야 김윤덕은 1918년 어두운 시대에 태어났지만, 풍류를 익히는 즐거움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3년 정읍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정지선에게 양금정악을 배운 것에서 시작해 가야금정악, 거문고 정악을 배우며 지방 풍류를 두루 익혔다. 1947년 상경한 김윤덕은 다양한 산조를 접하게 되었고 풍류에 대한 그의 열정은 더욱 커졌다. 산조에 대 한 지평을 넓혀가던 그는 정남희의 음악적 깊이와 격조에 큰 인상을 받았는데, 정남희의 산조가 뿌리가 실한 산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가야금산조는 조선 말기 김창조가 시나위음악을 토대로 판소리 음악을 도입해 연주하며 유명해졌는데, 그즈음 한숙구와 박팔괘가 가야금산조를 짜서 연주하였고, 그 이후에 가야금산조 명인들이 탄생해 나름대로 가락을 지어 보유자의 이름을 딴 가야금산조들이 등장했다. 정남희는 가야금산조 1세대인 김창조와 한숙구가 사사한 안기옥에게 가야금산조를 전승받았고, 김윤덕은 자신이 인정한 정남희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웠다. 가야금산조의 기본은 탄탄한 오른손 터치와 왼손 농현, 그리고 성음인데, 각자가 배운 산조가락을 변형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독창적인 연주법을 창안하는 것이 실력 차이를 만들어낸다. 음악적 재질이 매우 뛰어났던 김윤덕은 스승인 정남희의 산조에 새로운 가락을 짜 넣어 ‘김윤덕류 가야금 산조’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의 산조는 이영희, 황병기, 원한기, 이재숙, 김승희 등에게 이어졌다. ‘김윤덕류 가야금산조’는 중중모리와 자진모리장단에서 헤미올라(Hemiola)·신코페이션(Syncopation) 등 장구 장단과 엇갈리어 떨어지는 가락이 3배나 되는 등 복잡하고 다양한 리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담백한 농현의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흐름이 남성적이고 묘법이 뛰어나며 미세한 삼라만상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해 듣는 이로 하여금 깊은 감동을 끌어낸다는 평을 받는다. 김윤덕은 가야금을 반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가야금 병창에도 뛰어났고, 거문고산조 등 다양한 민속 풍류를 아우르는 명인이었다. 당시 민속악인으로 유일하게 자신의 가락을 악보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그는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대한국악원 국극사의 단원으로 활동하였고, 1950년부터 1961년까지 국립국악 원에 출강하며 많은 제자를 배출했으며, 1960년대 이후부터 서울대학교와 국악예술학교 등에 강사로 재직하면서 후진 양성에 애정을 보였다. 그가 제자들을 ‘제자님’이라고 존대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음반 작업도 활발히 했는데, 1960년대에 거문고산조 음반을 취입하였고, 1977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기록 음반에 가야금산조를 취입하였다. 또한 『가야금구음정악보』, 『현금산조보』, 『현금정악보』, 『가야금풍류국문 신보』, 『가야금정악보』 등의 악보를 발간하기도 했다. 김윤덕은 국악기 명인들과 함께 해외공연을 다니며 우리 전통음악을 세계에 알리는 문화 사절단 역할도 톡톡히 했는데, 미국 카네기홀에서는 10회 앙코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지난 4월에 그를 기념하는 기념우표가 발행됐을 만큼 근대 국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문화재청) 녹야는 어려서부터 정자선(양금풍류), 김화동(가야금병창), 김광석(가야금풍류), 김용근(거문고풍류)에게 풍류 음악을 익혔고, 20대 후반부터 정남희, 강태홍에게 가야금산조를 한갑득에게 거문고산조를 전수받았다. 가야금산조와 거문고산조의 명인. 그의 가락은 형식과 구성에 있어 우조, 계면조, 평조의 구분이 확실하고 흐름이 남성적이었으며 단모리 가락의 묘법이 뛰어나고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1968년에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가야금과 거문고 외에도 양금·설장고 등 많은 악기에 고루 능했고 가락을 기록할 때는 한글 문자보다 양악의 오선보를 병용했다.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그의 가락은 형식과 구성에 있어 우조, 계면조, 평조의 구분이 확실하고 그 흐름이 남성적이었으며 단모리 가락의 묘법이 뛰어나고 미세한 삼라만상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했던 것이 특징이었다. 스승의 전통을 이어 받아 '김윤덕류 가야금산조'와 '김윤덕류 거문고산조'를 만들었으며, 1968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저서에 〈현금산조보〉, 〈현금정악보〉, 〈가야금구음정악보〉, 〈가야금풍류국문신보〉, 〈가야금정악보〉 등의 악보가 있다. 녹야 김윤덕 약력 전북 정읍 출생(1918-1978) 1930년 천원공립보통학교를 졸업 1933년 정읍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 정자선(鄭慈善)에게 양금을, 1932년 김광석(金光錫)에게 가야금을, 1933년 김용근(金容根)에게 거문고를 배웠다. 1947년 정남희(鄭南希)에게 가야금산조, 1948년 한갑득(韓甲得)에게 거문고산조 전수받음 1945년 대한국악원 국극사의 단원으로 활동 1950~1961년 국립국악원 국악사 및 국악사양성소 강사 겸직1961년 서울대학, 숙명여고, 서울국악예술학교 재직 일본·멕시코·유럽·미국 등지에서 해외 공연
-
‘진주 교방굿거리춤’ 명인 김수악"그의 구음이면 헛간의 도리깨도 춤춘다" "그 앞에만 갔다 오면 춤이 달라진다" 춘당(春堂) 김수악은 전설적인 영남 제일의 춤꾼이다. 김수악은 1926년 함양군 안의읍에서 만석꾼 집안 장남의 5자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순녀. ‘수악’은 집에 들른 스님이 명이 길어지라고 지어준 이름이다. 큰 언니 김취란은 가야금의 명인이며 황병기의 스승으로 유명한 예인이다. 7살에 진주로 이사한 순녀는 9살부터 진주권번에서 본격적으로 춤, 소리, 악기를 배웠다. 판소리는 유성준·정정렬·이선유·김준섭 등 당대 최고의 명인들에게 다섯 바탕을 사사했다. 구음은 전두영에게 배웠고, 강태홍·김종기·박상근 등에게 가야금과 아쟁도 배웠다. 춤은 김옥민을 시작으로 한성준의 ‘검무’, 최완자의 ‘굿거리춤’ ‘검무’ ‘입춤’을 물려받았다. 26세에 어머니가 되었지만 춤이 더 귀했다. 결혼과 육아로 춤을 접었는데. 1946년 의기 논개의 비석을 세우기 위한 모금공연 ‘대춘향전’ 출연으로 다시 무대에 섰다. 1949년에는 진주에서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예술제 ‘개천예술제’에서 춤과 소리, 연주로 대중을 휘어잡았다. 1960년대 초반 남편 사별후 시골 아낙네로 살던 중 국가의 권유로 '진주 검무' 예능보유자가 된다. 1969년부터 목포 유달국악원, 1971년 광주 호남국악원에서 춤을 가르치고 1973년 진주 민속예술원을 설립했다. ‘강산 제일무’라는 별칭은 1980년대 후반 서울에서 ‘교방굿거리춤’을 추면서 전국으로 퍼졌다. 최완자의 ‘굿거리춤’에 김녹주류의 ‘소고춤’을 이어붙여 만든 김수악만의 브랜드 ‘진주교방굿거리춤’. 97년 경남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고 김수악은 예능보유자가 됐다. "굿거리춤은 발디딤과 손놀림 등 모든 춤의 원동력이라 그것부터 배워야 해요. 교방이라는 이름 때문에 기생춤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마당에서 추는 군무와 달리 실내에 서서 추는 입춤이어서 동작이 아담하고 기교가 뛰어나죠.” S라인의 손목사위도 김수악 굿거리춤의 특징이다. "60년대부터 춤을 가르치는데, 녹음한 곡은 다양하지도 않고 듣기도 민망할 만큼 시원치않았어요. 그렇다고 악사를 쉽게 구할 수도 없고. 호남에는 소리꾼과 악사들이 많은데 영남은 사정이 달랐어요. 결국 제가 장구치고 입으로 소리 내면서 제자들을 가르쳤지요. 다양한 악기 소리를 내려니 악기 특성별로 소리도 달리 내야 했어요. 어릴 때 판소리 다섯바탕을 남선생에게 배우면서 호방한 동편제를 익혔기 때문인지, 장조와 단조의 구음을 자유롭게 구사했지요.” 전국에서 공연되는 굿거리춤에는 녹음된 김수악의 구음이 단연 최고다. 병상에서 제자들에게 강조한다. "무겁게 추되 발디딤을 살랑살랑하면서 속은 깊으게. 몸에 알뜰한 멋이 들어야만 알뜰한 예술이 나와!” 김수악 약력 1926년 5자매 중 둘째로 출생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12호 진주검무 기능보유자 지정1969년 목포 유달국악원 지도교수1971년 광주호남국악원 지도교수1973년 김수악민속예술학원장1975년 경성대 기악강사1977년 진주시립국악원 전임지도교수1983년 한국국악협회 경남지회 진주시 지부장1986년 진주시립국악학교 지도교수1997년 경남무형문화재 제 21호 진주교방굿거리춤 기능보유자 지정 수상 경상남도문화상, 경남진주시문화상, 대한민국사회교육문화상 금상
-
'동래한량춤'의 명무, 김진홍"춤은 칼과 같아서 하루만 안 갈아도 녹이 스는거여."(이매방) 김진홍이 평생 등에 비수처럼 꼽고 살았던 좌우명이다.30대 한창 젊을 때 진주살풀이와 진주교방굿거리, 진주검무로 명무가를 일궜던 김수악 명인에게서도 예술의 경지가 어디까지인지 깨닫게 된다. "자네는 음악과 춤이 무엇인지 아는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절이 인생의 희로애락이어서 그것이 바로 춤이라네."(김수악) 스승의 물음에 딱히 답을 못했던 기억이 선하다. 스승의 선문답 같은 화두를 지금도 놓치지 않았다.1976년(42세) 부산민속예술보존회에 입회하여 만난 김석출(동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의 사촌동생 김계향은 또 다른 춤의 세계를 열어준다. 당시 동래학춤의 입장단(구음)을 하던 김계향에게서 굿공부를 하면서 지전춤, 반야용선춤, 꽃맞이춤 등 춤의 뿌리가 되는 굿춤(무무)을 배웠다. 잠깐 경기 재인청 재인(才人) 이동안으로부터도 태평무와 진쇠춤도 배웠다.1983년 49세 때 제9회 전주대사습에서 승무로 무용부문 장원을 한다. "춤이라 하는 것은 테크닉을 많이 넣으면 춤추는 사람한테 여유가 없어지는 거라예. 테크닉 많이 넣고 잔가락 많이 넣고 추는 춤은 그냥 춤일 뿐이지예. 빨리 많이 추는 것보다 시간이 걸리드래도 한 동작 바르게 추는 춤은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합니더."춤은 끝까지 감상하고 난 뒤에도 여운이 남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
경기민요 가인, 이은주 명창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고 이은주 명창(2020년 11월 2일, 향년 98세 졸)은 안비취 묵계월 명창과 함께 ‘경기민요 여성 3인방’으로 불렸다. 14세에 원경태 명창으로부터 시조, 가사, 잡가를 배웠다. 1939년 인천에서 열린 명창대회에서 평안도 민요 ‘수심가’로 1등을 했다. 6·25전쟁 때 민요 ‘태평가’를 복원해 불러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1975년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보유자로 지정됐다. 유성기 음반 80여 장, LP 300여 장을 발표했다. 77세에 경기 12잡가 전곡을 녹음했고 팔순이 넘어서도 꾸준히 무대에 올랐다.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그 뒤를 김금숙, 김장순 제자 등이 전승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
'k-국악' 애호가, 풍물과 탈춤을 배우는 카리사
-
전설의 명창으로 불리는 김옥심전설적인 비운의 명창으로 불리는 김옥심(1925~1988)은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주수봉으로부터 잡가·시조·가사를 배웠으며, 조선권번 선배인 이진홍에게서 잡잡가를, 김영윤에게서 양금을 배웠다. 옥구슬 굴러가는 타고난 목소리로 민요계를 평정하며 ‘제1회 전국국악경연대회’ 성악부 1위, ‘제1회 세종대왕 국악상’ 경서도창 1위 등을 차지했으며, 1968년 안비취·묵계월·이은주와 함께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인간문화재 후보로 올랐으나, 최종 선정 과정에서 돌연 탈락했다. 이후 후진 양성에 힘써 남혜숙·유명순을 비롯, 최영숙(현 서울시 인간문화재)·이금미·한진자·김광숙(현 서도소리 인간문화재) 등을 배출했다.
-
월하 이전 월하 없고 월하 이후 월하 있을까김덕순은 "월하 이전 월하 없고, 월하 이후 월하 있을까”라는 찬사가 따라붙는 여성가객이다. 한국전쟁 피난시절 노인들의 시조소리에 매료돼 홀로 소리를 새기다가 주변의 권유로 시조로 입문했다. 낭랑한 목소리를 타고 났으며 발음이 정확하다. 남녀병창으로 부르는 가곡 태평가를 들어보면 힘과 무게가 있어 남성가객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1936년서울 묘동교회 부설 묘동학원 야간부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6·25전쟁 중 부산에서 이병성에게 시조를 배웠고, 1958년도부터는 이주환에게 가곡을 배웠다. 임석윤, 정운산, 이창배에게도 각각 시조 및 시창 등을 배웠다. 1968년도부터 국립국악고등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장학 육성 사업에도 관심을 보였고, 1969년 국악협회 시조분과위원장을 거쳤고, 1970년에는 전국시우단체총연합회(全國詩友團體總聯合會)를 발족시켰다.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여창가곡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74년부터 1981년까지 국립국악원 연주원을 역임하였으며 1991년에는 재단법인 월하문화재단을 설립하였다. 그밖에 대학에서 후진들을 가르쳤고, 각종 공연 및 강연 등의 활발한 활동을 통하여 여창가곡과 시조의 진수를 알렸다. 음반으로는, 1976년 '김월하 시조집', 1986년 '한국의 전통가곡'(국립국악원) 등에 그녀의 여창가곡, 가사 및 시조가 실려 있다. 국악계에 기여한 공로로, 1984년 국악대상과 세종문화대상, 1988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2년 국민훈장 보관장, 1994년 자랑스런 서울시민상 및 1995년 KBS 국악대상 특별공로상을 각각 수상하였다.
-
서도소리, 배뱅이굿 이어가는 박준영 명창"왔구나 왔소이다 왔소이다 불쌍이 죽어 황천갔던 배뱅이 혼신 평양사는 박수무당의 몸을 빌고 입을 빌어 오날에 왔소이다 우리 오마니 어디갔나요 오마니 오마니- 살아생전 같으면 내가 어디를 갔다가 온다고 하면은 우리 오마니가 나를 보고 동지섣달 꽃 본 듯이 어둔밤에 불 본 듯이 화닥닥 뛰어서 나오련 만은 죽어 지고서 길 갈라서니 쓸 곳이 없구려 오면 온 줄 알며 가면 간 줄 아나 오마니 흑흑흑흑” "박준영이 부르는 배뱅이굿은 이은관의 배뱅이굿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박준영의 소리와 색깔을 내라.”고 하신 말씀을 평생 가슴에 담아왔다. 오는 14일부터 이은관 명인의 제자 박준영과 유상호 명창과 함께 국립국악원에서 '일이관지-성악' 무대에서 귀한 남성 창이 선보이는 서도소리 공연을 한다. 박준영 명창의 '배뱅이굿과 서도소리' 음반(2011년 발매)을 듣고 있으면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배뱅이굿"을 능청스럽게, 어떤 대목은 가슴이 터지도록 시원하고 구성지게 담겨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배뱅이굿' 예능보유자 이은관 명인의 제자이며 전수조교인 박준영 명창은 배뱅이굿 전 과정을 한 장의 앨범에 수록하였고 또 다른 한 장에는 서도소리의 중요한 곡들을 수록하여 신나라에서 음반이 발매했다. 서도소리의 가장 대표적인 수심가, 초한가등 주요좌창과 긴 난봉가에서 사설난봉가 연평도난봉가 등 잘 알려진 서도소리로 널리 알려진 곡들을 구성지게 잘 부른다. 14일 박준영의 서도소리가 기대가 된다.
-
불타는 미래의 지구…동물·식물·인간 선택연극 '너의 왼손이 나의 왼손과 그의 왼손을 잡을 때'는 40일간 이어진 화재로 전 세계가 불타고 있는 미래의 지구가 배경이다. 동물과 식물, 인간 종(種)을 대피시키기 위해 8대의 배가 출항하지만, 모든 종자가 탈 수 없기에 생존을 위한 경기가 치러진다.
-
10일부터 제12회 이북5도 무형문화재 축제,..평북농요. 향두계놀이 등이북5도 무형문화재연합회가 주관하고 국립무형유산원과 행정안전부·이북5도위원회가 후원한다. 제12회 이북5도 무형문화재 축제가 오는 10일과 11일 오후 2시 강원도 속초시 엑스포 잔디광장에서 개최된다. 올해 12회를 맞이하는 이번 축제는 이북5도위원회 소속 무형문화재 보존단체 20종목 (만구대탁굿, 산염불, 놀량사거리, 화관무, 최영장군당굿, 배뱅이굿, 대동굿, 향두계놀이, 평양검무, 평남수건춤, 김백봉부채춤, 평안도배뱅이굿, 두만강뗏목놀이소리, 돈돌날이, 평안도다리굿, 영변성황대제, 평북농요, 애원성, 함북선녀춤, 퉁소신아우)이 모두 참여하는 무대로 속초시를 대표하는 제8회 실향민 문화축제와 어우러져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을 관객에게 선보이게 될 것이다. 속초시, 속초문화관광재단과의 협력으로 이북5도무형문화재연합회는 2023 이북5도 무형문화재 축제의 공동 개최를 추진한다. 이북5도무형문화재연합회 이사장 차지언(황해도 무형문화재 화관무 예능보유자)은 "이번 축제를 통해 이북5도 무형문화재의 예술적 가치를 널리 알리고 보존·계승의 의미를 되새기는 자리가 되길 바라며,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의 마음을 달래고 나아가 국민의 염원인 통일을 기원하는 축제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전했다. ‘2012년 이북5도 무형유산의 보존과 전승을 위해 문화재청·국립무형유산원, 행정안전부, 이북5도위원회의 후원으로 시작된 이북5도 무형문화재 축제는 2023년 제12회를 맞이한다. 이번 속초시민과 함께하는 이북5도 무형문화재 축제는 민족의 분단과 아픔의 역사를 뒤로하고 이북지역 무형유산의 계승에 전념한 이북5도 무형문화재의 상징적 의미를 관객과 공감하며 감동으로 함께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
대한이의 3번째 맞는 현충일
-
제20회 부산국제연극제 개막작 '한여름밤의 꿈' 공연 장면
-
"사람이 제일 귀하다”는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사람이 제일 귀하다”인내천(人乃天) 사상이 핵심인 동학농민혁명은 탐관오리와 외세 앞에서 조선 백성은 전봉준과 함께 과감히 들고 일어났다. 1894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도화선이 되어 전봉준의 지휘로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보국안민과 폐정개혁을 기치로 일어난 농민 봉기이다. 전봉준은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 관아에서 매질을 당하다가 목숨을 잃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으로 안해 사회변혁을 꿈꾸었다. 1차 농민전쟁은 전라도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농민군은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물러났다. 2차 농민전쟁은 전라도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된다. 당시 동학군들이 불러서 전국으로 확산된 노래는 '새야 새야 파랑새~"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청포장수 울고 간다새야 새야 파랑새야우리 논에 앉지 마라새야 새야 파랑새야우리 밭에 앉지 마라 파랑새는 일본군과 청나라 군사 그리고 관군을 의미한다. 녹두는 동학 농민군이고 청포장수는 백성을 의미한다.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만민 평등세상을 추구했던 민중항쟁의 노래다. '척양척왜'를 주장하며 싸웠으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에 의해 공주 우금치에서 패배했다. 동학 농민군은 신식 무기를 갖춘 청군과 왜군 앞에 힘없이 무너지고 만다. 동학농민군은 비록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그 사상과 저항운동은 의병정신에 이어지고 있다. 다음달은 보훈의 달이다. 그리고 내일은 6월 1일 의병의 날이다. "농민으로부터 시작한 개혁이 나라의 힘이다!" 이러한 동학농민혁명의 기록물들이 지난 5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6차 유네스코 집행이사회에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포고문은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귀하다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로 시작해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죽고 살기를 맹세한다"로 이어진다. 당시 포고문은 고부 농민봉기 이후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혁명 지도부가 무장현(현재 고창군 공음면)에서 전국적인 농민봉기를 선언하면서 발표했다.
-
국악신문사 김호규 사장이 만난 사람들
-
23일 국립국악원 '일지관지'최연소 관객
-
한국농악판 최고의 명인,김병섭김병섭 선생은 장고 하나로 한국농악판에서 최고의 기량을 인정받았던 명인이다. 1921년 정읍시 북면에서 태어나 김학순에게 설장고를 배워 우리나라 최고의 설장고 명인으로 올라섰던 김병섭은 어려운 형편 때문에 운명적으로 농악과 만나게 됐다. 김병섭은 자신의 나이 열 한 살 때 자신의 형이 수리조합에서 돈을 빌어서 농악기를 장만하면서 농악을 접하게 된다. 당시 최고의 명성을 날렸던 김학순을 스승으로 사흘 만에 기본가락을 배울 만큼 김병섭은 타고난 재능을 보였다. 김병섭은 사흘 만에 기본가락을 웬만큼 터득할 만큼 배우는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김학순 씨도 김병섭의 타고난 재주에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나흘 만에 작파(作破)할 수밖에 없었다. 손자가 장고를 배운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할아버지의 호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김병섭은 몰래 숨어서 사흘 동안 배운 가락을 혼자서 연습을 해야만 했다. 대동아 전쟁 때 일본인에 의해 싱가포르 함락 기념축제에서 장고잽이로 나서기도 했던 김병섭은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 징용에 끌려 나가 아오지 탄광에서 스물다섯 살 때에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마을마다 농악을 다시 쳤고 서울에서는 농악경연대회도 열렸다. 특히 일본군은 당시 정읍농악단의 명성을 알고 기념축제를 하라고 악기를 내주기까지 했다. 1956년 전국농악대회에서 정읍농악으로 개인상을 수상하며 중앙무대에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기 시작한 김병섭은 1963년과 1964년에 개최된 제4회와 제5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서 정읍우도농악이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하며, 1956년에 이어 1964년 서울에서 열린 제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설장고로 개인상을 수상해 명인 반열에 오르게 된다. 김병섭은 정읍을 벗어나서 1968년부터 서울 생활을 시작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김병섭을 서울로 불러들인 사림이 바로 한국인이 아닌 평화봉사단원로 활약했던 미국인이라는 사실이다. 이 미국인은 김병섭의 장고솜씨를 보고 그에게 매달려 서울로 불러들였다고 한다. 그때 김병섭은 식구들을 고향에 둔 채로 올라와 서울 안국동에서 미국인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미국인과 동료들에게 장고를 가르쳤다. 서울로 올라온 후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던 김병섭은 그의 명성에 걸맞게 한양대와 서울예고, 선호예고 등에 나가 후학들을 지도하며 동암동에 있던 김병섭 농악연습소에서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한다. 그의 가락은 전라우도 농악 즉 정읍농악의 진수를 가장 잘 표현하는 명인으로 추앙 받을 만큼 튼튼했다. 혼자서 할 때는 설장고와 둘이 할 때는 쌍장고라 하는데, 그의 장고잽이놀이는 느린굿거리, 활발한 동살풀이, 구성진 구정놀이, 흥겨운 덩덕궁이, 격렬한 다르래기로 가락을 달고 맺고 풀면서 몰아간다. 김병섭은 한국 농악사에서 장고잽이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은 전통문화유산에 밑거름이 된다. 특히 그의 장기였던 고깔 설장고는 우도농악의 최고로 꼽히는 김도삼의 제자 김학순, 백남길에게서 배운 정확한 계보를 갖고 있어서, 설장고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해온 명인 김병섭, 당시 젊은 세 사람 이정범, 전사섭, 그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향토적인 가락을 발전 시켰으나 그 내용과 형식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김병섭은 자신만의 독특한 가락을 근저로 정읍농악우도농악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산파(産婆)역할을 했다. 김학순으로 이어졌던 설장고를 이정범이 이어받았고, 또다시 김병섭이 이정범의 전통을 이어냄으로써 정읍우도농악 설장고의 전승구조를 이어내는 가교 역할을 하게 한 인물이 설장고 명인 김병섭이다. 특히 김병섭은 설장고를 체계화하는데 큰 힘을 경주 한 것으로 확인된다. 김병섭의 장고가락을 악보로 만들기 위해 음악을 전공한 외국인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학구적인 쪽으로 관심을 갖게 되어 농악을 정립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돈암동, 동대문, 종로5가 등 여러 곳으로 농악연구소를 이전하면서 장고교습에 심혈을 기울였다. 1987년 김병섭은 떠났지만, 김병섭의 고깔 설장고는 우도농악의 최고로 꼽는 김도삼 제자 김학순, 백남길에게서 배운 뚜렷한 계보를 갖고서, 설장고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해 온 명인으로서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살아남고 있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던 전설적인 김병섭의 설장고가 그립다.
-
어제 국립국악원 분장실에서 장문희 명인의 찰나오늘 판소리 명창 이날치의 증손녀이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보유자인 이일주 명창(1936~)의 제자인 송재영, 장문희 명창의 23일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춘향가' 무대가 기대된다. 분장실에서 장문희 명창과 가족을 살짝 만났다. 판소리의 디바, 장문희 명창은 2004년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 장원, 대통령상을 역대 최연소 (만 27세)로 수상했다. 당시 스물여덟의 소리꾼 장문희(당시 전북도립창극단원) 명창은 중.장년층들이 주로 출전하는 이 대회에서 20대 나이로 참가, 심사위원 7명 전원으로부터 만점(99점)을 획득하며 장원을 차지했다. 이는 전주대사습놀이 사상 최연소, 최고점수 기록으로, 조통달 안숙선 명창 등 심사위원들로부터 '100년에 한번씩 나올 소리꾼' '금년 대사습이 낳은 대어'라는 찬사를 받으며 판소리계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난석 이일주(본명 이옥희)로부터 동초제 소리를 6세부터 사사받았으며, 조선 후기 8대 명창 중 하나인 이날치의 후손이다. 아호는 사백(詞伯)이다.
-
김묘선 명인의 '승무' 춤사위."승무는 우리 전통춤의 가장 기본적인 춤이자 모든 춤사위를 담고 있습니다. 승무를 모르면 한국춤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죠. 장단의 변화가 다 담겨있어요. 그럼에도 어렵지 않습니다. 호흡부터 배우면 누구나 쉽게 터득할 수 있습니다.” 평생을 춤과 함께 살아온 김묘선 명인의 승무 예찬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전승교육사 김묘선 명인이 미국에서 한국 전통예술 알리기에 앞장서며 국내외에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20년 코로나가 전 세계를 멈추게 했지만 일본과 미국 전수소에 모인 교육생들을 놓고 비대면으로 강습을 진행해서 주위를 놀라게 했다. 올해 연초부터 ‘워싱턴 김묘선 전수소’에서 제자들과 승무 이수교육 기간 동안 워싱턴 미주한인재단이 버지니아 페어팩스고등학교에서 연 ‘미주 이민 120주년 기념행사’와 ‘제18회 한인의 날 기념 축전’에서 공연도 수행했다.미국에는 5곳의 김묘선 전수소가 있다. 워싱턴, 휴스턴, 뉴저지, LA, 오스틴에 이른다. 일찍이 ‘한국춤의 세계화’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로 2008년부터 미국에서 공연과 워크숍을 이어왔다. 내면의 열정이 뜨거운 불처럼 타오르는 불새. 김 묘 선!
-
외국인 가족 사로잡은 연등회 전통놀이판
많이본뉴스
많이 본 뉴스
- 1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93)<br>강원도아리랑
- 2‘2024 광무대 전통상설공연’
- 3국립남도국악원, 불교 의례의 극치 '영산재', 특별공연
- 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5)<br>한국 최초 '도깨비 학회', 아·태 도깨비 초대하다
- 5춘향국악대전 판소리 명창부 대상에 이소영씨
- 6국립민속국악원, '제6회 2024 판놀음 별별창극'
- 7서울문화재단, 클래식부터 재즈까지 '서울스테이지 2024' 5월 공연
- 8이무성 화백의 춤새(91)<br> 춤꾼 한지윤의 '전통굿거리춤' 춤사위
- 9제3회 대구풍물큰잔치 ,19일 디아크문화관광장
- 10국립극장 마당놀이 10주년…“새로운 얼굴 찾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