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신문TV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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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국악제 대통령상 수상한 서한우 명무의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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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연등회 주인공은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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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밝히는 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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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금강사, '화전놀이아리랑'으로 첫 막을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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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의 마지막 무동(舞童)' 김천흥 명인심소 김천흥(1909~2007)은 평생을 전통예술의 전승과 복원이라는 일념으로 살았던 예술인이었다. 심소 김천흥 선생은 14세가 되던 1922년, 이왕직아악부 양성소 2기생으로 입소했다. 이후 1923년 순종황제의 오순(五旬) 기념 진연에 참가해 12개 종목의 궁중무용을 전수 받아 '조선의 마지막 무동'으로 불렸다. 2007년 99세로 영면하기 직전까지 국립국악원 원로사범, 중요무형문화재 종묘제례악과 처용무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했다.또한 심소 선생은 1970년대 말부터 궁중무용 재현의 사명감과 애정을 가지고 연구, 33종의 궁중무용을 재현했다. 현재까지 문헌에 의해 전해지는 궁중무용은 총 57종으로 이중 45종의 궁중무용이 심소 선생에 의해 재현, 전승됐다. 악가무(樂歌舞)에 능했던 김천흥 보유자는 1950년대후반에 전국 각지를 돌며 전통춤과 연희를 발굴하였고,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해 여러 편의 조사보고서를 남겼다. 또한 이왕직 아악부의 후신으로 국립국악원이 개원하자 궁중무용의 맥락을 잇기 위해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시절에 익힌 춤과 옛문헌에 의거한 ‘봉래의‘. ‘보상무’, ‘박접무‘, ‘무신향’ 등 40여종의 궁중무용을 복원하였다. 이 자료들은 예술사적 성과를 넘어 한국 근현대예술사의 발전과정을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소중한 보고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기록원으로부터 국가지정기록물로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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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회 밀양아리랑대축제 무형문화유산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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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된 탈놀이, '고성오광대'오광대는 남부지역(낙동강 서쪽지역)의 탈춤을 가리키는 말로 초례 밤마리 마을 장터에서 놀던 광대패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광대’란 다섯 광대 또는 다섯 마당으로 이루어진 놀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도 하고, 오행설에서 유래된 오(五)에서 온 것이라고도 하는데, 오행설의 의견이 유력하다. 고성오광대는 제1과장 문둥북춤마당, 제2과장 오광대마당, 제3과장 비비마당, 제4과장 승무마당, 제5과장 제밀주마당 등 5개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등장인물은 문둥이, 말뚝이, 원양반, 종가도령, 비비, 중, 각시, 영감, 제밀주 마당쇠 등 19명이 등장한다. 양반과 파계승에 대한 풍자, 그리고 처와 첩의 문제 등 서민의 삶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고성오광대는 다른 지역의 오광대에 비해 놀이의 앞뒤에 오방신장춤, 사자춤 같은 귀신 쫓는 의식춤이 없다. 주된 춤사위는 덧뵈기(탈놀이)춤이고, 반주음악으로는 꽹과리, 징, 장구, 북 등의 타악기가 사용된다.현재 사용하는 탈은 문둥이·말뚝이·원양반·청제양반·적제양반·백제양반·흑제양반·홍백양반·종가도령·비비·비비양반·중·각시·영감·할미·제밀주·마당쇠 등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쓰고, 봉사·상주·상두꾼은 탈을 쓰지 않는다. 현재 사용하는 나무로 만든 탈은 마분지로 만든 것보다 사실적으로 변모하였다. 춤의 반주음악으로는 주로 굿거리장단이 쓰이고, 반주악기는 원래 피리·젓대·해금·가야금·거문고·장구·북·꽹과리 등이었다고 하나 근년에는 꽹과리·징·장구·북 등 농악기를 사용하고 있다. 춤은 ‘덧베기춤’이라고 부르는데, 배역에 따라서 그 인물의 성격이 춤으로 표현되어 종류가 나눠진다. 즉, 말뚝이 춤은 동작이 크고 도약이 심하고 베김새가 힘찬 건무(健舞)이고, 양반춤은 유연한 춤사위를 보인다. 문둥이춤은 문둥이가 파리 잡아먹는 모습 등 그 생태를 익살스럽게 표현한다. 제밀주와 소무의 춤은 남성이 추지만 맵시를 부리는 여성무를 추고, 할미춤은 팔을 크게 벌리고 엉덩이를 심하게 흔들며 외설적인 동작으로 익살스럽게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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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보경 명인의 '밀양북춤'하보경 (1906-1997) "하보경 옹의 북춤은 달관의 춤이다. 칠십 평생의 체험을 가락에 담아 멋으로 승화시킨 춤이다. 노을에 선명히 모습을 드러내는 산의 능선, 금물결로 반짝거리는 강물의 흐름을 춤사위에 담고 있다. 그래서 즉흥적으로 추는 춤이긴 하나 가볍지 않고 산이 일어나 모처럼의 흥을 보여 주는 것 같은 품위를 느끼게 한다.…… 북을 매고 덩실덩실 춤추며 사뿐히 맴도는 춤사위는 마치 신선의 모습처럼 우아하다.…… 칠순 노인이 흰 수염을 휘날리며 북을 들고 춤추는 모습은 입신(入神)의 경지에서만 보일 수 있는 절제와 단아함과 흥이 흐른다. 허 옹의 춤사위는 그만의 멋들인 엇가락의 춤사위에 달관의 미를 보여주고 있다."(김미숙, "하보경의 생애와 춤예술 세계")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밀양백중놀이'에서 '밀양북춤'이 연희되고 있다. 농경시대 무형식의 북춤이 밀양 백중놀이에 유입되고 하보경에 의해 향토색 짙은 민속놀이로 정립되었다. 밀양북춤에는 정중동의 미, 신명의 미, 조화의 미 등의 다양한 미적 특성이 드러나는데, 특히 춤사위, 공간, 장단, 호흡의 대립적 특성들이 부딪치지 않고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조화의 미'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어느새 북소리와 춤사위가 하나가 되어 공간과 관객의 마음을 훔쳐간다. 다시 한번 보고 싶은 하보경의 춤사위와 그 허허한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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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시도무형문화재 '동래학춤'동래는 예로부터 황새가 많아 주민들이 황새의 모습을 관찰하여 학의 청초함과 우아한 몸짓 등을 소박한 민속의 율동에 담은 춤이다. 민속무용 중 조류(鳥類)의 동태가 율동화된 유일한 춤으로, 궁중무용 중 학무(鶴舞)에 비해 민속적 특징이 두드러진다. 꽹과리 ·징 ·장구 ·북 등 타악기가 중심이 되고, 굿거리장단으로 반주한다. 부산 동래지방에서 추어지는 학의 동작을 표현한 춤. 동래학춤에 관한 문헌은 전혀 찾을 수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동래의 서남편(연산리)에는 광대한 무딩기땅과 그 안에 큰 대조석(大鳥石)이 있어 많은 황새가 떼를 지어 서식하였다. 따라서, 주민들은 황새의 관찰을 통하여 학의 몸짓을 연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무딩기땅에 가까운 마을을 황새알부락이라 불러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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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재인청의 맥을 이은 조선의 마지막 춤꾼, 이동안 명인운학(雲鶴) 이동안(1906~1995)은 경기도 화성이 낳은 재인청의 춤꾼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예인이다.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고 전통문화의 기틀을 세우는데 기여했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화성 재인청의 최고 자리인 도대방에 올랐던 그는 광무대(光武薹)에서 공연 생활을 하게 되면서 경기재인청 출신인 춤과 장단의 명인 김인호, 줄타기의 명인 김관보, 발탈과 재담의 명인 박춘재, 남도소리의 명인 조진영, 대금 피리 해금의 명인 장점보, 태평소의 명인 방태진 등으로부터 각종 기예를 익혔다. 당대 최고의 명인들로부터 배운 기예는 이후 이동안이 경기재인청 춤의 전승자로, 줄타기 명인, 발탈 보유자로서 탁월한 예능인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화성재인청이 1922년 폐지되면서 이동안 선생은 마지막 도대방으로 기록된다. 이동안의 가계는 대대로 무업(巫業)을 주업으로 하던 경기재인청의 재인(才人)들이었다. 이동안은 1906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 137번지에서 아버지 이재학과 어머니 해주 오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해금 전문가, 조부 이하실은 단가와 피리의 명인이었다. 작은 할아버지 이창실은 줄타기 명인으로, 친가와 외가 모두 최고의 재인들이라 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재인의 피를 물려받고 민속예술의 환경에서 자라났다. 재인청춤전승보존회 정주미 회장은 "한성준이 승무의 한영숙과 태평무의 강선영이라는 인간문화재 제자를 배출하면서 문화예술계의 주목과 인정을 받는 반면, 전통춤의 원형을 간직한 재인청 춤의 대가인 이동안은 무형문화재 중심으로 춤이 주목받고 평가되는 세태 속에서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춤이 아닌 발탈로 보유자가 된 이동안이 "내가 안하면 끊긴다고 해서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지만 사실 나는 춤꾼이지 발탈 재주꾼은 아니다”라고 한탄했다. 이동안에 대한 올바른 재평가는 그가 태어난 화성시에서부터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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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판 '백중놀이'의 초창기 모습, 병신춤기회송림에서 촬영된 밀양백중놀이 1982년판 백중놀이의 초창기 모습이 그대로 담긴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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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백중놀이(오북춤)' 의 대가 김상용김상용 옹(金尙龍,1916~2004)은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935년부터 밀양보본계 원으로 활동하였다. 1970년에 밀양국악협회 부 회장이 되었고, 1980년 밀양민속예술보존협회 창립회원의 한 사람으로 부회장을 거쳐 1982년 에 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1986년에는 밀양백중 놀이 보유단체가 인정되면서 밀양백중놀이보존 회의 회장이 되었다. 1982년에 전수교육을 위한 악사로 선정되었고 1986년에 이수조치 되었으며 1987년에 오북춤과 농요 로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83년에는 경남 무형문화재 제7호 감내게줄당기기의 동부줄도감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되기도 하였 다. 1977년에 경남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병신춤으로 개인상을 수상하였 고, 1981년에는 개천예술제 민요경창부문 특별상을 수상하였으며, 1986 년에는 마산시민의 날 민요·판소리 경창대회에서 입상하였다. 1935. 01 ~ 밀양백중놀이보존회 전신인 ‘밀양보본계’ 회원으로서 故 하보경 선생께 '병신춤' 등 '밀양백중놀이' 전수1970.01.01 한국국악협회 밀양시지부 지부장(17대) 역임1981.10. 01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 전수교육조교 선정1987.07. 01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 보유자(오북춤)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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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정오 조계사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관불의식 입재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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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과 고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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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승 삭발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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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춤'과 '화관무' 창시자 김백봉'부채춤'과 '화관무' 창시자로 한국 무용계를 이끌었던 김백봉 원로 무용가가 97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한 평생 춤과 함께 해온 고인은 근·현대 한국무용 역사의 산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인은 '화관무', '부채춤', '산조', 만다라', 무용극 '심청', '춘향전' 등 평생 600여 편이 넘는 창작춤을 만들며 한국 신무용의 형태와 기틀을 다졌다.1927년 평양에서 출생한 고인은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수제자이자 동서였다. 고인은 13세 때 아버지 손을 잡고 최승희의 공연을 본 후 감동해 최승희의 제자 되기를 간청했다. 14살에 홀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최승희무용연구소’ 문하생이 된 그는 1942년 도쿄에서 첫 공연을 했다. 해방 후 최승희와 함께 고향인 북으로 가 평양에 정착, 최승희무용단 제1무용수 겸 상임안무가로 활동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남편과 함께 월남한 뒤 1953년 서울에 '김백봉무용연구소'를 설립했다. 남편 안제승(1922~1998)은 최승희 남편의 동생이다. 이후 고인은 1954년 신무용 계열의 창작춤인 부채춤을 처음 발표했으며,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부채춤을 처음으로 선보여 전 세계에 한국 춤의 미를 알렸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는 2000명의 무용수가 참여한 대형 군무 ‘화관무’를 선보이기도 했다. 고인은 1965년부터 1992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경희대학교 무용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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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농악 상쇠 라모녀(羅摸女)부안농악 예능보유자 라모녀(羅模女, 1941~2018)는 1941년 전남 강진에서 출생하여 7세에 광주로 이사하여 대성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임춘앵 창극단 공연을 보고 반해 버린 그녀는 17세 때 집을 떠나 남원국악원에서 판소리를 배우고 농악에 입문하였다. 남원에서 꽹과리에 능한 50대의 김제옥(작고, 전남출신)에게 자질을 인정받아 쇠가락을 배웠고, 21세 때까지 남원여성농악단과 춘향여성농악단에 소속하여 전국 공연을 다녔다. 21세에 전주로 시집을 왔다. 1961년에는 전주 사는 장금동(張錦東)과 결혼하면서 생활근거지를 전주로 옮겼다. 그리고 김동준(金東俊)에게 심청가를, 홍정탁(洪正鐸)에게 수궁가를 사사받았으며 다시 아리랑여성농악단 상쇠로 활동했다. 25세 때는 아리랑여성농악단의 상쇠로 활동했고 38세까지 이순태, 장금동, 이방근 등이 운영하는 전주여성농악단과 이수복이 이끄는 호남여성농악단, 권일상이 만든 정읍여성농악단 및 이정법이 창단한 한미여성농악단에서 상쇠를 담당했다. 부안농악의 쇠가락에는 삼채, 굿거리, 두마치, 오채질가락, 오방진가락, 호호굿가락, 도둑잡이가락 및 개인놀이가락이 있다. '상쇠' 예능보유자 라모녀 선생의 쇠가락과 부포놀이를 바탕으로 한 상쇠춤은 짜임새가 다양하고 기교가 넘쳐 달관한 경지를 보이며, 부안농악가락은 호남우도농악 가운데서도 잽이들이 기준 장단 안에서 제각기 기량을 발휘하기 때문에 더욱 섬세하고 멋스러운 농악이라는 평을 듣는다. 1987년 12월 31일에는 부안농악이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면서, 라모녀는 부안농악단의 상쇠로 활동했기 때문에 ‘부안농악 상쇠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2001년까지 전북도립국악원 교수로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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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북놀이' 의 명인 이희춘이희춘 1960년 진도출생 전라남도지사상 표창 문화예술부문 (2001) 한국예술문화대상 (풍물지도자 부문) (2001) 진도군립민속예술단 연출단장.예술감독 역임 (2010) 제58회 전라남도 문화상 수상 (2014) 전남 무형문화재 제18호 '진도북놀이' 예능보유자 (2015) (사)한국국악협회 한국국악대상 수상 (2019) (사)한국국악협회 진도군 지부 지부장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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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얏고의 대가 황병기황병기(黃秉冀,1936.5.31. ~ 2018.1.31.)는 고교 시절 전국 국악 콩쿠르에서 수상하면서 가야금에 두각을 나타냈던 황병기 선생. 그는 1959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대 음악대학 강의, 정악과 산조를 함께 공부한 그는 1952~59년 국악원에서 가야금을 연구하였다. 1961년 한국 최초로 서양 오케스트라와 가야금을 협주, 1965년 하와이 '20세기 음악 예술제'에서 연주하였으며 미국 주요 도시에서 가야금 독주회를 가졌다. 1962년 현대 가야금 곡인 '숲'을 발표했다. 1974년부터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에만 매달렸던 황병기 선생은 현대 국악을 개척하면서 민족적 경계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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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창간자 김호규일시 : 2020.12.21 장소 : 풍류극장 김호규선생의 부친은 김병섭 설장고 명인이다. 김호규선생은 국악신문 창시자로서 나름대로 비제도권에서 국악발전에 힘을 쓰신 분이다. (천승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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