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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6)<br> 이희문·송가인·이날치밴드 공연, 신명나는 민요 현장민요의 현장 논밭에서 일하면서 부르던 노동요 그 현장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희문, 또 여타 실험들에서 민요가 면면히 살아 있을을 확인한다 굿판·노동판·유희판 배경이 달라지고 노래의 양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경기소리는 이희문에게 보존해야 할, 혹은 발전시켜야 할 그 무엇으로서 가창자에게 의무와 당위를 부과하는 억압 기제로 작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통 성악의 음악적 텍스트는 '만들어진 전통'이 빚어낸 페르소나(persona)를 벗고, 원형으로서의 경기소리와 그 텍스트가 꽃핀 문화와 물적 토대, 환경으로부터 오는 에너지를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이행대상(transitional object)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지난 6월 24일 한국민요학회 제75차 정기학술대회, 이소영 교수(명지병원예술치유센터)가 발표한 '민요의 공연예술화에 대한 비평적 고찰-이희문의 경기소리를 중심으로'의 한 대목이다. 이소영은 이 발표에서 이희문의 획기적이고 도발적인 실험들이 역설적으로 경기소리라는 민요의 원형적 양식을 재구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내가 좌장을 맡아 종합토론을 진행하였기에, 뒷풀이라고나 할까, 의미심장한 몇 풍경을 소환하여 공부자료로 삼는다. BTS보다 더 먼저 해외 진출에 성공했던 사례가 '이희문과 씽씽'이다. 나도 오래전 이 영상을 접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전통적인 음악 양식을 유지하면서도 복식이나 배경음악 등 파격적인 연출을 통해 전혀 다른 양상의 장르를 모색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같은 도발적 실험들은 이날치밴드, 잠비아니, 악단광칠 등을 필두로 주로 판소리계열 전공자들에 의해 실행 중이다. 민요를 포함한 판소리 전공자들이 트로트나 일련의 실험적인 장르 개척에 나서는 현상은 이제 낯설지 않다. '국악의 르네상스'다. 나도 일찍이 수차례 송가인 신드롬을 분석했다. 베이비부머세대의 은퇴로 대변되는 사회문화사적 현상, 특히 국악이니 민요니 우리 것이니 따위의 복고적 환기 현상에 주목했다. 전통이라고 해서 과거를 다루는 것이 아니요 복고라 해서 퇴행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민요의 현장은 어디인가? 이런저런 현상을 통칭하는 용어로 흔히 컨템퍼러리(contemporary)를 든다. 전통이나 기왕의 것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대의 감각이나 의미로 포착해내는 일련의 행위라는 함의를 지닌 용어다. 어디 음악뿐이겠는가. 한자말은 다르지만 전해서(傳) 통하는(通) 것이 전통(傳統)이라는 저간의 내 주장을 복기해둔다. 전해서 통하지 않는 것은 인습(因習)이고 장차 폐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정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무당굿으로 알려진 장르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동시대는 물론 관련 공동체와 교섭하면서 재구성되어 온 시대적 산물일 뿐이다. 문화 자체가 늘 현대적 변용 속에서 재구성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이희문의 사례뿐 아니라 몇 가지의 논의들이 중첩되었다. 관련 언급은 차후 기회를 엿보기로 한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전체주제였던 '민요의 현장'이 과연 어디일 것인가였다. 예컨대 논밭에서 일하면서 부르던 노동요의 현장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희문의 사례에서 또 여타의 실험들에서 민요가 면면히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굿판과 노동판과 유희판의 배경이 달라지고 노래의 양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심지어 나는 송가인의 트로트를 '남도트로트'로 명명하고 전통이라는 틀 속에서 분석하고 해명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민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지난 내 칼럼에서 여러 차례 다루었기 때문에, 두루두루 참고 가능할 것이다. 노동요의 현장과 이희문의 무대 현장, 여전히 문제는 장르나 양식에 대한 고정관념 혹은 분과학문이라는 틀거리에 대한 편협한 진단에 있다. '무대민요'와 '극장민요'를 넘어 민요의 현장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기억된 현장과 사람들에 초점이 있기 때문이다. 한 시기 포착했던 기억된 과거만이 민요의 정체를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토론을 통해 내가 제안했던 몇 가지를 민요연구의 공론장에 제물로 내놓는다.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품한 민요라거나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민요 등은 일종의 무대민요 혹은 박물관민요다. 논밭에 나가 일하는 형식을 취한다더라도 야외무대라는 맥락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기획, 연출, 안무, 소품들이 마련될 뿐 아니라 등장인물의 배치, 역할, 무대장치, 조명, 복식 등이 면밀하게 구성된다는 점에서 극장민요다. 미장센을 치밀하게 구성한다는 점, 전통 혹은 원형 따위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연극이라는 점에서 이런 호명을 붙일 수 있다. '극장민요'라는 언설은 기어츠가 창안한 극장국가라는 개념에서 내가 따온 말이다. 19세기 인도네시아 제의정치와 권력구조를 정의한 것인데, 근자에는 북한을 수식하는 용어로 사용되어왔다. 극장에서 상영하는 민요는 본래적 배경(context)이 거세되었다. 총체적이지 않다. 문화재 지정이나 전통 발굴을 목적 삼았던 기왕의 민속예술제 따위의 민요는 그것이 갖는 전통적인 양식 예컨대 선율이나 장단 따위의 음악, 노랫말이나 문학적 형식 따위에 의미를 부여한 것일 뿐이다. 박물관이나 극장에 전시된 혹은 실행되는 민요의 의미가 제한적이다. 그렇다고 기획되고 연출된 장르를 폄하하며 이른바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언설로 그 가치를 훼손시킬 필요는 없다. 단지 이것을 총체적 의미를 지닌 것처럼 여기거나, 컨텍스트적 맥락을 요구하는 것을 비판할 뿐이다. 오히려 변화된 현장을 주목하고 재구성된 장르 속에서 원형적인 것을 추적하는 일이 긴요하다. 문화재라는 용어를 문화유산이라는 용어로 바꾸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의 출발점이다. 책의 절반 이상을 민요(風謠)로 수록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살폈던 <시경>을 여전히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희문과 송가인, 이날치밴드나 악단광칠이 노래하는 곳이 현장이다. 민요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하여 근대의 남상기를 기점 삼는 민중성에 대한 주목, 예컨대 민족, 민속, 민예, 민화, 민요 따위의 개념에 충실했던 일정한 시기를 이미 지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시선은 분출했던 시대적 수요에 대한 향수, 그때 누군가 정해두었던 그 지점에 머무르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근래 교과서에서 국악을 없앤다 해서 난리가 난 적이 있다. 다행히 무마된 것같다. 하지만 극장민요와 현장을 혼동하는 착종된 시각이라면, 여전히 잠자는 파도일 뿐이다. 이렇게 질문해본다. 동요를 잃어버린 어린이들의 문제를 의제화하고 우리 사회에 피드백시켰는가? 도대체 그 많던 '어린이'들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패미니즘 등으로 고군분투해온 여성의 문제를 주도적으로 다루고 그들의 행로에 동행했는가? 혹은 비판했는가? 민요 장르는 사실 남성보다는 여성의 지분이 압도적이고 주도적임을 주목하라. 북한민요가 이미 상당하게 입수되어 있는데, 이를 소재 삼아 남북갈등이나 이데올로기의 문제들을 드러내고 그것이 우리 사회를 재건하거나 치유하는 데 피드백되었는가? 민요를 대체하는 실천적 현장에 대해 주목하거나 의제 삼았는가 따위의 질문 말이다. 교과서에서 국악을 뺀다니 화들짝 놀라는 안이함을 나부터 반성한다. 우리 민요 혹은 국악이 지금, 여기, 우리, 특히 다음 세대에 어떻게 기능하고 피드백되는가를 먼저 살피는 것이 전통을 연구하거나 가르치는 자들의 책무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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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5)<br>한국 최초 '도깨비 학회', 아·태 도깨비 초대하다아시아태평양 도깨비 몇 마리 도깨비학회 슬로건 '이론과 실천'| 실천 앞세우지 않는 이론은 한여름 밤의 꿈일 뿐이요 이론 전제하지 않는 실천은 망나니의 칼춤일 뿐이다 어둠 속에 도깨비불이 있듯 칼잡이들과 붓잡이들이 상호 넘나들며 연대를 희망한다 6월 초 한국 최초로 '도깨비학회'를 결성하고 소소한 국제학술포럼을 열었다. 도깨비가 한국 고유의 호명법이라 세계 최초의 학회라 해도 무리는 없겠다.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어 당분간 학회를 이끌 처지가 되었다. 학회원들에게 보낸 감사의 인사말 중 해외 발표문에 대한 논평 일부를 옮겨두고 그 의미를 새겨둘까 한다. 참고로 조자룡의 왕도깨비 유산에 대한 김영균(도깨비학회 고문)박사의 기조발표 및 세계의 가면에 대한 김정환(도깨비학회 고문)소장의 기조발표 등 흥미진진한 국내의 발표가 있었다. 지면 활용상 이 발표들은 따로 기회를 만들어 소개해 드리기로 하겠다. 뜻하지 않게 일본 및 해외 연구자들도 다수 가입신청을 해주어 고무적이었다. 미약한 시작에도 불구하고 창대한 미래를 예비하는 듯하다. 윤열수 명예회장, 나승만 명예회장, 박전열 명예회장, CEO 곡성 도깨비마을 김성범 촌장의 축하 논고 및 메시지를 비롯해 내가 줄곧 주문하고 강조해온 것은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유언 같은 언설을 동원한 이유가 있다. 그동안우리 학계가 잃어버린 것이라고나 할까. 현장에서 수십 년 수백 년 헌신해 온 사람들의 에너지를 우리 사회에 올곧게 피드백시키는 실천을 게을리 했다는 반성이라고나 할까. 도깨비학회가 내건 슬로건 '이론과 실천'을 재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실천을 앞세우지 않는 이론은 한여름 밤의 꿈일 뿐이요, 이론을 전제하지 않는 실천은 망나니의 칼춤일 뿐이다. 베트남의 도깨비와 중국동북지역의 출마선(出馬仙) FPT대학교 레티응옥깜 교수가 발표해준 베트남의 도깨비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베트남 동화에 나오는 도깨비들은 대부분 사악하지만 바보같은 성격의 도깨비들도 있다. 14세기 전설집인 <린남찍과이(Linh Nam chich quai)>, <비엣디엔우린떱(Viet dien u linh tap)> 등 여러 문헌에 나오는 정령의 특징을 소개해주었다. 아주 거대한 존재,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화하는 존재, 사람을 속이면서도 경쟁에서는 필경 사람에게 지는 존재 등이 그것이다. 길림시 조선족민속문화연구회 소속 전경업 선생이 발표한 출마선(出馬仙) 또한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중국의 자연신앙은 신(神), 선(仙), 요(妖), 마(魔), 귀(鬼), 괴(怪)에서 정령(精靈)에 이르기까지 방대하다. 순차적으로 보면 요(妖)부터 우리 도깨비의 범주로 포섭할 수 있겠으나 칼로 두부 자르듯 구획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지하듯이 일본의 오니(鬼)가 여기서의 귀(鬼)에 해당한다. 재작년 도깨비포럼에서 탄지아 교수가 "중국의 도깨비는 신령한 신(神)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캐릭터"라는 뉘앙스로 발표했을 때 가졌던 의문을 이 발표를 통해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도깨비를 산해경 정도의 범주로 포착하고 있는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발표였다고 생각된다. 발리의 오고-오고(Ogoh-ogoh)와 교토의 요괴 족자카르타 소재 만달라 국제문화연구센터장 정지태 선생이 오고오고에 대해 발표해 주었다. 인도네시아 사카력으로 새해 첫날은 발리의 침묵의 날이라고 하는 '녀삐(nyepi)'이다. 오전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집에서 기도하고 명상하며 침묵의 날을 보낸다. 그 전날 이브에는 다양한 도깨비를 만들어 가믈란을 연주하며 시가행진을 한다. 1912년경 흑백사진, 발리 여인들 앞쪽에 짚으로 만든 오고오고가 보이는 것을 보면 역사가 오래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고오고는 매우 다양하게 만들어진다. 사진 속의 트로피는 마을간 지역간 경연대회의 존재를 말해준다. 말레이시아 인기 만화 우핀&이핀도 오고오고의 하나로 해석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대통령 형상의 오고오고도 제작한다. 오고오고를 우리의 도깨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해 보이지만, 이 축제와 오고오고 제작의 배경에 트리 히타 카라나(Tri Hita Karana)가 있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것은 발리 힌두교의 가장 중요한 철학이기도 한데, 세 가지 관계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신과 인간의 조화, 인간과 인간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그것이다. 헤이안죠가쿠인대학 박미경 강사가 발표해준 교토의 요괴 이야기도 매우 흥미로웠다. 일본은 요괴학회, 오니학회 등 정령 관련 연구결과가 축적되어 있는 곳이다. 지금도 더욱 깊게 추적하는 이들이 많으며, 이를 기반 삼은 각양의 축제들이 열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도깨비 나마하게가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점은 여러 지면을 통해 내가 주목한 부분이기도 하다. 발표자는 교토 이치죠거리의 요괴 관련 장소와 축제 등의 사례를 풍부한 사례를 통해 소개해주었다. 필리핀 드웬데를 통해서 보는 서생과 상인의 감각 세인트루이스대 베카림 눌루드 교수 발표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두웬데의 서식처가 숲이나 나무 많은 집이나 언덕이라는 점, 이들을 밭의 정령, 언덕의 정령, 땅의 사람들 등으로 부른다는 점, 눈이 한 개라거나 큰 코를 가졌다거나 귀중한 보석의 소유자, 구애하는 처녀의 공유,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된다는 등 우리 도깨비와 친연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키반이라고 부르는 등 지역적으로 이름이 달리 나타나기는 하지만 풍요다산을 인간에게 제공해준다는 점은 공통적인 듯하다. 우리가 도깨비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유라고나 할까. 맞고 틀리고의 문제보다는 도깨비가 서식하는 현장에서 나름대로 평생을 바쳐 고구해 온 이들의 기운을 우리 사회의 어딘가에 피드백시키는 일이 더욱 긴요하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어디 도깨비뿐이겠는가. 전통이라는 무엇인가를 붙들고 분투해온 이들, 예술이라는 무엇인가를 위해 평생을 헌신해 오신 분들, 혹은 문화예술이라는 범주로 포섭할 수 있는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들, 길 잃거나 찾지 못해 헤매는 수많은 고학력 연구자들, 우리는 이들의 에너지를 어떤 방식으로 어떤 크기로 우리 사회에 나눌 수 있었나? 혹은 그리할 수 있도록 구성하거나 배려하였나? 나도 이론을 재구성하고 분석하는 학자 그룹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이론과 학문을 넘어 사회현상이며 정치며 군사며 혹은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라의 모든 일이 이와 다르지 않다. 도깨비학회가 모토로 내걸고 있는 '서생의 문제의식' 속에서 '이론'을 재구성해내고 '상인의 현실감각'으로 '실천'을 창조해내는 그런 기운생동이 흘러넘치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미약한 첫걸음이 예비하는 창대한 미래가, 싸목싸목 무논의 소걸음처럼 굿거리장단으로, 그렇지만 탄탄하게 올 것이라고 믿는다. 칼보다 붓(펜)의 힘이 크다고들 말하지만, 사실은 우리네 전통적인 생각에 비춰보면 틀린 말이다. 칼과 붓이 역(易)의 대대성(對待性)을 가질 때 그 본연의 힘을 발휘할 수 있고 시너지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어둠 속에 도깨비불이 있듯, 궁창의 어둠 속에서 빛을 끌어내듯, 칼잡이들과 붓잡이들이 상호 넘나들며 연대하기를 희망한다. 필리핀 베카림 눌르드 교수가 정령 드웬데의 특징을 요약하며 말한 바가 오랫동안 내 귓전에 남아 있다. "우리가 무엇을 믿든, 우리는 항상 지구의 공유 공간에서 존중하고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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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4)<br>거문도 인어 '신지끼' 신격의 계보는 어떻게 될까거문도의 인어 신지끼 "안개 있는 날에 백도와 무인도 서도마을 벼랑에서 주로 출몰 바위에 앉아 있거나 헤엄치기도 벼랑위에서 돌 던지기도 한다 해난사고나 바다에서 위험 경고 사람들을 쫓을 요량이었을 것" 그날따라 짙은 해무가 끼었다. 여수 백도의 물목, 바로 앞에 있는 매바위가 보일 듯 말 듯 지척이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처럼 그 끝을 알 수 없는 안개였다. 지상의 눈 달린 생물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닌 듯했다. 천길 물속도 안개가 스몄던 모양이다. 길 잃은 물고기들이 방황하다 벼릿줄을 보지 못하고 그물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물의 멸치는 만선하고도 넘칠 만큼 풍족하였다. 아들은 신이 났다. 그물을 걷어 올리는 손에 힘이 넘쳤다. 그런데 이물칸에서 백도를 바라보던 아버지가 불안한 듯 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물을 거두어라! 돌아가야겠다." 아들은 영문을 모르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다시 아버지가 외쳤다. "서둘러라. 뭐하느냐!"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평생을 멸치잡이로 잔뼈가 굵은 아버지의 명이렷다. 아들은 그 많은 멸치를 포기하고 그물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오래된 수상 엔진이 통통통 거친 숨을 내뿜으며 거문도를 향했다. 얼마쯤이나 왔을까? 뒤를 돌아보니 갑자기 백도쪽에서 돌풍이 일고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시에 솟아오른 파도는 물 위의 모든 것들을 집어삼킬 듯했다. 천만다행이었다. 서도와 우도 사이 노인암이 희끄무레 보이기 시작했다. 무사히 거문도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아들이 물었다. "돌풍이 일어날 줄 어찌 아신 거예요?"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신지끼를 보았다." "신지끼요?" "그래, 니가 정신없이 그물 내리던 그때, 촛대바우 옆에 말이다. 신지끼가 나타나 손짓을 하더란 말이다." "아, 그래서…." 아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지끼는 왜 나타날까?인어 신지끼를 보았다는 거문도 사람들이 많다. 백도는 물론 거문도의 무인도며 서도마을 벼랑에서 주로 신지끼가 출몰하였다. 주로 안개가 있는 날이었다. 한번은 서도마을 벼랑에서 물질을 하던 해녀가 허겁지겁 물가로 나왔다. 동료들도 덩달아 헤엄을 쳤다. "신지끼를 봤는가?" 다급한 물음에 먼저 나온 해녀가 대답했다. "그렇다네. 물속 깊은 곳에서 신지끼가 손을 뻗어 나를 잡았다네." 신지끼는 물 밖과 물 안을 구분하지 않고 나타났다. 때때로 바위에 앉아 있기도 하고 물 위를 헤엄치기도 했다. 벼랑 위에서 돌을 던지기도 했다. 사람들을 쫓을 요량이었을 것이다. 마치 일군의 도깨비들이 산에서 돌을 집어 던지듯이 말이다. 일종의 도깨비일까? 거문도 주민들에게 물어보면, 이구동성 인어의 형상을 묘사하며 설명한다. 상체는 예쁜 여성의 모습, 하체는 물고기다. 물개나 물고기를 잘 못 본 거 아닐까? 아니라고 손을 내젓는다. 왜 신지끼라고 하는 걸까? 모두 고개를 흔든다. 자신이 없다는 뜻이다. 거문도에서 평생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퇴임한 마광헌씨는 이 이름이 흰쥐에서 나왔다고 한다. 신지끼가 커다란 흰쥐처럼 생겨서 흰쥐, 힌지끼, 신지끼로 발음되었다는 것이다. 그럴까? 희끗희끗 보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명도 한다. 혹은 신지께라고도 한다. 이진오가 그의 논문 에서 관련 분석을 잘해 두었다. 여수엑스포 관련하여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콘텐츠적 주목을 받기도 했다.유몽인의 인어에서 마조(媽祖), 관음(觀音)까지유몽인의 에 나오는 인어는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얼굴이 아름답고 고우며 콧대가 우뚝 솟아 있다. 귓바퀴가 뚜렷하고 수염은 누렇긴 하나 검은 머리털이 이마를 덮었다. 흑백의 눈이 빛나고 눈동자는 노랗다. 몸뚱이의 어떤 부분은 붉은색이고 어떤 부분은 백색이다. 등에는 희미하게 검은 무늬가 있다. 손가락과 발가락에 물갈퀴가 있다. 재주가 많은 이라면 이 정도 설명만 듣고도 훌륭한 인어를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문도의 인어 신지끼는 구전이든 목격담이든 그리 자세하게 묘사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어렴풋한 인어의 형상으로 묘사될 뿐이다. 살결이 곱거나 흰색을 표방하는 캐릭터 정도라고나 할까. 인어공주 이야기는 세계적인 동화이기도 하지만, 거문도를 비롯해 부산 동백섬, 인천 장봉도 등 거론되는 지역들이 몇 군데 있다. 인어를 수식하는 형용으로 늘 '아가씨'를 붙이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아름다운 소녀 혹은 살결 고운 여성 캐릭터라는 점은 세계가 공통적인 듯하다.주목할 것은 신지끼의 출몰 이유다. 해난사고나 바다에서의 위험을 경고하거나 대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거문도 사람들에게 위험을 경고하고 장차 닥칠 해난사고를 막는 선한 신격이다. 진도 벽파마을의 당할아버지도 유사한 기능을 한다. 안개 짙은 날 출항하려던 어부에게 나타나 해난사고를 예방해주었다. 이런 기능을 하는 대표적인 신격이 중국의 마조와 불교의 관음보살이다. 마조(媽祖)는 타이완과 중국 내륙 사이에 있는 작은 섬 마조도에서 태어난 실존 인물로 그려진다. 나는 일찍이 마조 신앙에 흥미를 갖고 산동반도에서 해안을 따라 말레이시아까지 사묘와 축제 현장을 추적 답사했다. 특히 송나라의 복건상인들에 의해 세계 도처로 퍼져나간 신앙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직접 상륙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불교의 관음은 광범위하게 우리 생활 속으로 파고들었다. 중국, 베트남을 비롯해 수월관음, 백의관음 등은 해난사고 예방과 풍어기원의 대표적인 대상이다. 내가 궁금해하는 것은 거문도의 신지끼가 갖는 신격의 계보다. 영국군이 주둔할 만큼 중요한 물길의 요새였던 거문도의 위상이라면, 틀림없이 신지끼 인어설화 또한 동아시아 물길을 관통하는 어떤 계보가 있을 것이다. 거문도 녹산등대공원에 세워진 신지끼 인어상 옆에 서서 동아시아의 인어 캐릭터와 이들의 네트워크를 상상해 본다. 거문도(巨文島)지명에 대하여나는 거문도를 흑조(黑潮, 크로시오 해류)와 관련하여 해석하고 있다. 흑산도를 흑조의 끝으로 설명해 왔던 이유와 동일하다. '검은도'여서 거문도다. 일찍이 거문도의 정신적 상징이라고 하는 김유가 학문하는(文)이가 많은(巨) 섬으로 해석한 것도 본래의 호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중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따로 지면을 할애해야 하기에, 우선 15에 나온 거문도 지명에 대한 설명을 붙여두어 참고자료로 삼는다. 동도, 서도, 고도의 3섬으로 되었으므로 삼도(三島), 또는 삼산도라 했다. 또는 큰 맷돌처럼 생겼다 해서 거마도(巨磨島), 도는 지형이 큰 문처럼 생겼다 해서 거문도(巨門島)라 했다. 여수시와 제주도의 중간 지점이 되어 군사상 요충지가 되므로 임란 때에 왜적이 침범한 것을 충무공 이순신이 쫓아내고 별장을 두어 방비하였다. 고종 22년(1885) 3월 1일 영국 동양함대가 침입하여 온갖 군사 시설을 하는 것을 북양대신 이홍장의 주선으로 정부에서 엄세영과 목인덕(뮐렌도르프)이 청나라 북양수사제독 정여창과 함께 거문도에 가서 항의하고, 외부독판 어윤중의 주선으로 마침내 1887년 2월 27일 영군이 물러가고, 그 다음 달에 거문진을 설치하였다가 1895년 5월 지방 관제에 의해 진을 폐하고 삼산면이 되었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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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3)<br> 만개의 꽃들 속에 은닉된 참음과 기다림 혹은 용서인동초(忍冬草) 설중매며 수선화며 난초들이 풍설 견디는 것은 한가지지만||오로지 인동만이 숱한 봄날을 더 보내고 꽃을 피우지 않는가 마치 우리네 이름도 빛도 없는 민중들이 오만 풍설 다 겪고 수백 수천 날 주름살 더하고도 제대로 못 피우는 처지라고 할까 노주인(老主人)의 장벽(腸壁)에/ 무시로 인동 삼긴 물이 내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어 붉고/ 구석에 그늘지어/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냄새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풍설(風雪) 소리에 잠착하다/ 산중에 책력(冊曆)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정지용의 시, 인동차(忍冬茶)이다. 다 타지 않은 덩그럭 불, 물에 삶아 우려낸 인동차를 마시는 풍경이 그윽하다 못해 간절하다. 김 서린 흙냄새를 맡으며 바깥을 내다보니 눈바람 가득하다. 달력도 없는 어느 골짝 산중일 것이기에, 시간의 들고남이 무슨 상관이랴. 한겨울 내내 따닥따닥 타들어 가는 장작불이 무심할 뿐이다. 노인으로 표현된 화자는 탈속한 승려일까 오랜 병에 시달린 환자일까. 적어도 지천명은 넘은 나이일 것이다. 인동 삶은 따뜻한 차가 창자의 깊은 어딘가로, 아니 모세혈관의 깊디깊은 어딘가로 흘러든다. 냉온의 격차가 끌어당기고 밀어낸다. 생동하는 기운이 몸 안과 몸 밖을 공전(公轉)한다. 어디 몸뿐이겠는가. 맘 밖과 맘 안 또한 그러하니 어찌 음양이 다르겠는가. 수도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생불일여(生佛一如), 중생과 부처의 본성이 이와 다르지 않다. 흩날리는 눈발에 시선을 두고 참척(한 가지 일에만 정신을 골똘하게 쓴다는 뜻)할 따름이다. 다만 시선이 멈추는 곳은 파릇한 무순, 그늘 속에 솟는 양의 기운이다. 화자의 능청맞은 시선이다. 무심한 듯 하이얀 삼동의 그늘, 이것이 해탈의 경계 아래 은닉한 복선(伏線)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애오라지 겨울의 그늘에 가린, 안으로 눈을 떠야만 보이는 것을.인동초(忍冬草), 겨울(冬)을 견뎌내야(忍) 피는 꽃이란 뜻이다. 비중으로 치자면 오히려 눈 속에 피어나는 설중매나 난초, 혹은 수선화 따위가 그러하다. 그런데 왜 하필 이 꽃에 인동(忍冬)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나무에 속하기 때문에 인동덩굴이라 한다. 굳이 풀(草)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도 알지 못하겠다. 겨울을 견뎌냈으니 겨우살이덩굴이라는 이름이 일반적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로부터 이 덩굴을 상징으로 삼았다. 당초문(唐草紋)이라 한다. 기와 등의 유물, 고분의 문양 등에서 엿볼 수 있다. 노옹수(老翁鬚), 노사등(鷺鷥藤), 좌전등(左纏藤), 수양등(水楊藤), 밀보등(密補藤), 능박나무 등의 이름이 연관 있다. 재래종은 한자리 좌우로 두 가닥 꽃이 핀다. 흰색이었다가 점차 노란색으로 변한다. 그래서 금은화, 금은등(金銀藤), 은화동, 이포화(二苞花), 이보화(二寶花), 이화(二花), 쌍화(雙花), 다엽화(茶葉花) 등의 이름이 생겼다. (금차고(金次股) 등 재화의 의미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금은화(金銀花), 모두 겨우살이꽃으로 번역된다. 통령초(通靈草)라는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이, 약이나 차로 마신다. 몸을 넘어 넋(靈)까지 다스린다는 뜻일까? 인동차로 앓아누운 세자의 피부를 고쳤다는 내용이에 나온다. 몸과 맘을 모두 다스리는 꽃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겨울만 견디랴 숱한 봄날마저 견뎌야 하는 것을"숙종 26년(1700)의 과거 시험에서 별도로 피봉(겉봉)을 만들어, 입격(합격)한 다른 사람의 시권과 몰래 합하게 하고 이름을 바꾸어 함부로 합격을 차지하는 일이 발생하였다(중략). 송성 같은 거간꾼의 무리야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출방하던 처음에 이런 동요가 있었다. '어사화(御賜花)냐 금은화(金銀花)냐?' 이때에 이르러 백금의 말이 여러 공초에 어지럽게 있었으니 그 말이 과연 맞게 되었다." 34권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주지하듯이 어사화는 문무과에 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하사하던 종이꽃이다. 이 기사에서 인용한 민요는 부정으로 합격한 자를 민중들이 놀리며 부른 노래다. 시대적 상황이나 정치적 징후를 암시하는 노래라서 참요(讖謠)라 한다. 금은화(겨우살이덩굴)는 댓구로 쓰였으므로, 격조의 낮음을 비유한 것이다. 들녘에 피는 '하찮은 꽃'이라는 뉘앙스다. 그래서일까. 우리네 선조들은 설중매며 국화며 난초 등 차고 넘치는 노래들을 지었는데, 인동에 대한 노래는 희소하다. 고대로부터 부귀와 공명의 상징으로 차용되었던 당초문(唐草紋)이라면 이율배반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인동초가 당초문양의 모티프라는 해석이 틀린 것이다. 숙종연간 어사화와 금은화를 노래한 참요가 많은 것을 얘기해준다. 부정으로 얻은 어사화와 들판의 하찮은 인동초의 댓구 말이다.연하(煙霞, 안개와 노을)가 난몰(難沒)하는 옛 인연의 터, 초의는 두륜산 중턱에 못을 파고 초가를 지었는데, 나는 초의가 난 자리로 돌아와 인동초 몇 줌을 심었다. 옛 인연의 정승이 있겠는가. 달 비치는 연못이 있겠는가. 그저 이름도 빛도 없는 사람들이 대를 이어 살다가 죽고 또 태어나는 산자락일 뿐이다. 보아하니 장독대 주면 인동초가 만개하였다. 지난겨울 잘 견뎌낸 덕분이기도 하지만 모진 봄 가뭄을 잘 견뎌낸 까닭도 있으리라. 흙냄새 훈훈한 인동의 향을 맡노라니 비로소 알겠다. 발에 밟히도록 흔한 덩굴에 인동(忍冬)이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 말이다. 설중매며 수선화며 난초들이 풍설 견디는 것은 한가지지만, 오로지 인동만이 숱한 봄날을 더 보내고서야 꽃을 피우지 않는가. 마치 우리네 이름도 빛도 없는 민중들이 오만 풍설 다 겪고 수백 수천 날 주름살 더하고도 제대로 꽃피우지 못하는 처지라고나 할까. 더구나 꽃(花)도 아니고 나무(木)도 아닌 풀(草)이라니.그래서 김대중에게 인동초라는 별칭이 붙었을까? 그에 비유하자면 인동초야말로 개천에서 난 꽃이고 용이다. 다들 나고 자라 생장하는데도 웅크리고 있다가, 따스한 날 모두 보내고서야 만개하기 때문이다. 김수영이 노래했듯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 애오라지 잠룡(潛龍)이다. 진정한 인고(忍苦)란 그런 것 아닐까? 눈에 보이는 풍설 뿐만 아니라, 만개의 꽃들 속에 은닉된 참음과 기다림과 혹은 용서와 화해 같은 것 말이다. 새로 이름을 지어야겠다. 인동춘초(忍冬春草), 곧 겨울과 봄을 다 견뎌내야 피는 꽃이라는 뜻이다. 어사화인가 금은화인가,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마당의 인동초가 유난히 깊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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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2)<br>모내기철 논둑으로 향하는 그 어떤 사무치는 그리움쌀에 대한 명상 내게 그리고 우리에게 쌀은 무엇인가? 나는 그리고 우리는 쌀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했던 것인가? 여기서의 쌀을 문화나 문명으로 바꿔 읽어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7인의 사무라이'가 궁극적으로 지켜낸 것은 무엇일까 영화 '7인의 사무라이'만큼 많이 회자된 영화가 또 있을까 싶다. 그만큼 유명한 영화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를 토대로 리메이크된 많은 오마주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1954년 개봉하였으니 우리로 말하면 동족상잔의 화마가 채 가시지 않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거장이라는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1910~1998) 감독의 흑백영화다. 영화의 줄거리나 주제는 일목요연하게 사무라이들의 의기투합과 전쟁을 다루고 있다. '황야의 7인' 등 리메이크된 수많은 영화도 이런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모내기다. 사무라이들의 주제와는 별 상관없어 보이는 이 장면이 내게는 대미나 대단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거론하는 수많은 비평이나 담론 중 모내기 장면을 거론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시선이 있는지 모르겠다. 유독 이 장면이 내게 선명하게 남아있는 이유가 뭘까. 15~6세기 일본 전국시대가 배경이다. 산적이 출몰하여 여자와 농작물을 수탈해가는 어느 농촌 마을에서 사무라이들을 고용한다. 사무라이들은 대부분 실직한 이들이어서 지금으로 말하면 부랑아 정도의 캐릭터들이랄까. 이런저런 에피소드 속에 일곱 명의 사무라이들이 모이게 되고 급기야 산적들과 전쟁을 치른다. 일곱 명의 사무라이들은 각각 독특한 성격을 연기하는 캐릭터들이어서 스토리의 전개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을 거장이라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산적들과의 전쟁이 전체 장면을 이끌고 가지만, 세밀하게 묘사되는 당시 일본 농촌의 풍경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보리 수확하는 들녘의 풍경이며 모내기하는 산전답의 풍경이 그렇다. 산적과의 전쟁에서 이기지만 마을 사람들과 감베이, 시치로지, 가츠시로 세 명의 사무라이만 살아남는다. 사무라이의 대장 캄베이가 엄숙하게 말하며 영화가 끝난다. "또다시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또 졌다. 이긴 것은 저기 농민들이야." 무슨 뜻일까? 여러 평론을 보면 사무라이와 농민들의 계급적 변별, 별 대가 없이 고용된 사무라이들의 신분적 한계, 결국 농민들 혹은 고용주(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운명, 이런 종류의 해석이 주류를 이루는 듯하다. 사무라이를 주제로 한 영화라는 점에서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구로자와도 예기치 못했던 대미의 장면이랄까. 결국 사무라이를 고용해서 이들이 지켜내고자 했던 목표 혹은 목적이 무엇이었나 하는 점에 생각이 미치면, 마지막 장면이 또 달리 보일 수 있다. 산적들이 약탈해가던 것이 여자나 농산물뿐만 아니라 마을 풍경 그 자체였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구로자와가 드러내고 싶었던 일본적인 어떤 것, 마치 우리네가 근자에 열광하는 한류(韓流)와 같은, 한 때 글로벌한 바람을 일으켰던(지금도 그러하나?) 일본의 이미지를 연상하는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 이후 리메이크되거나 오마주(구로자와에 대한 존경의 모사로서)된 일본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회자되고 확장된 것이 그 사례이지 않을까. 비록 흑백으로 표현되었지만 수려한 일본의 산천과 보리와 쌀과 북장고 두드리는 리듬과 사람들의 노래와 어쩌면 문명 담론 같은 그런 풍경 말이다. 우리에게 쌀은 무엇인가 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의 모내기는 우리네 남도지역의 모내기와 많이 닮았다. 동아시아를 관통하는 모내기 풍경이기도 하다. 우리의 고대 악기 비슷한 요고(腰鼓)와 흔히 벅구나 법고로 호명되는 작은 북, 꽹과리와 비슷한 작은 징쇠, 차양 넓은 볏짚모자며 모심는 동작에 맞춰 부르는 노래 따위가 그렇다. 일본의 남쪽 섬들인 아마미오오시마나 오키나와 등지의 모내기는 지금도 이런 풍경이 연출된다. 머리에 덩굴풀을 두르고 이런저런 의례와 함께 모내기를 하는 것은 내 고향 진도의 들노래 풍경과 흡사하다. 중국의 동북지역이 양걸(秧歌) 장르로 확장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내가 십수년 답사했던 동아시아의 모내기 장면이 대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다르지 않다. 대미(大尾)의 장면이 내게 오랫동안 남아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었다. 은연중 드러난 혹은 숨겨진 메타포, 쌀을 지키기 위한 서사 말이다. 구로자와가 말하고자 했고 마을사람들이 지키고자 했던 내면의 풍경, 예컨대 중국의 장이머우(张艺谋) 감독이 <붉은 수수밭> 등 수많은 영화와 연출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붉은색의 중국에 비견된다고나 할까.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내고자 했던 생태환경 중심의 애니메이션 풍경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나는 이 영화의 이면에 숨어있는 쌀을 봤다. 쌀이 가진 동아시아적 배경, 쌀이 가지는 문명적 함의 때문일 것이다. 감베이의 마지막 대사처럼 전쟁에서 그들이 지켜낸 것은, 다름 아닌 모내기의 풍경, 쌀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무라이의 시선에서는 이기고 지는 싸움일 것이지만 마을 사람들 시선에서는 대대로 살아온 마을과 사람과 풍경과 그 기반이 되는 쌀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묻는다. 일본에게 쌀은 무엇인가? 왜 그들은 쌀을 지키려고 했던 것인가? 내게 질문한다. 내게 그리고 우리에게 쌀은 무엇인가? 나는 그리고 우리는 쌀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했던 것인가? 여기서의 쌀을 문화나 문명으로 바꿔 읽어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바야흐로 모내기철에 들어선다.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우리네 고향에서는 북치고 장구치고 작은북 벅꾸 두드리며 모내기를 했다. 마치 영화 '7인의 사무라이' 마지막 장면처럼 모내기 노래를 불렀다. 머리에는 덩굴풀 뜯어 감고 차양 깊은 삿갓이 무논에 잠기도록 느린 굿거리장단에 호흡을 맡겼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런 목적도 없는 듯했지만 결국에는 그런 리듬이 있어 쌀을 지켰다. 영화 속의 사무라이 같은 누군가 있어 어떤 불한당 산적들을 '이길 수' 있었다. 모내기철을 맞는 지금의 내 마음이 그렇다. 사무치는 어떤 그리움이 논둑에 나를 불러세우는 것인가. 누가 산전답 어딘가에서 목청 높여 쌀을 노래하는 것인가. 은유의 쌀, 정체성으로서의 쌀 쌀은 전 세계 대륙 전체에서 재배하고 먹는 곡물이다. 열대몬순, 온대몬순, 실크로드, 유럽, 미국 등을 포괄한다. 전 세계 사람들이 섭취하는 전분의 22퍼센트가 쌀에서 나온다. 통계에 따라 순위는 달라지지만 밀, 옥수수와 더불어 3대 곡물이다. 아마 쌀을 기피하고 빵을 선호하는 우리네 식습관의 변화대로 밀의 수요가 훨씬 많아졌을 것이다. 고기를 즐겨 먹는 식습관 변화로 사료용 곡물이 증가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인디카, 자포니카로 대변되듯 쌀은 아시아의 문화 혹은 문명을 대변한다. 우리도 예외일 수 없다. 기회가 되면 쌀의 문명사를 따로 다루겠지만 우리에게 쌀은 '생명'의 또 다른 은유이기도 하다. '쌀의 인류학'을 쓴 오누키 에미코는 이 책에 '일본인의 자기인식'이라는 부제를 달기도 했다. 쌀이 타자와 비교되는 '자기 자신'이며 일본의 상징이고 은유라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는 어떠한가. 쌀이 내 자신인가. 우리의 은유인가. 쌀을 통해 나의 정체를 혹은 내가 한국인임을 인식할 수 있는가. 사방의 무논에 모내기하는 풍경을 바라보며 느끼는 소회다. 우크라 전쟁으로 식량자급에 대한 대책들이 논의되는 모양이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아직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쌀을 지키는 것이 내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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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1)<br>잔인한 적군의 시신까지 거든 바다의 오래된 신앙왜덕산(倭德山)의 비밀 피아를 나누지 않고 위령 바다사람들 심성 깃들어 왜군에도 그러해야 했던 섬과 바다의 민속 관념은 인류의 박애 정신 아닐까 교착상태 빠진 한·일 문제 풀어내는 데 도움이 될 수도 "명량 전투가 끝난 뒤 임준영은 이틀 동안 작전 해역을 수색했다. 나는 임준영에게 전선 2척과 어선 5척, 그리고 군사 50명을 맡겼다. 임준영은 이틀 후 군사를 인솔하고 암태도로 돌아와 보고했다. 임준영은 떠다니는 적의 시체 2000여 구를 건져서 묻었다. 연안 갯벌 쪽으로 다가오는 시체만을 정리했고 원양으로 떠내려가는 시체는 수습하지 못했다." 김훈의 소설 중 일부다.난중일기를 기초로 쓴 이 소설에는 많은 수사자(水死者)가 등장한다. 해전(海戰)이니 응당 물에 빠져 죽은 이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눈을 뜨고 읽기가 난처할 만큼 섬뜩하고 잔인한 묘사가 이어진다. 전쟁 노획에 수급(首級)이 가장 중요하다. 아군과 적군의 목들이 잘리고 소금에 절여져 진상된다. 베어 얻은 수급을 다 감당하지 못하여서인지 코와 귀만을 잘라 전과를 계산하기도 한다. 이를 일본으로 우송하여 만든 것이 교토 호코지(方廣寺) 귀무덤(耳塚, 미미츠카)이다. 코도 함께 베었으므로 비총(鼻塚)이라고도 한다.관련한 내용은 2019년 7월 18일자 본 지면에 자세하게 소개해두었으니 참고 가능하다. 소설의 여기저기 수사자들을 거두어 묻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이것이 김훈의 상상력일까? 아니면 실제 있었던 일일까? 아마도 김훈은 진도 왜덕산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라는 책을 쓸 때, 나는 진도 관련 자료들을 한 보따리 마련하여 그에게 준 일이 있다. 이후 연통한 바가 없어 그의 글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설이든 수상록이든 일정한 사실을 바탕삼아 쓴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소설 에 나오는 수많은 수사자와 그 주검의 처리방식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궁금증이 생긴다. 왜덕산은 왜군에게 덕을 베풀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당시 진도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적군이었던 왜군을 수습하여 매장해주었던 것일까? 설마 왜군을 특별하게 대우하기라도 했던 것일까?왜덕산과 교토 코무덤 평화제진도문화원 박주언 원장에 의하면 현재 진도군 군내면 왜덕산의 지명은 범덕산, 왜덕산, 왜덕전, 와덕산, 외덕산, 덕산 등이다. 한두 달 후 출판될 보고서에서 다루어질 예정이므로 보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진도문화원으로 연락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김정호 전 진도문화원장,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전문위원을 비롯해 나도 이 보고에 한 꼭지를 맡아 참여한다. 내가 맡은 분야는 수사나 익사에 대한 민속 관념 혹은 의례에 관한 것이다. 박주언 원장이 현재까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6~70여 기의 묘지가 왜덕이라는 이름과 관련되어 있다. 물론 창녕조씨 선산과 혼재되어 있어서 무명연고의 묘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와음을 감안한다 해도 족보의 주소가 한자 왜(倭)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와를 구웠던 지역이기에 와덕산(瓦德山)이 와전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다수의 묘지 주소를 무엇 때문에 왜덕(倭德)이라고 표기했는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 사실이 알려진 것은 박주언씨가 2004년 이라는 잡지에 기고하면서부터다. 2006년 일본인들이 왜덕산을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명랑해전에서 왜군을 지휘한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 현창 사업회 임원과 수도대 학생들이 그들이다. 왜덕산에 묻힌 이들이 자기 선조들이라고 생각해서다. 이후 박주언씨를 중심으로 진도에서 평화제라는 축제가 진행되었고 교토 코무덤 앞에서 같은 이름의 혼령제가 열리고 있다.왜덕산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하여코무덤은 무엇인가? 임진왜란의 원흉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조선 민남녀의 코와 귀를 베어가 모아둔 곳이다. 당초에는 귀무덤이라고 했다가 여러 학자의 연구에 따라 코무덤이라는 수식을 부가했다. 귀보다는 코가 더 섬뜩해 귀무덤이라는 이름을 썼다는 전언이다. 당시 왜군은 조선의 민중들을 죽이고 코를 베어 갔다. 왜군 장수들은 코를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내고 히데요시는 코영수증을 써주었다. 일설에는 이 무덤에만도 조선인 12만 6000명의 코가 묻혀있다 한다.교토뿐만이 아니라 몇 군데 코무덤을 더 찾았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이토록 잔인했던 적군 왜병들의 시신을 거두어 진도의 동쪽 해안에 고이 묻어 주었다는 설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혹시 어떤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는 아닐까? 그렇지 않다. 족보의 묘지 주소가 왜덕인 이유를 상고해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덕산 사람들 곧 진도사람들은 멀리 교토의 코무덤까지 찾아가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이들이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런 것일까?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일본인들이 진도의 왜덕산을 방문하기도 한다. 코로나 여파로 잠시 중단되기는 했지만 해마다 9월에 진행하는 이 행사는 명량의 바다에서 연행했던 평화제의 확장이기도 하다.박주언씨가 오랫동안 연행해온 진도평화제라는 축제는 지금은 없어져 명량해전축제로 탈바꿈해버렸지만 원혼을 달랜다는 의미만큼은 여전하다. 적군의 시신들을 거두고 매장해준 왜덕산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여기에는 피아를 굳이 나누지 않고 위령한다는 바다 사람들의 심성이 깃들어 있다. 왜군이어서가 아니고, 왜군이어도 그러해야 했던 섬과 바다의 매우 오래된 신앙이자 민속 관념 말이다. 민속학자들은 물속의 원혼이 해코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자기방어의례로 해석하곤 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는 이를 인류가 지닌 박애 정신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교착상태에 빠진 한일간의 문제를 풀어내는 데 일조할 수 있는 사례라는 점도 부기해둔다. 쿄토의 코무덤과 진도의 왜덕산을 바라보는 시선과 해법이 더욱 긴요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수사자(水死者)에 대한 바다 사람들의 생각물에서 죽은 것을 정상적인 죽음으로 다루지 않는 것이 우리네 전통이다. 우리뿐만이 아니다. 적어도 음양관을 철학의 기저로 두는 문화권에서는 보편적인 정서이고 감성이다. 나는 이를 졸고, 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었고, 이를 다시 졸저, (민속원, 2018)에서 풀어 썼다. 비혼 청춘 남녀의 동반 수사(水死) 사건을 사례로 그들에 대한 '혼건짐 씻김굿'과 '망자혼사굿'을 통해 뭍과 물의 대칭성, 남과 여의 대칭성, 나아가 자연과 인류의 대칭성 등을 톺아보고자 했던 글이다. 정상적이지 않은 죽음을 정상적인 죽음으로 바꾸는 방식, 물에 빠져 죽은 이를 대하는 초혼제(招魂祭), 수륙재(水陸齋), 위안제(慰安祭), 여제(癘祭) 등이 그 사례다. 세월호 사건에 대해 온 국민이 분노했던 이유도 이 죽음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는 심리가 배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그것이 수사자에게만 해당되며 혹은 개별적이거나 집단 간의 일에만 국한되겠는가? 전쟁의 참혹한 풍경 속에서도 한 가닥 피어오르는 싹이라고나 할까. 진도의 왜덕산을 보다 슬기롭게 바라볼 필요는, 그간의 수사자에 대한 민속적 관념이나 신앙의 태도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교토의 코무덤 위령제를 매개로 한국의 변방 진도의 왜덕산이 인구에 널리 회자되기를 소망한다. 전후좌우 갈등과 이념과 심지어 전쟁을 뛰어넘는 우리의 마음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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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0)<br>장단은 리듬의 패턴… 시간 흐름 따라 직조된 씨줄장단(長短)이란 무엇인가 '긴 것'과 '긴 것'이나 '짧은 것' '짧은 것'의 반복은 장단이 아니다 음'과 '양'이요 '남자'와 '여자'요 대삼'과 '소삼'이어야 장단이다 판소리도 장단과 더불어 재구성 장르 이를 허투루 여기거나 귀찮아하거나 혹은 업신여겨 말살하는 것은 뿌리와 근본을 버리자는 말과 같다 일군의 농악대가 한 집에 이르렀다. 집주인은 안쪽에서 맞이하고 농악대는 바깥쪽에서 연주한다. 4/3박자 리듬이다. 구음보(口音譜)로 적어보니 '깽매 깽매 구갱깽/ 구갱매 깽매 구갱깽'이다. 연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농악대원들 모두 합창하여 부르는 소리를 들으니 '쥔 쥔 문여소/ 어서어서 문여소'라 한다. 주인장에게 문을 열어달라는 요청임을 알 수 있다. 꽹과리와 더불어 울리는 악기의 리듬 패턴이 이 요청의 말과 합일하여 공명(共鳴)한다. 이를 '문굿'이라 한다. 마당에 들어선 농악대가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은 샘이다. 문굿 보다는 더 느린 템포로 연주한다. 구음보로 적어보니 '깽매 깽매 구갱깽/ 구갱매 깽매 구갱깽'이다. 마찬가지로 합창하여 노래한다. '어따 그샘물 잘난다/ 얼떡벌떡 잡수쇼/ 아들낳고 딸낳고/ 미역국에 밥한술!'. 샘물 잘 나라는 기원의 말을 꽹과리며 장구며 북 등의 악기로 리듬을 맞추는 것이다. 리듬 패턴의 첫머리에는 징을 쳐서 단위를 구분한다. 징 치는 개수를 따져 일채, 이채, 삼채, 오채 등으로 부른다. '채'는 한자말 '차(次)'에서 온 말이다. 일정한 순서(차례)라는 함의가 있다. 그렇다면 이 리듬 패턴들이 모두 사람의 말이나 노래에 따라 규율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주문의 말과 몸짓과 절차와 혹은 오랜 역사 동안 체화되어 온 생래적 리듬이며 강박적 이데올로기들이 다층적으로 생성되거나 소멸되고 재구성된 결과들이다. 통칭하여 장단(長短)이라 한다.장단과 선율, 씨줄과 날줄의 직조농악에만 장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은 모두 이 장단이라는 리듬 단위로 설명할 수 있다. 궁중음악에서부터 무속음악, 춤음악은 물론 노래와 몸짓 혹은 호흡과 절차의 층위들이 포괄된다. 지역별, 기능별, 형태별, 소요 악기별 등 천차만별의 구분법이 있다. 이 단위들을 분리하거나 중첩시켜 생성하는 것이 음악이다. 선율과 장단이 그 중심이다. 선율은 소리의 높낮이를 말하고 장단은 리듬의 패턴을 말한다. 선율은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아래서 위로 직조된 날줄이고 장단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직조된 씨줄이다. 의문이 든다.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일정한 리듬 패턴을 장단(長短)이라는 이름으로 의미화시키는 이유 말이다. 우리의 전통음악에서 리듬적 특징을 지시하는 용어 중 장단만큼 중요한 게 없다. 하지만 개념 정의나 형식의 분석이 명료하지 않다. 수백명의 학자 혹은 활동가들이 장단에 대해 연구했고 수천개의 결과물들이 있는데도 말이다. 학자들이 쓸데없는 연구를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만큼 장단 생성과 파생의 경로가 다양하다는 뜻이다. 아쉬운 것은 각양의 음악 장단 연구 중 어의적 의미를 톺아본 연구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선율적 특성의 연구에 비하면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그럴까? 우리 음악의 특성이 장단에 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장단이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 혹은 철학적 의미망에 대해 천착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우리 전통음악의 장단체계를 비교적 내밀하게 분석했던 이보형은, 리듬 문제가 선율의 문제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선입견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는 장단 자체의 난삽하고 애매한 특성에 기인한 것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기원의 말과 노래와 몸짓과 혹은 그 어떤 음악적 행위들을 일정한 리듬 패턴으로 묶는 것이 선율의 문제란 말인가? 왜 일정한 리듬 패턴을 장단(長短)이라는 이름으로 범주화시켰을까? 남도무속음악의 대가였던 박병천은 굿거리 장단을 설명할 때 늘 '애기어깨걸이'를 강조한다. 구음보로 말하면, '덩기덕 궁 더러러/ 기덕덕기덕 궁 더러러'이다.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것을 '장단이 물린다'고 한다. 장단이 아니라는 뜻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앞의 4/3박자는 강하게 뒤의 4/3박자는 약하게 구성하여 조화를 이루는 것이 남도굿거리 장단의 기본이다. 이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연결 리듬을 '애기어깨걸이'라 한다. 음양(陰陽)이니 대삼소삼(大三小三)이니 혹은 고저장단(高低長短)이니 쌍편고요(雙鞭鼓搖)니 하는 따위가 다 같은 말들이다. 이것을 확장해 말하면 판소리의 어단성장(語短聲長)으로 연결된다. 말은 짧게 하고 소리(노래)는 길게 하라는 뜻이다. 일종의 개념 정의다. 판소리가 아니리(창을 하는 중간중간에 가락을 붙이지 않고 이야기하듯이 엮어나가는 사설)와 소리(唱)라는 기본 구성을 갖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모든 리듬 패턴의 중심에 장단(長短)이라는 어의(語義)가 있다. 본래의 말뜻은 '길고 짧다'는 것이다. '긴 것'과 '짧은 것'이라는 함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긴 것'과 '긴 것'이나 '짧은 것'과 '짧은 것'의 반복은 장단이 아니다. '음'과 '양'이요 '남자'와 '여자'요 '대삼'과 '소삼'이어야 장단이다. 서로 다른 것을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가장 적절한 예가 '엇모리 장단'이다. 서양음악의 어법으로 말하면 2박과 3박을 뒤섞어 10박을 만드는 리듬 패턴이다. 2박과 3박은 분명히 길이가 다른데 동일한 음가(音價)로 받아들인다. 궁중음악뿐 아니라 농악과 정악의 수많은 혼소박 장단들이 이런 구성을 취한다. 그래서 이보형이 정리한 바에 따라 우리 음악의 특성을 분박(음을 쪼개는 방식)이 아니라 소박(음을 쌓아올리는 방식)이라고들 한다. 왜 다른 것을 같다고 이해하는 것일까?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장단에 남은 이데올로기의 결과들은 소멸의 경로를 밟을 것이다. 주역에서는 대대성이라 하고 인류학에서는 대칭성이라 한다. 이를 율려의 철학으로 풀이했던 이가 근자에 명을 달리한 시인 김지하다. 율려(律呂)는 전통음악의 육률(六律)과 육려(六呂)에서 차용한 개념이긴 하지만, 판소리의 '흰그늘론' 등으로 확장한 의미망이기도 하다. 선율도 중요하지만 우리 음악의 큰 장점은 장단(長短)에 있다. 판소리도 장단의 발전과 더불어 재구성된 장르다. 이를 허투루 여기거나 귀찮아하거나 혹은 업신여겨 말살하는 것은 뿌리와 근본을 버리자는 말과 같다.교과서에서 국악을 없앤다는 소문에 대하여지게장단이란 말이 있다. 지겟작대기로 지게 동발을 치면서 맞추는 장단이다. 쪼빡장단이란 말이 있다. 옹기(물동이)에 물을 절반쯤 채운 후 바가지를 엎어놓고 리듬을 맞추는 것이다. 물허벅장단이라 한다. 너무 지역적이고 촌스러운 이름이어서 부끄럽게 여겨지는가? 여기에서 남도소리의 뿌리 중 하나인 '둥당애타령'이 나왔는데도 말이다. 남도의 흥그레타령에서 여섯박자 육자배기 장단이 나왔고 판소리의 진양조 장단으로 발전했다. 무수한 장단의 이름들이 있다. 서로 다르니 불규칙적이라 한다. 너무 많으니 혼란스럽다 한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서로 다른 것을 같다고 여기는 철학적 함의 말이다. 궁중음악이 그렇고 농악이 그러하며 세계적으로 지평을 넓힌 사물놀이가 그렇다. 우리 음악의 힘은 이 다종다양한 생성의 경로와 파생의 길 위에서 형성된 것이다. 우리 고유의 장단이나 국악을 어떤 규칙 예컨대 국제표준이나 서양음악에 맞춰 통일시키려 하는 발상은 큰 문제가 있다. 이용식의 주장처럼 연주자의 내관적(emic)인식과 학자들의 외관적(etic) 인식의 구별짓기를 해체할 필요는 있지만, 장단을 비롯한 국악을 통째로 무시하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이름으로 고향말 없애고 표준말만 쓰거나, 한국말 없애고 영어를 사용하자는 주장과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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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9)<br> 정형에 얽매이지 않는 '허튼 가락' 산조산조(散調)란 무엇인가 가장 근접 기원설 중 하나 시나위 악기들이 각자 마음 내키는 대로 연주하는 듯하지만 절묘한 화성 바탕이나 기원은 무속음악 확실 김창조가 재구성 초기 형태 심방곡 산조 발생 시점으로 견해가 대표적 우리 음악을 크게 궁중음악과 민속음악으로 나눈다면, 민속음악은 다시 성악과 기악으로 나눌 수 있다. 성악(聲樂)은 사람의 음성으로 하는 음악을 말한다. 악곡의 종류에 따라서 판소리 등의 창가, 민요, 가요, 가곡, 기타 따위로 구분한다. 연주 형태에 따라서는 독창, 중창, 합창, 제창, 기타 등으로 나누고 기능에 따라서는, 일하면서 부르는 노래, 놀면서 부르는 노래, 종교적인 제의에서 사용하는 노래, 기타 등으로 구분한다. 이 땅에 존재하는 어떤 악기보다 사람의 목소리를 이용한 음악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기악(器樂)은 악기를 사용하여 연주하는 형태를 말한다. 연주자의 수에 따라 독주, 중주, 합주 등으로 나누고 표현 형식에 따라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실내악곡 등으로 나눈다. 우리 민요의 가창 방식 즉, 혼자 부르는 노래, 여럿이 부르는 노래, 돌려가며 부르는 노래, 주고받으며 부르는 노래 등에 대입해보면, 악기 연주 또한 유사한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산조(散調)란 기악 독주곡을 말한다. 악기 하나를 가지고 연주하는 형태라는 뜻이다. 삼남지방(충청, 전라, 경상)에서 발달하였다 하고, 가야금, 거문고, 대금, 해금, 아쟁의 순서로 발생하였다 했다. 또 느린 장단에서 빠른 장단으로 배열된 3~6개 장단 구성의 악장으로 구분되며 반드시 장구 반주가 따른다고 했다. 하지만 다양한 산조의 기원설을 전제하거나, 판소리 소리북으로 장단을 맞추는 예들을 보면 '반드시'라는 수식으로 완성되는 장르나 개념은 아니다. 대개 그렇게 발생했고 그렇게 연주되니 그러한 것을 표본으로 삼는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산조(散調)의 우리말은 '허튼가락'이다. 산조의 기원을 시나위니 봉장취니 판소리의 선율을 악기로 표현한 것이느니 하는 얘기들이 여기서 나왔다. '허튼가락', 산조(散調)는 어디서 왔을까? '허튼가락'의 문자적 함의는 '정형적이지 않은', '흩어져 있는', '자유분방한', '율격에 얽매이지 않는' 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누군가가 이 장르에 산조라는 이름을 붙이기 전에 정형적이지 않고 흩어져 있는 어떤 음악의 형태가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산조라는 용어에 가장 근접한 기원설 중 하나가 시나위이다. 악기들이 어울려 서로 연주하는데, 각자 마음 내키는 대로 연주하는 듯하지만 절묘한 화성을 이룬다 해서 여러 기원설을 들어 설명하곤 한다. 그 바탕이나 기원이 무속음악인 점은 분명해 보인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정악에 상대하는 향악(俗樂) 혹은 굿거리, 살풀이 따위의 무속음악이라고 풀이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남부, 충청도 서부, 전라도, 경상도 서남부 등지의 무가 반주 음악에서 나왔다는 설명이 붙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시나위 자체가 육자배기 특징으로 된 산조의 기악곡을 말하기 때문에, 민요의 사례에 견주어 말한다면 육자배기토리로 권역화된 전라도지역의 무속음악, 다른 말로 하면 남도씻김굿 등이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산조라는 음악의 기원이 시나위로 대표되는 남도 무속음악에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심방곡(心方曲) 혹은 신방곡(神房曲)기원설을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방곡(신방곡)은 무속음악의 반주 음악과 다르다. 1610년 거문고 악보인 <양금신보>에 만대엽, 중대엽, 삭대엽 중의 중대엽에 속칭 '심방곡'이 나온다. 일반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알려진 '오나리 오나리소서 뫼일에 오나리소서/ 졈그디도 새디도 마르시고....'라는 가사가 그것이다. 또 안민영의 '금옥총부'(1885)에 '창원 기녀에게 가야금 신방곡을 청해 들었다'는 기록과 '퉁소 신방곡'이 언급되고 있다. 무속음악과는 상당히 다른 음악으로부터 산조가 발생했다는 증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유력하게 대두되었던 것이 판소리 기악화론이다. 판소리의 선율이나 장단을 모사하여 악기로 연주했다는 뜻이다. 판소리의 역사가 산조의 역사보다는 훨씬 오래되었으니 시대의 예술로 급성장했던 판소리를 모본 삼아 악기로 연주했다는 가설은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봉장취 기원설도 있다. 봉장취는 유랑예인들이었던 풍각쟁이들이 봉황 혹은 기러기 등의 새 한 쌍을 주제로 하여 음악을 곁들여 연행하는 일종의 재담 연주 혹은 그로부터 파생된 새소리를 주제로 하는 기악곡을 말한다. 봉장취는 '봉장추', '봉작취', '봉황곡' 등으로 불렸다. 판소리 <변강쇠가>에 '봉장추'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중국 한나라 이후 전해진 음악이라는데, '봉이 새끼를 거느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신재효의 <변강쇠가>에 따르면, 눈먼 '봉사'들이 구걸을 위해 연주하던 곡이었고 이것이 풍각쟁이들의 음악으로 정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오로지' 혹은 '반드시'라는 수식을 충족하지는 못한다. 연구자들에 따라서는 봉장취나 산조가 제각기 다른 역할을 하면서 병행 발전해왔다고 주장한다. 또한 계보론이나 지역론 특정 계파론 만으로는 산조의 기원이나 발생설을 충분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그럼에도 영암사람 김창조가 재구성한 초기 형태의 심방곡을 산조의 발생 시점으로 보는 견해는 아래 팁에 소개하는 것처럼 그 시대의 대표격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마치 판소리의 기원설을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일정한 텍스트나 인물을 거론하고 예컨대 영산강의 시원을 말하는데 황룡강, 극락강, 지석강의 여러 물줄기 중 담양 용소로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가야금산조 발생과 영암사람 악성(樂聖) 김창조 함화진(咸和鎭, 1884~1948, 일제강점기 아악사)의 <조선음악통론>(1948)에 보면, "신방초는 화초사거리를 창작하고 김창조는 심방곡을 변작(變作)하여 산조를 창작할새, 우조와 계면조로 분류하여 각종 악기에 탄주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김창조가 가야금으로 현재의 산조라는 음악을 재구성했음을 확인해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의 형태는 지금의 산조형식을 갖추었다기보다는 자유분방한 초기 형태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금산조가 19세기 중반 무렵에 심방곡으로 시작되었음을 확인해주는 자료는 안민영의 <금옥총부>(1885)가 대표적이다. 권도희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심방곡의 명인이 경상도 마산포에 살던 최치학이었다. 첫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들로 전남의 김창조, 한숙구, 유성천, 전북의 박한용, 이영채, 박한순, 충청의 박팔괘와 심정순 등을 거론한다. 이들이 동시대의 음악 형식을 정형화하는데 충분히 기여했다는 점이 여러 연구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후 김창조의 제자 한성기, 안기옥, 정남희, 강태홍, 최옥삼 등과 한숙구의 제자 한수동, 정남옥 등, 유성천의 제가 유대봉 등, 박한용의 제자 김삼태, 이영채의 제자 신관용, 박학순의 제자 신쾌동, 심정순의 제자 심상건 등과 더불어 김해선, 김운선, 함동정월 등 여성 산조 연주자들이 등장한다. 산조의 발생과 정형화에는 이같은 맥락들이 있기 때문에 '오로지' 김창조만이 산조를 재구성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김창조를 내세우는 것은 문헌들이 전하는 바를 전거하는 것이요, 시대적 수요에 부응했던 초기 기여자들의 대표격으로 거론하는 것이라는 점 부기해둔다. 김창조(1856~1919)의 출생설이 두 가지다. 1865년과 1856년설인데 여러 가지 맥락상 후자가 사실에 더 근접하다. 세습율객집안 출신으로 영암읍 회문리에서 출생했다. 1915년 경에 광주로 이주하여 활동하였고 1916년부터 전주로 옮겨 군산, 나주, 정읍, 대구 등지에서 활동한다. 64세 되던 1919년 인후염에 걸려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광주 북문안 어느 집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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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8)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기계 문명의 발전이 절정인 오늘날 문명 상황에서 무형유산은 인간의 삶과 더불어 호흡하고, 이 시대를 기록하고 발언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형유산 정신의 회복이지 않겠는가" 6년 전 무형문화재에 대한 논쟁을 이 지면에 다룬 적이 있다(2018. 8. 24). 원형과 전형 논쟁에 관한 것이었다. 오늘 그것을 다시 환기하는 이유는 그 이름이 명을 다해서라고나 할까. 규정한 법률에 의하면 세시풍속은 물론이거니와 기후 인식이나 갖은 관념들까지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담아내려고 한다.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한 1962년으로부터 지금까지 겪어 온 세월의 변화에 대한 반영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대개 원형(原型)과 원형(原形)은 일반인들이 전혀 구분하지 않고 쓴 용어다. 법률이든 관념이든 모두 의식의 본바탕 혹은 무의식의 근본이라는 의미로 범용하였기 때문이다. 통틀어 아키타이프(Archetype)라 했다. 인류가 공유하는 공통 경험의 집단 무의식이라는 뜻이다. 아키타입은 고정 불변하는 원형질이라는 의미이므로 이전에도 변하지 않았고 이후로도 변하지 않을 것을 이르는 말이다.무형문화재법으로 돌아가 생각해본다. 원형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한다는 규정은 잘못된 것이었음을 이미 법률이 증명했다. 아니 문화재라는 이름 자체가 그렇다. 다시 생각해보는 것은 무형문화유산의 특질은 생성하고 변화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다만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강제하여 그 형식과 내용을 붙잡아두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대상을 이렇게 규정해왔다.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은 특정한 시기의 형식, 형태나 내용에 대해 보존의 가치가 있다고 당대의 사회와 여러 전문가가 합의하여 그 형식과 내용을 붙잡아두는 것일 뿐이다." 물론 여기에는 전통과 전승을 기반 삼는 제 규정과 규칙들이 전제되어 있다. 2016년 3월 28일 무형문화재법(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을 따로 제정하면서 원형(原型)을 폐기하고 전형(典型)을 법률용어로 채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무형문화재법의 효용 상실과 문화분권시대의 과제어느 특정한 시기에 완성된(문화재보호법 제2조,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어 온 것) 형식과 형태 및 내용(典型)을 사회적 합의(전문가들의 심사)에 의해 국가와 지자체가 강제하여 보존하는 것이 무형문화재였다. 이 형식(혹은 형태)과 내용을 전형(典型)이라는 법률용어로 갈무리한 것이 문형문화재법의 분리 제정이다. 이로써 일정한 시기의 양식을 마치 고정불변의 원형처럼 오해하는 논쟁이 일단락되었다.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생성, 변화, 발전되는 무형문화유산의 특질에 제동을 걸어서도 안 되고, 마치 원형만을, 혹은 전형만을 국가가 강제하여 보호, 보존한다는 셈법도 변해왔다고 볼 수 있다. 기왕의 문화재는 문화재대로 보호, 보존, 계승하고, 전통에 기반한 제 문화유산들은 자유롭게 현대의 문화와 버무려질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다시 내 논의를 인용해둔다. 진짜민속(Folklore 혹은 Real Folklore)/가짜민속(Fake lore)논쟁이 한때 민속학계를 달군 적이 있다. 하지만 현 단계 페이크로어를 얘기하는 학자들은 많지 않다. 원형/전형 논쟁처럼 시의성도 없고 논점도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면 포크로어는 프로토타입(典型)에 해당되고 페이크로어는 포메이션 타입(造型) 혹은 게임 용어의 키노타입(Keno type)에 해당된다. 무형문화재법이 독립되고 전형이라는 용어를 법률화시키면서 원형/전형 논쟁 및 포크로어/페이크로어 논쟁은 일단락되었다고 봐야 한다. 다시 쟁점 삼으려면 내가 제시한 논의들을 반박하거나 새로운 개념, 새로운 해석을 들고나와야 가능하다. 내가 오래전부터 정리한 것은, 무형문화유산은 끊임없이 변해왔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특정하여 무형문화재로 지정한 것들이 전형(오리지널한 특질)의 지위를 갖게 되었고, 지정시기에 특정한(인정받은) 형식과 내용을 보존하는 것일 뿐이다. 무형문화재 제도의 국제적 배경과 제정 근거에 대해서는 본지의 지난 칼럼(2018. 11. 15)에 자세하게 소개해두었으니 참조 가능하다.문화융성에서 문화공명으로다시 명토 박아 둔다. 원형에서 전형으로 법률용어를 바꾼 지 오래다. 이 시점에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문화분권이다. 이제는 큰 그림 이른바 빅픽쳐를 그릴 때다. 무형문화유산이 우리 문화의 토대를 어떻게 구축하고, 남북의 문화적 통일 혹은 상생의 문제를 포함해 동아시아의 상생과 평화를 위해 어떤 비전으로 기능하는지를 끊임없이 되묻고 이 시대를 견인해가야 한다. "어제에 묻고 내일에 답하다". 수묵비엔날레 김상철 교수가 쓴 기획의 글을 무형유산에 적용해 풀어본 적이 있다. "무형문화유산은 인간의 삶은 물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사회, 인간과 시대에 대한 성찰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일종의 '정신'이다. 그러나 무형유산은 형식주의의 양식으로 전락하여 전형(典刑)을 답습하는 고루한 전통주의에 함몰됨으로써 본연의 가치를 망실하고 말았다. 그 결과 근대 이후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오늘의 침체와 부진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본연의 '정신'을 잃어버린 결과라 할 것이다. 기계문명의 발전이 절정에 이른 오늘날 문명 상황에서 무형유산은 여하히 인간의 삶과 더불어 호흡하고, 이 시대를 기록하고 발언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형유산 정신의 회복이지 않겠는가." 문화유산과 문화융성에서 문화창의로문화재라는 개념에서 문화유산으로 개념이 확대되었다. 문화재의 활용은 문화콘텐츠라는 이름으로 호명해왔다. 근대문화재니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니 혹은 자연유산, 세계유산, 축제유산 등의 다종다양한 이름과 개념들이 등장하였다. 기왕의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이를 다 담아내기는 역부족이다. 하지만 국가행정, 지방행정 모두 부처 간 이견이나 갈등으로 이를 풀어내지 못한다. 내가 시간 날 때마다 주장하는 얘기다. 우리나라 민속 문화 기반 의례음악의 연행을 '울린다'고 표현한다. 무엇을 울린다는 것일까? 마당을 밟으니 땅을 울리는 것이요 북장고와 꽹과리, 징으로 울리니 공중을 울리는 것이다. 곧 하늘을 울리는 것이므로 공중을 나는 새와 들짐승까지도 울림의 영역에 포함된다. 울림의 파장들은 상하좌우를 가리지 않고 침윤하여 본디 가진 메시지들을 전한다. 이들 의례음악을 굳이 '울린다'라고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 울림이 공명(共鳴)이기 때문이다. 한자말 공명(共鳴)은 우리말 '울림'의 다른 말이다. 의례음악의 울리는 기능이 공명의 세계를 도모하는 데 있다는 뜻이다. 이미 BTS가 세계의 음악을 흔들고 있다. 하지만 경제와 문화 전반이 세계적 위상에 오르고 있는데도 정작 우리는 그만한 권위를 주장하거나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따위의 자족이 아니라 적어도 동아시아, 아니 세계 무대에 우리 문화의 오리지널한 특장과 의미를 설명해줄 필요가 있는데 말이다. 지난 칼럼에서 문화재청을 문화창의청 아니 문화창의부로 승격시키고 도래하는 문화융성의 시대를 대비하자고 주장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뿌리 없는 나무가 어디 있고 가지 없는 열매가 어디 있겠는가. 용비어천가 들머리를 다시 생각해본다.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할 새 꽃 많이 피고 열매가 많이 맺을 것이니. 그렇다. 저기 저만치 우리의 문화유산에 기반한 문화융성, 문화공명의 시대가 온다. 이를 창발할 준비가 필요하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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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7)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덤벙분청'에 대한 변명||"이 지역 정치인들은 밖으로만 광주정신과 ||시대정신을 모방할 뿐 안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라의 안위를 위해 ||표를 보여준 것이 아니다. 다시 역사를 ||상고해보라. 남도사람들이 어디 단 한번||이라도 불의와 타협하거나 표를 몰아준 일이 있는가" 얼른 생각하기에는 신분도 높고 지혜도 뛰어난 오키의 도공들이 만든 품위 있는 다기가 훨씬 뛰어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의 잡기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역시 결과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낳게 한 원인과 과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데서 오는 패배일 것이다. 즉 밖으로만 모방할 뿐 안으로부터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것이다.새삼스럽게 조선인처럼 가난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고 또한 잡기를 만들 필요도 없다. 그러나 맛에 사로잡힌 부자유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참된 것은 태어나지 않는다. 아직은 조작이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애의 상태에서는 더더구나 거리가 멀다. 조선인의 장점을 이은 선어(禪語)를 빌려 말한다면, 지미(只縻)의 경지에서 만들었다는 점에 있으며, 맛에 매달려 궁색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이것이 미묘한 갈림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가 '조선과 그 예술'에서 말한 내용 일부다. 졸저 '무안만에서 처음 시작된 것들'(다할미디어, 2022)의 한 챕터에서 이를 베껴둔 것은, 우리의 분청사기를 가장 적절하게 설명 혹은 해명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과감한 생략과 절제, 무욕과 해탈, 여백의 미를 톺아내는 것이 달마도의 회화며 분청의 세계가 어찌 다를 것인가. 작위적인 기교가 없으니 도교적 세계관과 통하는 것이요, 무욕의 심미안을 표상했으니 불교적 맥락과 통하는 것이라 했다.불교의 공(空), 도교 자유의지의 표현 말이다. 이 심미관이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한 양식으로 분청에 표현되었으니 그 웅숭깊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오래전 내가 야나기무네요시 생가를 꾸며 만든 민예박물관을 찾았을 때 놀란 이유이기도 하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가면 현관 가운데 딱 한 개의 옹기만 놔두었다. 남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질그릇, 그것도 약간 비대칭인 투박한 항아리 말이다. 무안분청(광주,전남을 포괄하는 호명 방식)의 기능을 배태한 무안만(내가 새롭게 구상한 영산강과 인근 바다의 다른 이름) 유역의 흙과 불과 땔감과 무엇보다 이 예술적 미감을 표현해낸 남도 사람들을 상고해보면, 양반예술과 대비되는 서민예술의 그윽함을 추적해볼 수 있다. 이것은 무안만 사람들의 생태적이고 호방한 세계관과 지향 속에서 생성된 것들이다. 내 식으로 말하면 남도 풍류와 남도 미학의 발흥이다. 영암의 도기와 해남의 초기청자, 강진의 자기에서 무안만의 분청까지, 남도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옹관까지 거슬러 오르는 장대한 줄기, 그 속에서 발현되는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정신 말이다.덤벙분청의 세계분청사기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학자들이 미시마(三島)라고 부르던 용어를 번역한 것이다. 고유섭(1905~1944)이 잡지 '조광(朝光)' 1941년 10월호에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라고 언급하며 분청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분청의 기법은 화장토(clay slip)를 도자기에 바른 후에 장식하는 기법이다. 6세기 중국의 월주요(越州窯)에서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세종 이후에는 국가에 진상하는 공납용으로 제작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전국에 자기소 139개, 도기소 185개에서 대부분 분청사기를 생산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에 이해 분청의 기술이 일본에 소개된다. 16세기 이후 야마노우에 소지(山上宗二)가 조선의 분청다완(찻그릇)을 천하제일이라고 평한 것은, 이전 칼럼에서 소개한 바와 같다. 분청의 기법은 상감, 인화, 박지, 철화, 조화, 덤벙, 귀얄 등이다. 이중 무안만에서 가장 선호했던 기법이 덤벙과 귀얄문이다. 지면상 고(古)덤벙에 대해서만 간략히 소개해둔다. 더 자세한 얘기는 졸저를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덤벙 채식(彩飾)은 도자기 장식에서 백색이나 색깔이 있는 흙물에 도자기를 덤벙 담갔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물에 어떤 무거운 물건이 떨어지며 내는 소리다. 텀벙, 덤버덩, 덤벙, 덤벙덤벙, 덤버덩덤버덩, 담방 등의 용례가 있다. 하지만 들뜬 행동으로 아무 일에나 자꾸 함부로 서둘러 뛰어든다는 뉘앙스의 '덤벙'이란 의미로 읽는 것은 단견이다. 담방담방이나 담방은 작고 가벼운 물건이 물에 떨어져 잠기는 소리를 말한다.둥덩둥덩이나 동당동당과 같은 말이다. 남도민요 둥덩애타령이란 호명이 여기서 나왔다. 옹기 옴박지에 물을 절반쯤 채우고 박으로 만든 바가지를 엎어 손으로 두드리면 동당동당 혹은 둥덩둥덩 하는 타악기 소리가 난다. 이를 '옴박지 장단'이라고 하고 특히 여인네들이 유희놀음을 할 때 이를 악기 삼아 노래했기에 '둥덩애타령'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덤벙은 '연못'의 방언이기도 하다. '웅덩이'를 '둠벙'이라고 하는 것도 이와 같다. 둠벙과 덤벙의 어원이 같다. 따라서 덤벙채색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이 덤벙댄다는 뜻이 아니라, 보다 생태적이고 고풍스런 뉘앙스다. 예컨대 '덤벙주초'는 돌을 다듬지 않고 건물의 기둥 밑에 두는 주춧돌을 말한다. 다듬지 않아서 거칠지만 그 질감이 주는 친자연적인 미감에 의미를 두는 시선이다. 야마다가 무안의 분청을 황실의 국보로 찬양하고 야나기가 조선의 옹기와 도자기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귄대가리의 정체지난 칼럼에서 나는 거시기 연대기를 말하며 귄의 정체를 해명했다. 남도사람들의 압도적인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대선 결과가 다른 것을 변명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 지역에서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걸고 글을 쓰는 땔나무꾼으로서, 적어도 누군가는 이 흐름에 대한 해명을 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일종의 팬덤이었나? 생각 없이 덤벙대는 우둔한 자들이어서인가? 잘못된 행위를 극구 우김질하자는 게 아니다. 역사이래 거시기를 공유해온 사람들의 더불어 울림(共鳴)을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지난 수 세기 동안 죽음의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남도로 또 남도로 향했는가를, 또한 남도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을 수용하며 슬픔을 삭여냈는가를 말이다. 그래서다. 오늘 분청의 사례를 들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역시 결과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낳게 한 원인과 과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데서 오는 패배감에 대한 것이다. 두렵고 화가 나는 것은, 현 집권당 특히 남도지역 정치인들의 반성 없는 태도와 안이한 처신이다. 남도사람들의 압도적인 지지율을 당파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다. 나라의 안위를 위해 표를 준 것이지 당신들의 안위를 위해 표를 준 것이 아니다. 이 지역 정치인들은 밖으로만 광주정신과 시대정신을 모방할 뿐 안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시 역사를 상고해보라. 남도사람들이 어디 단 한 번이라도 불의와 타협하거나 표를 몰아준 일이 있는가. 일본인들처럼 맛에 매달려 궁색하게 만들지도 않고 헛되이 치장하지도 않는다. 단 한 표 차로 졌어도 진 것은 진 것이다. 이것이 게임의 원칙이다. 나중 호모루덴스 곧 놀이하는 인간을 소개할 예정이지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는 것이 옳다. 요한호이징하는 그래서 종교와 전쟁도 놀이라고 했을 것이다. 경기에서 졌으면 '졌잘싸'로 변명하지 말고 협력하는 것이 정도다. 지금은 그것이 나라의 안위를 위해 할 일이다. 야나기에 비유컨대 여기가 미묘한 갈림길일까? 남도의 일당 정치인들에게 경고해둔다. 거시기의 연대를 몰상식하게 폄훼하면 나부터라도 가만있지 않겠다. 나는 여전히 믿는다. 나라의 의를 위해 떨쳐 일어나고 시대정신을 견인해 나온 남도사람들의 시대정신과 귄진 감각을.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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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6)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초의와 차선고도 남도의 물길 따라 교우했을 옛 연인의 터에 앉아 그윽한 차향 맡는 것 어쩌면 내게 주어진 과분한 소확행일지 모르겠다 연하(烟霞)가 난몰(難沒)하는 옛 인연의 터에/ 중 살림 할 만큼 몇 칸 집을 지었네 못을 파서 달이 비치게 하고/ 간짓대 이어 백운천(白雲泉)을 얻었으며 다시 좋은 향과 약을 캐나니/ 때로 원기(圓機)로써 묘련(妙蓮)을 펴며 눈앞을 가린 꽃가지를 잘라버리니/ 좋은 산이 석양 노을에 저리도 많은 것을. 초의선사가 일지암을 짓고 지은 시라 한다. 일지암을 아는 사람들은 이 시가 형용하고 있는 풍경을 금방 떠올릴 수 있다. 짙은 운무 출몰하는 비경과 초암에 앉아 차 한잔하는 즐거움이 보이지 않는가. 대흥사 일지암이 지금은 운용의 묘를 살린 탓인지 여러 채의 절간들이 들어서 있지만, 그 중심은 예나 지금이나 초암 곧 일지암에 있다.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각양의 인사들과의 교류가 낳은 총화라고나 할까. 여기에 초기 카톨릭의 숨겨진 영향까지 거론한다면 불선(佛禪)을 넘어선 유불선기(儒佛仙基)를 거론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초의는 본래 무안(당시에는 나주에 속함) 삼향 사람이다. 지금은 삼향에 초의기념관이 들어서 있고, 용운스님의 노력으로 일지암도 재현해두었다. 어떤 인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또한 이곳에 터를 잡고 주경야독하는 중이다. 나는 곧 출판되는 졸저에서, 무안만(남도만과 무안만에 대해서는 본 칼럼에 여러 차례 소개하였다)의 차와 이를 재구성할 차선고도(茶船古道)를 상정하고 '고양의 길'이라는 표제를 붙여 두었다. 불교 중심으로 차 문화가 확장되었고, 스님들 중심으로 차 생활이 보편화 된 것도 어찌 보면 스스로를 고양하는 첨단의 콘텐츠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세간에 차와 명상, 힐링, 수련, 영성 등의 조합을 이룬 다종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추사가 남긴 명선(茗禪)이라는 글씨가 그 행간에 있다. 추사가 초의에게 지어준 호이기도 하다. 대개 이를 '차를 마시며 선정(禪定)에 든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문자 그대로 명(茗)은 차의 싹을 말하는 것이니 차를 마시며 선을 행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구체적인 차선고도의 루트나 프로그램을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차가 명상이나 요가, 이른바 마음수련에 있어 최고의 콘텐츠라는 생각은 부기해 둔다. 정민 교수의 작업에 기대어 차선고도(茶船古道)를 상상하다 중국에서 한해륙에 이르는 이른바 뱃길을 전제해본다. 초의에 앞선 차문화 정리의 맥락이기도 할 것이다. 정민이 쓴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글항아리, 2018)는 차선고도를 설정하는 데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지면상 몇 가지만 인용해 공부자료로 삼는다. "18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의 해금 정책이 풀리자 중국의 서남해안에서 북상하는 뱃길이 열렸다. 배를 통한 물류의 이동이 빈번해지면서 서남 연안에 중국 상선의 표착이 부쩍 늘어났다. 특별히 1760년 서해안에 표착한 중국 배에는 황차(黃茶)가 가득 실려있었다." 또 이덕리의 '기다' 중 '다설' 제3조에 남은 기록을 보고하고 있다. "경진년(1760, 영조36)에 차 파는 상선이 와서 온 나라가 그제야 차의 생김새를 처음으로 알았다. 이후 10년간 실컷 먹고 떨어진 것이 하마 오래되었는데도 또한 채취해서 쓸 줄은 모른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 사람에게 차는 그다지 긴요한 물건이 아니어서 있고 없고를 따질 것이 못 됨이 분명하다. 비록 물건을 죄다 취한다 해도 이익을 독점한다는 혐의는 없을 것이다." 정민은 이외에도 박제가의 '북학의'를 인용하며 1760년에 왔다는 표류선의 존재를 보고하고 있다. 황차와 관련된 내용이다. 지면상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관심 있는 분들은, 1762년 11월 7일자 '승정원일기'에 등장하는 표류선 기사를 참고해도 좋다. 정민은 사흘 뒤인 11월 12일자 '승정원일기'를 인용하며 중국 표류인들이 가져온 황차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표류선 관련 기록에서 황차가 등장하는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 고군산진에 표착한 절강 상인의 배에 황차엽이 대량으로 실려있었고 당시 금주령 상태에 있던 조선에서 이 황차는 제사 때 쓰는 제주(祭酒) 대신으로 각광을 받아 수요가 갑작스럽게 급증하게 되었던 사정이 짐작된다." 이 시기 중국 남쪽 배들의 서남해안 표착이 상당히 빈번해지기 시작했고 금주령 하의 시대 상황과 맞물려 황차가 특수를 누리면서 비로소 차의 존재가 조선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초의의 차를 가까이하게 된 것도 이런 시대적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초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덕리를 공부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민의 연구들을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다. 초의 이전의 이덕리에 대한 정보는 정민이 거의 유일하고도 상세하게 연구해놓았기 때문이다. 차마고도에서 차선고도까지 주지하듯이 차마고도(茶馬古道, Ancient Tea Route/ Southern Silk Road)는 비단길보다 먼저 생긴 무역로이다. 중국의 윈난성, 쓰촨성에서 시작된다. 티베트, 인도, 파키스탄 등지를 거쳐 실크로드로 이어진다.위키사전의 설명을 빌리면, 마방(馬幇)이라 불리는 상인들이 말과 야크를 이용해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서로 사고팔기 위해 지나다닌 길이다. 차와 말만 사고팔았겠는가. 당연히 이곳을 통해 문화의 교류가 활발해 졌음을 알 수 있다. 전성기에는 유럽까지 연결되기도 했다. 해발고도 4000미터가 넘는 험준하고 가파른 길이지만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길로도 유명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2007년 KBS에서 6편으로 구성한 차마고도에 관한 다큐멘터리 '인사이트 아시아-차마고도'부터이다. 나도 여러 차례 윈난지역을 방문하여 관련 정보들을 갈무리한 적이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무역로라고 추정하는 길이기도 하다. 차선고도(茶船古道)는 이에 착안한 것이다. 광의의 차선고도는 멀리 중국으로부터 뱃길을 통해 우리와 연결된 항로 혹은 차도(茶道)를 말하는 것이고, 협의의 차선고도는 초의선사의 생가인 현 무안군 삼향읍 왕산리 혹은 신기마을에서 출발하여, 어린 나이에 출가한 나주의 운흥사로, 다시 평생을 보낸 해남 대흥사의 일지암까지 이어지는 길, 나아가 강진, 보성, 하동 등을 연결해본 것이다. 지금은 뱃길이 막혀있지만, 물골이 있던 때를 상상하여 이 루트를 재구성한다면 틀림없이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초의선사 생가 아래 오두막 하나 짓고 살면서 차에 대해 상고해나가는 중이다. 아마 초의선사가 고금의 중매역할을 하였던 것 같다. 기회가 되면 소개하겠지만 차는 분청사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찍이 일본인들이 국보급 예우를 했던 분청사기는 사실 남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생활 용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리보다 먼저 이들이 분청이 가진 미학에 주목하였고 끝내 일본 최고의 다기로 대접하기에 이르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차나무에 귀를 대고 들으니 곧 새싹이 올라올 듯하다. 아, 봄이로구나. 올해는 보다 어린잎을 따서 황차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남도의 물길 따라 교우했을 옛 인연의 터에 앉아 그윽한 차향 맡는 것, 어쩌면 내게 주어진 과분한 소확행인지도 모르겠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대선이 끝났다. 승자에게는 축하의 차 한 잔, 패자에게는 위로의 차 한 잔 건넨다. 승자는 승자대로 패자는 패자대로 역할이 있을 것이다. 혐오와 배제는 저만치 던져버리고 오직 나라의 융성을 도모하는 데 힘을 합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라 생각한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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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5)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문화강국의 조건은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한류와 K-컬처를 김구의 주문에 기대어 제대로 해석하는 것이 문화로 행복한 문화강국의 문을 열어젖히는 길일 것이다. 문화강국 얘기가 나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문화가 기반이 되고 돈이 되는 강한 나라라는 뜻으로 채택한 용어일 텐데, 비전이나 전략이 명료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지금껏 강국이라는 용어 앞에 붙였던 접두어만 해도 수십 종에 이르지 않겠나. 경제 강국, 글로벌 강국, 녹색 강국, 해양강국 등 균분할 수 없는 크고 작은 접두어를 남발해왔기 때문이다. 아마 김대중 정부시절 지식정보 강국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이래, 벤처 강국이니 문화콘텐츠 강국이니 따위의 용어로 확산한 것 아닌가 싶다. 노무현정부 때 문화강국 이야기가 회자되더니, 이명박정부 때 세계 속의 문화강국, 박근혜정부 때 창조경제와 문화융성 기반의 문화강국이란 용어를 사용해온 것 같다. 현재 중국에서 화두 삼고 있는 정치강국, 군사강국, 경제강국 등과 비슷한 취지일까? 문화강국이란 표어는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의 부록 '나의 소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화입국론 혹은 문화강국론이라 한다. 너무도 유명한 그의 언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백범일지'를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방식으로 윤문한 이가 춘원 이광수라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방민호는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와 이광수 '윤문'의 의미"(춘원연구학보, 2020. 4)에서, 이광수가 가필하거나 심지어 창작한 맥락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물론 춘원의 뜻이 가필되어 있을지라도, 문화 국력을 강조했던 백범의 포괄적 취지가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환기하고 싶은 것은 여기서 예시했던 문화의 힘, 다시 말해 문화강국의 조건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한류와 K-컬처, 문화강국의 위상 한류(韓流/Korean Wave)는 한국의 대중문화가 외국에서 유행하는 현상이라 뜻이다. '한국문화의 물결'이다. 1999년 문화관광부에서 대중음악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한류-Song from Korea>가 최초라 한다. 하지만 대중음악보다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전역에 출렁였던 물결은 한국 드라마였다. 나도 1990년대 말기부터 아시아의 오지 답사를 많이 다녔는데, 중국 일본을 넘어 심지어 동남아시아 시골구석에서도 작은 TV에 코를 박고 한류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드라마와 영화는 물론, K-KOP으로 호명되는 대중음악, 게임, 음식, 관광, 패션, 화장품, 디지털 분야 등에 광범위하게 걸쳐있다. 최근에는 '강남스타일'에서부터 BTS의 빌보드 석권, 영화 오징어게임 등으로 세계 무대의 정점을 찍고 있다. 하지만 수많은 분석이 행해지고 있으나 그 이유를 온전하게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K-컬처라는 호명의 범주를 넘어서는 현상이나 개념들에 대해 어떻게 논의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문화강국'이 각 장르의 접두어를 '강국' 앞에 붙이는 방식이라면, 'K-컬처'는 K-헤리티지 K반도체전략 등 접미어를 붙이는 방식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것의 기반이 되는 전통문화다. 2021년 9월 한 달 동안 문체부가 우리나라 등 세계 24개국 만2천500명을 대상으로 행한 온라인 조사에 의하면, 한국에 대한 관심을 묻는 8개 문항 가운데 가장 응답을 많이 받은 항목이 '한국 전통문화 체험 희망(83.4%)이었다. 그래서다. 전통문화 기반의 문화강국이라는 위상은 무엇일까? 오징어게임과 자살공화국의 함수 K-컬처 물결 중에서 이즈음 가장 뜨거운 종목이 영화 오징어게임이다. 문화란에는 천편일률 오징어게임의 성과를 찬양하거나 그 이익의 분배 이야기가 도배된다. 심지어 국가 문화정책의 중요한 설계에 인용되기도 하고 기저(뿌리)로 삼기도 한다. 관련한 지원이나 교육, 이익분담 시스템의 재구성 논의가 그것이다. 이 방향이 옳은 것일까? 2021년 말 BBC 뉴스에 '오징어게임에 드러난 한국의 현실'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넷플릭스 사상 최고 인기 콘텐츠가 된 오징어게임이 사실은 한국사회의 복잡성에 대한 통찰력을 100여 개 외부 나라에 알렸다는 것이 요지다. 여성 혐오와 빈곤, 이주노동자와 탈북자, 정경유착 비리 및 한중관계 등이 거론되었다. 지금의 정치 지형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혐오와 배제, 극단과 척결, 마치 오징어게임의 생존투쟁을 닮았다. 아니, 한국의 현실을 오징어게임이 대변해준 것 아닌가. BTS와 오징어게임의 그늘을 주목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 20여 년간 OECD 자살률 부동의 1위다. 잠시 상위에서 밀려나는 듯하지만 20대 여성 10대 남성의 자살률은 오히려 가파르다. KOSIS에서 내놓는 통계를 보면 참담할 지경이다. 방송들이 앞다투어 심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수많은 분석이 쏟아져 나오지만 자살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찌 오징어게임을 한국의 현실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혐과 이대남, 페미와 남혐이라는 혐오방식, 정적을 척결해야 하는 극단주의적 정치, 일등 아니면 모두 죽임당하는 게임방식이, 지난 1세기 아니 수천 세기 이름도 빛도 없는 민중들이 피 흘리고 땀 흘려 만든 이 나라의 결과물이란 말인가? 호혜와 공생, 연대의 대동 세상을 꿈꾸고 가꾸어 온 수많은 생각과 방식들, 내 방식대로 말하면 법고창신의 토대가 되는 전통문화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영화의 내용이 단지 비극이라는 문학의 장치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통절한 현실비판 앞에 그럴 수가 없다. 하지만 요한호이징하가 말했던 호모루덴스 곧 유희하는 인간의 본질이 극단의 일등주의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것만큼은 환기하고 싶다. 그가 종교와 전쟁마저 놀이의 범주에 포괄했던 것은, 게임이라는 경쟁으로 호혜 상생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인간(人間)이란 말 자체가 네트워크의 존재라는 뜻 아닌가. 궈차오(國潮)강국론과 한류 문화강국론 이즈음 새로 생긴 조어로 중국의 궈차오(國潮)가 있다. 한류와는 다르게 자국 중심소비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인들의 소비 능력이 향상되는 과정에서 내수시장 마케팅에 성공한 사례다. 이 안에는 문화제국주의, 문화강대국이라는 함의가 들어 있다. 한류와 궈차오, 상반된 듯한 두 물결을 주목한다. 군사강국, 경제강국 등 국력이 강하다는 뜻의 문화강대국일까. 아니면 국제사회에서 그 세력을 인정하는 나라라는 뜻의 문화강국일까. 예컨대 군사력이 강한 러시아와 그 반대인 우크라이나 중 어디가 문화강국일까? 자발적인 내수경제 강제와 자국상품에 대한 애호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그래서다. 중국의 궈차오는 한류와 문화강국이라는 표어를 콘텐츠 강국이나 수출 위주 문화정책의 기저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거울이다. 오징어게임의 성과는 성과대로 민간의 자율에 맡기고 자살률 극복부터 설계하는 것이 진정한 문화강국의 정책이라는 반면교사이지 않을까? 며칠 후 대통령선거가 있다. 극단적 혐오와 배제를 앞세우고 국민을 갈라치는 극단끼리의 공생방식은 이제 그쳐야 한다. "세계 인류가 네오 내오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오,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중략). 완전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김구가 말한 '나의 소원'이자 문화강국의 조건이다. 지난 1세기 피와 땀으로 재건한 나라, 한류와 K-컬처를 김구의 주문에 기대어 제대로 해석하는 것이 문화로 행복한 문화강국의 문을 열어젖히는 길일 것이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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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4)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고려뱃길 시험탐사 남북한 단절, 섬 분쟁 등 국제적 대립을 풀어내는 절묘한 콘텐츠 될 것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본격적인 탐사를 통해||더욱 선명해지길 기대 흑수양(黑水洋)은 북쪽 바다이다. 점점 깊숙이 들어갈수록 물빛은 진한 먹처럼 검은색이었다. 갑자기 그것을 보면 정신과 담력을 모두 잃게 된다. 성난 파도가 뿜어내는 것이 우뚝 솟은 만산과 같고, 밤이 되면 파도 사이가 불처럼 밝게 빛난다. 배가 파도 위로 올라갈 때는 바다가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오직 밝은 해만 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배가 내려가 파도 밑에 있을 때 전후의 수세를 바라보면 높이 하늘을 가리며 위장이 뒤집히고, 헐떡거리는 숨만이 겨우 남아있어 쓰러져 구토하고, 먹은 음식(粒)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요 위에 피곤해 누워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사방을 높이 올려 구유(槽)와 같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울어져 이리저리 굴러 몸을 다치게 된다. 이 때에 몸이 만 번 죽을 수 있는 고비에서 벗어나길 바라니, 위험하다 할 만하다. 서긍의 <고려도경> 권34 흑수양 편의 내용이다. 이미 해려초, 봉래산, 반양초, 백수양, 황수양을 건너 온 터다. 서긍은 서기 1123년 3월 14일 개봉을 출발하여 소주, 항주, 월주, 명주를 거쳐 정해현에 닿는다. 지금의 절강성 주산군도다. 5월 26일에 주산군도 심가문 항을 출발하여 6월 2일 도착한 곳이 협계산(夾界山)이다. 대개 학자들은 이곳을 지금의 가거도로 비정한다. 과연 그러할까? 지난해 가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서긍의 고려뱃길 시험탐사(단장 진호신 연구관)를 했다. 한해륙의 끝자락 가거도 남단에서 지금의 신안군 재원도까지 서긍의 바닷길을 재현한 것이다. 옛 형태 그대로 재현한 조선통신사선이 천년의 바닷길을 가로지르는 시험탐사에 나도 같이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가능한 한 당시의 항로를 추적하려 했고, 배의 속도 또한 그에 맞추려 했다. 삼일 밤낮의 시험탐사는 대성공이었다. 통신사선 및 여러 척의 전통선박을 재현하여 만들고 고대의 항로를 끊임없이 탐구한 홍순재 연구사의 노력이 거둔 성과이기도 했다. 큰바다의 너울 파도가 심한 멀미를 선물 해주었지만, 정신력과 담력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고대의 뱃길을 당시의 환경 그대로 재현한다는 기대가 오히려 파도를 넘고 역사를 넘어 천년 아니 수만년 세월을 횡단하는 듯했다. 서긍이 표현한 흑수양(검은 바다)을 추적해 올라가면 적도 상간의 흑조(크로시오 해류)에 닿는다. 거대한 흑조의 본류는 일본의 동쪽을 지나 태평양으로 순환하지만 그 지류들이 황해로 스며들고 이내 한해륙에 닿는다. 그 첫발이 협계산이다. 한해륙의 서남단 기점이 되는 곳이다. 양쯔강 하구에서 올라올 때는 백수양, 황수양 등 물색이 달라지지만, 흑조의 지류를 타고 오르면 흑산(黑山)에 이르도록 물빛은 여전히 검다. 흑조(黑潮)에서 비롯되었으니 흑산도요, 한해륙에 첫발을 내딛으니 노둣돌이다. 내가 산경표를 뒤집어 해경표로 읽어내고 한해륙 5대 물골론을 주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서긍이 말했던 협계산이 과연 지금의 가거도인가이다. <고려도경> 권35 첫 대목을 다시 인용한다. 6월 1일 임오일 해 뜰 무렵, 안개가 자욱한데 배는 동남풍을 탔다. 오전 10시쯤(巳刻) 조금 개였고 바람이 서남풍으로 바뀌어 야호범(野狐颿)을 더 보탰다. 정오에 바람이 사나워져서 첫째 배의 큰 돛대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휘어져 부러지려고 하자, 급히 큰 나무를 덧대어 붙여 온전하게 넘어갔다. 오후 3시가 다되어(未後) 동북쪽 하늘 끝을 바라보니 구름같이 은은한 것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가리켜 반탁가산(半托伽山)이라고 하였으나 그리 분명하게 구별할 수 없었다. 밤이 되자 바람이 약해 배가 매우 느리게 움직였다. 2일 계미일 아침 안개가 자욱하고 서남풍이 불다가 오후 3시가 다 되어 맑게 갰다. 정동(正東)쪽으로 병풍 같은 산이 하나가 보이는데 그것이 협계산이다. 중국과 오랑캐는 이 산으로 경계를 삼는다. 처음 바라볼 때는 희미했으나, 오후 7시가 다 되어(酉後) 가까이 다가가니 앞에 두 개의 봉우리가 있다. 이를 쌍계산(雙髻山)이라고 부른다. 뒤에는 작은 암초 수십개가 있는데 달리는 말의 형상이다. 눈(雪)같은 물결을 거세게 뿜는데, 그것이 산을 만나면 더욱 높게 튀어 오른다. 오후 11시에서 오전 1시 사이(丙後)에 바람이 세지고 비가 와서 돛을 내리고 뜸(蓬)을 걷어 그 기세를 늦추었다. <고려도경>에는 서남해에서 서해 끝자락에 이르는 수많은 섬과 바다의 이름이 나온다. 반탁가산, 협계산, 쌍계산, 말 달리는 듯한 여(嶼)등 수수께끼 같은 이름들이다. 이곳이 지금의 어디일까? 숱한 연구자들이 이를 밝히고 여러 권의 단행본까지 출판하였지만, 다 확정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바람과 날씨, 조류와 해류 등의 특성을 무시한 채 탁상연구로 내린 결론들도 많다. 탐사에 동행하였던 변남주 박사는 만재도와 가거도를 견주어 살펴야 협계산을 제대로 특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바닷길이 직선이 아닌 곡선 혹은 지그재그로 나 있으며 바람과 날씨의 영향으로 뒤바뀌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부터 진정한 연구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최초로 시행한 고려뱃길 시험탐사의 의미가 그만큼 막중하다는 뜻일 것이다. 단순히 천년전 중국사신 서긍의 뱃길을 재현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절강성 주산군도의 심가문 항구에서 북한 개경에 이르는 뱃길을 재현하고, 일본의 세토내해를 거슬러 교토와 나라에 이르는 뱃길을 재현하는 의미들 말이다. 여기에는 천년 혹은 더 이전의 조상들이 내왕했을 역사와 장차 내왕할 동아시아 네트워크의 비전이 숨어 있다. 남북한의 단절, 섬 분쟁 등 국제적 대립을 풀어내는 절묘한 콘텐츠라는 점에서 이 사안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서긍은 중국과 오랑캐의 경계라고 표현했지만, 한해륙의 서남해 기점을 이 언저리로 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협계산을 특정하는 것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본격적인 탐사를 통해 더욱 선명해지리라 본다. 옛 섬 이름 하나하나 톺아가며 설명할 날을 기다린다. 흑수양(黑水洋)의 노둣돌, 이어초에서 가거초까지 천년 전 <고려도경>에서는 협계산(가거도로 추정)을 중국과의 기점으로 말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이미 이어초(2003년)와 가거초(2009년)를 건설하여 국경의 기점으로 삼고 있다. 우리 국토로부터 가장 먼 이어초는 거꾸로 말하면 흑조로부터 들어오는 첫 디딤돌이다. 이어도 최고봉(최남단 마라도에서 149Km)에서 남쪽 약 700미터 떨어진 곳(동경 125도 10분 56.0초, 북위 32도 07분 22.0초)이다. 수심 40미터 지점 수중 암초다. 제주도의 해녀노젓는 소리로 알려져있는 '이여도사나소리'는 'ᄌᆞᆷ녀 네 젓는 소리'라고도 한다. 주목할 것은 일본의 아마(あま)를 포함해 해녀(海女)가 우리나라에 특화된 특별한 존재라는 점이다. 2016년에 유네스코 무형유산에 등재된 것도 이런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후렴에 나오는 '이여도 사나'에서 언급한 섬(嶼)이 바로 이어도다. 제주도를 포함한 남도(南島) 무레꾼(해녀의 남도 호칭)들의 이상향 혹은 관념 세계를 넘어 실효적 지배를 정당화해주는 중요한 무형유산이기도 하다. 가거초는 가거도에서 서쪽으로 47Km(동경 124도 35분 44초, 북위 33도 56분 20초)에 위치하고 있다. 일본은 독도를, 중국은 이어초나 가거초를 EEZ(배타적 경제수역)분쟁지역으로 삼으려 하지만 유사 이래 우리가 실효지배를 하고 있다는 점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라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고려뱃길 탐사와 연구가 더욱 중요하다는 점 명토박아 둔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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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3)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용과 용둠벙"용 같지 않은 용은 때려잡고,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아픔을 다듬어주며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는 그런 철학을 가진 이들을 마땅히 등용시켜야 진정한 용의 해일 것이다. ” 지난 설날 광주교통방송 아침 인터뷰를 했다. 올해가 갑진년(甲辰年) 청룡의 해이니 남도의 용을 설명해 달라는 취지였다. 갑진년 양력설 본 지면에 ‘용보다 소사 아저씨’라는 제목으로 남도의 용을 소개한 바 있는데 종종 질문해오는 사람들이 계시기에 답변 삼아 다시 언급한다. 갑진(甲辰)은 60갑자 중 하나다. 우리 조상님네들은 세상의 주기를 60년으로 계산했다. 하늘의 수 천간(天干) 즉 10간과 땅의 수 지지(地支) 즉, 12지를 서로 교직시켜서 최소공배수인 60을 만들었다. 갑자년, 을축년 등으로 조합해 열 번이 끝나면 10간의 첫째를 12지의 열한 번째부터 조합해 순환하는 방식이다. 갑진년(甲辰年)의 갑(甲)이 육십갑자 41번째인 푸른색을 뜻하고, 땅의 수 진(辰)은 용을 뜻하기에 청룡의 해라고 한다. 하지만 모든 용이 청색인 것은 아니다. 동서남북 방위를 설정할 때 동쪽을 담당하기에 그리 구분하는 것이지, 우리 사상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오행(五行)의 중심은 오히려 황룡(黃龍)이다. 용 자체가 상상 속의 캐릭터라 어떤 근원으로부터 변화하면서 생성되어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용은 존재한다. 인간 욕망의 투사물이라고 볼 수 있다. 서양에서는 용(龍)을 dragon으로 번역하고, 동양에서는 dragon을 용(龍)으로 번역한다. 서양에서는 용을 악마화하고 동양권에서는 용을 최고의 권좌, 가장 권위 높은 캐릭터로 상정한다. 용을 바라보는 시선이 극단적이다. 힌두교의 나가(Naga)도 용이다. 코브라처럼 생긴 뱀의 형상을 하고 있다. 동양권의 용 중에서는 지렁이도 토룡(土龍) 곧 용이다. 견훤 탄생설화를 통해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문화권, 문명권별로 용이라는 캐릭터를 서로 다르게 설정했음을 알 수 있다.남도에 용(龍) 관련 지명이 전국 대비 가장 많은 까닭용 관련 지명은 전국에서도 광주 전남지역이 가장 많다. 올 초 전라남도가 조사를 한 모양인데, 전국 1,261곳 중에서 310곳으로 25%를 차지한다. 전국 최고다. 아마 마을 이름이나 산 이름 정도를 조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국지명총람>의 광주전남을 참고해보면 마을 이름, 산 이름, 강이나 하천 이름, 계곡이나 못 이름뿐만 아니라 바위, 산등성이, 둠벙에 이르기까지 천여 개가 넘는다. 조사에서 밝힌 바로는 순천이 가장 많고 해남, 영암, 무안, 나주 순으로 많다고 한다. 실제는 지금의 영산강 권역에 용 설화나 용 지명이 가장 많이 분포한다. 예컨대 전남지역에 보고된 74편의 용 설화중에서 영산강 유역 설화가 57%를 차지한다. 이중 대표적인 지명이 장성 황룡강이다. 용은 용 자체의 지명으로 끝나지 않는다. 용소(龍沼), 용연(龍淵), 용지(龍池), 용담(龍潭), 등 이른바 ‘용둠벙’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둠벙은 갱(坑)이다. 강 혹은 갱번이란 이름이 여기서 왔다. 한자의 뜻대로라면 용소는 늪, 용연은 연못, 용지는 연못이나 도랑, 용담은 연못이나 물가 정도이다. 모두 물과 관련되고 장차 용왕(龍王)의 뜻으로 확대되어 사해 바다를 관장한다. 당골의 노래에서 나타나듯이 동해는 청제용왕, 서해는 백제용왕, 남해는 적제용왕, 북해는 흑제용왕 등으로 호명된다. 물론 남도에만 용 이야기나 지명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가 다 그러하다. 예컨대 제주도의 용담(龍潭)은 천지창조 후 만들어진 것으로 전승되었다. 태초에 바다 한가운데서 한라산이 솟아올랐는데 백록담에서 큰 내(川)가 두 줄기 흘러내려 바다와 만나는 곳에 용연(龍淵)을 이루었다.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도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뜻을 깨치고 포교를 시작했다. 용담가(龍潭歌)는 물론 천도교(동학) 성전(聖典)인 용담유사(龍潭遺詞)가 여기서 나왔다. "용둠벙에서 전하신 가사(歌詞)”이다. 광주는 용봉동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반룡동과 봉곡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반룡이 반룡희주형(盤龍戱珠形-용이 구술을 가지고 논다는 뜻)풍수 명당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전남대에 편입되었다. 광주 어룡동은 어등산과 황룡강을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용진산, 복룡산 등의 이름 중 어등산은 물고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의미로 민화로 말하면 등용문(登龍門, 잉어가 여의주를 물고 승천한다는 의미)의 산이라 할 수 있다. 황룡강의 하류에 있는 산이기에 어룡이란 이름이 생겼다. 그렇다면 왜 전국 대비 남도에 용 관련 지명이 가장 많을까? 전남설화 분포를 통해 언급했지만,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의 설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산강 문화권을 중심으로 고려 건국을 둘러싼 시기의 용 설화나 지명이 넓게 분포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황해도 해양세력이던 왕건이 전라도 토호 세력 견훤을 물리치고 고려를 건국할 당시에 지금의 영산강을 중심으로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긴다. 나는 적어도 영산강권역의 용 관련 지명이나 전설은 이 사건을 배경 삼고 있다고 생각한다.남도의 용은 왜 피를 토하고 떨어지기만 하는가?영산강의 시원이라는 담양 용소의 설화는 용이 승천하려다가 피를 토하고 떨어져죽었다는 내용이다. 이를 아기장수 설화에 대입해보면, 승천하지 못하고 떨어져 죽었으니 왕건이 아니라 견훤일 것이다. 참고로 아기장수 설화는, 신분이 미천한 집안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아기가 장차 역적이 될 것이라 하여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 내용으로 구성된다. 이본(異本)이 매우 많다. 순천시 주암면 운용 마을의 용소(용물소라고도 한다) 이야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옛날 마을 처녀가 용둠벙에 가서 목욕을 하고 있다가 마침 옥황상제의 아들 용이 유배를 와있던 차에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마침내 승천하는 날, 하필 처녀의 친구가 용오름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용은 떨어져 죽는다. 다른 지역이라고 크게 다르겠는가만, 왜 남도의 용은 피를 토하고 떨어져 죽어야만 했을까? 답변 대신 전남대학교 용둠벙 이야기를 전한다. 용봉동에 위치한 전남대학교의 용지(龍池)는 유기춘 당시 전남대 총장 등에 의해 1970년에 인공으로 조성되었다. 장차 승천할 용을 배려했기 때문이다. 당시 전남대 구성원들은 담양 용소 혹은 순천의 용 설화를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용좌(龍座) 재구성을 상상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용둠벙을 만든 지 한 갑자가 도래하는 지금쯤, 이 어간에서 대통령 한 사람 정도는 나와야 하지 않나? 어쩌면 수많은 용을 재구성하는 일을 담당했는지도 모르겠다. 일제강점기 광주에서, 소풍 가는 날 하필 비가 오면 소사가 용을 때려잡아 그런다는 얘기는 지난 칼럼에서 언급했다. 백마 타고 장흥 석대들을 지휘했다는 동학 여전사 이소사를 투영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아무리 영험한 용일지라도 가장 낮은 직급의 민중이 한 삽에 때려잡는 곳이 남도라는 메시지다. 그렇기에 나라가 어지럽고 힘들 때마다 떨쳐 일어나 시대를 이끌었던 곳이 광주이고 남도다. 문화는 어떤 시대 어떤 수요들이 있어 재구성되는 것이다. 마치 전남대 용지를 새로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용좌라는 것이 결국 무엇이겠나? 지배해서 권력을 누리던 용은 전제정권 시대의 용이다. 우리 시대의 용은 백성을 섬기는 용이어야 한다. 장차 남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용 같지 않은 용은 한 삽으로 때려잡고, 대신에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아픔을 다듬어주며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는 그런 철학을 가진 이들을 마땅히 등용시켜야 진정한 용의 해일 것이다. 용 관련 가보고 싶은 명소를 질문하기에 장성 입안산 황룡강 발원지를 소개했다. 극락강의 발원인 담양 용추산(용소), 드들강 발원인 화순 화학산과 더불어 세 개의 영산강 시원 중 가장 길다. 내려오다가 동학군 전승지인 황룡강전적비를 참배해도 좋다. 전설에 기대어 말하자면 남도의 용은 청룡보다는 황룡이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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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2)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기계 문명의 발전이 절정인 오늘날 문명 상황에서 무형유산은 인간의 삶과 더불어 호흡하고, 이 시대를 기록하고 발언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형유산 정신의 회복이지 않겠는가" 4년 전 무형문화재에 대한 논쟁을 이 지면에 다룬 적이 있다(2018. 08. 24). 원형과 전형 논쟁에 관한 것이었다. 오늘 그것을 다시 환기하는 이유는 그 이름이 명을 다해서라고나 할까. 규정한 법률에 의하면 세시풍속은 물론이거니와 기후 인식이나 갖은 관념들까지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담아내려고 한다.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한 1962년으로부터 지금까지 겪어 온 세월의 변화에 대한 반영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대개 원형(原型)과 원형(原形)은 일반인들이 전혀 구분하지 않고 쓴 용어다. 법률이든 관념이든 모두 의식의 본바탕 혹은 무의식의 근본이라는 의미로 범용하였기 때문이다. 통틀어 아키타이프(Archetype)라 했다. 인류가 공유하는 공통 경험의 집단 무의식이라는 뜻이다. 아키타입은 고정 불변하는 원형질이라는 의미이므로 이전에도 변하지 않았고 이후로도 변하지 않을 것을 이르는 말이다.무형문화재법으로 돌아가 생각해본다. 원형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한다는 규정은 잘못된 것이었음을 이미 법률이 증명했다. 아니 문화재라는 이름 자체가 그렇다. 다시 생각해보는 것은 무형문화유산의 특질은 생성하고 변화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다만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강제하여 그 형식과 내용을 붙잡아두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대상을 이렇게 규정해왔다.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은 특정한 시기의 형식, 형태나 내용에 대해 보존의 가치가 있다고 당대의 사회와 여러 전문가가 합의하여 그 형식과 내용을 붙잡아두는 것일 뿐이다." 물론 여기에는 전통과 전승을 기반 삼는 제 규정과 규칙들이 전제되어 있다. 2016년 3월 28일 무형문화재법(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을 따로 제정하면서 원형(原型)을 폐기하고 전형(典型)을 법률용어로 채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무형문화재법의 효용 상실과 문화분권시대의 과제어느 특정한 시기에 완성된(문화재보호법 제2조,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어 온 것) 형식과 형태 및 내용(典型)을 사회적 합의(전문가들의 심사)에 의해 국가와 지자체가 강제하여 보존하는 것이 무형문화재였다. 이 형식(혹은 형태)과 내용을 전형(典型)이라는 법률용어로 갈무리한 것이 문형문화재법의 분리 제정이다. 이로써 일정한 시기의 양식을 마치 고정불변의 원형처럼 오해하는 논쟁이 일단락되었다.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생성, 변화, 발전되는 무형문화유산의 특질에 제동을 걸어서도 안 되고, 마치 원형만을, 혹은 전형만을 국가가 강제하여 보호, 보존한다는 셈법도 변해왔다고 볼 수 있다. 기왕의 문화재는 문화재대로 보호, 보존, 계승하고, 전통에 기반한 제 문화유산들은 자유롭게 현대의 문화와 버무려질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다시 내 논의를 인용해둔다. 진짜민속(Folklore 혹은 Real Folklore)/가짜민속(Fake lore)논쟁이 한때 민속학계를 달군 적이 있다. 하지만 현 단계 페이크로어를 얘기하는 학자들은 많지 않다. 원형/전형 논쟁처럼 시의성도 없고 논점도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면 포크로어는 프로토타입(典型)에 해당되고 페이크로어는 포메이션 타입(造型) 혹은 게임 용어의 키노타입(Keno type)에 해당된다. 무형문화재법이 독립되고 전형이라는 용어를 법률화시키면서 원형/전형 논쟁 및 포크로어/페이크로어 논쟁은 일단락되었다고 봐야 한다. 다시 쟁점 삼으려면 내가 제시한 논의들을 반박하거나 새로운 개념, 새로운 해석을 들고나와야 가능하다. 내가 오래전부터 정리한 것은, 무형문화유산은 끊임없이 변해왔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특정하여 무형문화재로 지정한 것들이 전형(오리지널한 특질)의 지위를 갖게 되었고, 지정시기에 특정한(인정받은) 형식과 내용을 보존하는 것일 뿐이다. 무형문화재 제도의 국제적 배경과 제정 근거에 대해서는 본지의 지난 칼럼(2018. 11. 15)에 자세하게 소개해두었으니 참조 가능하다. 기왕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이를 다 담아내기는 역부족이다. 하지만 국가행정, 지방행정 모두 부처 간 이견이나 갈등으로 이를 풀어내지 못한다. 내가 시간 날 때마다 주장하는 얘기다. 우리나라 민속 문화 기반 의례음악의 연행을 '울린다'고 표현한다. 무엇을 울린다는 것일까? 마당을 밟으니 땅을 울리는 것이요 북장고와 꽹과리, 징으로 울리니 공중을 울리는 것이다. 곧 하늘을 울리는 것이므로 공중을 나는 새와 들짐승까지도 울림의 영역에 포함된다. 울림의 파장들은 상하좌우를 가리지 않고 침윤하여 본디 가진 메시지들을 전한다. 이들 의례음악을 굳이 '울린다'라고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 울림이 공명(共鳴)이기 때문이다. 한자말 공명(共鳴)은 우리말 '울림'의 다른 말이다. 의례음악의 울리는 기능이 공명의 세계를 도모하는 데 있다는 뜻이다. 이미 BTS가 세계의 음악을 흔들고 있다. 하지만 경제와 문화 전반이 세계적 위상에 오르고 있는데도 정작 우리는 그만한 권위를 주장하거나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따위의 자족이 아니라 적어도 동아시아, 아니 세계 무대에 우리 문화의 오리지널한 특장과 의미를 설명해줄 필요가 있는데 말이다. 지난 칼럼에서 문화재청을 문화창의청 아니 문화창의부로 승격시키고 도래하는 문화융성의 시대를 대비하자고 주장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뿌리 없는 나무가 어디 있고 가지 없는 열매가 어디 있겠는가. 용비어천가 들머리를 다시 생각해본다.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할 새 꽃 많이 피고 열매가 많이 맺을 것이니. 그렇다. 저기 저만치 우리의 문화유산에 기반한 문화융성, 문화공명의 시대가 온다. 이를 창발할 준비가 필요하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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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1)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왜 남도트로트인가 이제 트로트나 발라드가 아니라 새 장르의 음악을 직조할 것이고 시대를 공명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저마다 횡경막을 울리는 공명의 방식이 그것이다 한국공연문화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손재오 극단갯돌 예술감독이 몇 가지 질의한 게 있어 답한다. 논문 한 편당 독자가 세 명뿐이라는 우스개가 있다. 논문의 심사를 대개 세 명이 맡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심사자 아니면 아예 읽는 이가 없다는 슬픈 고백이라고나 할까. 이를 총괄하는 학술재단의 무능력을 조롱하는 시선이기도 할 것이다. 다른 분야는 모르겠으되 내 전공 혹은 인접 분야들의 경우, 철 지난 강령과 이념에 사로잡혀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의 차원에서 단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니 어떤 족쇄들을 만들어 전통이니 문화재니 따위의 항목에 채워두고, 자연스레 일어날 창발을 막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어디 세 명만 읽는다는 논문의 문제뿐이며 철 지난 강령에 머물러 있는 학술단체의 일뿐이겠는가. 장차 문화재청을 문화창의청(文化創意廳)으로 바꾸고 기왕의 문화재들을 문화유산이라는 맥락으로 톺아내며 그간의 전통이니 콘텐츠니 하는 담론들을 미래지향적으로 발현시킬 필요가 여기에 있다. 적어도 전통(傳統)과 인습(因習)은 구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미스트롯에서 풍류대장, 조선판스타까지남도트로트는 수년 전 내가 만들어 쓴 용어다. 이유가 있다. 이즈음 화두가 되었던 미스트롯이니 풍류대장이니 조선판스타니 하는 노래시합 프로그램을 보면 이 행간을 읽을 수 있다. 미스트롯의 송가인을 필두로 김태연이나 이날치밴드가 승승장구한 이유 말이다. 여기에 풍류대장과 조선판스타라는 프로그램이 또 다른 팬덤을 형성하는 중이다. 모두 국악 혹은 판소리라는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하거나 적어도 매개물로 삼고 있는 현상들이다. 나는 이를 '송가인의 시김새, 남도트로트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본 지면에 소개한 바 있다. 송가인 신드롬의 출처를 베이비부머세대의 깨달음이라는 이름으로 분석한 바도 있다. 묻지마라 갑자생에서 오팔년 개띠, 베이비부머세대의 은퇴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회사적 맥락을 송가인이라는 창을 통해 추적해본 것이다. 풍류대장에서는 판소리뿐만 아니라 민요, 정가 등 다양한 국악 장르 전공자들이 참여했다. 하지만 이것을 국악 전반의 부상이나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 따위의 감상으로 접근하면 본질을 놓치게 된다. 이것은 '시경'의 「풍요」로부터 계승되는 노래(詩)의 본원, 남도의 흥그레타령과 육자배기를 거쳐 국악풍 발라드 김정호와 남도트로트 송가인에 이르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읽을 수 있다. 판소리 창법을 가지고 가요계에 진출했던 이들은 한농선, 안향련 등이다. 김정호나 송가인이 가요계에서 판소리를 응용한 사례라면 판소리꾼이 가요계로 뛰어든 1세대라고나 할까. 지금의 풍류대장과 조선판스타에 선행하는 국악계 스타들이다. 하지만 거듭 상고해보면 트로트의 시조라고도 하는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조차 본래는 민요가수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보인다. 미세한 분석을 시도해보면 훨씬 다양한 층위의 장르교섭과 창발을 읽어낼 수 있다. 내가 '민요라는 이데올로기'라고 비평한 것도, 엔카와 트로트논쟁 북한민요의 정체라는 이름으로 쓴 글도 이런 일환이다.왜 남도트로트이고 남도발라드인가김정호의 노래 전반이 그렇지만 예컨대 '님'이라는 곡을 들어보면 완전4도 아래로 하강해 떠는 남도선율 특유의 창법이 녹아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노래 자체가 사실은 육자배기 선율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일 것이다. 김정호의 노래를 범박하게 평할 때 남도 삼음(三音)을 토대로 만든 노래라고들 한다. 나주시립국악단 윤종호 감독은 이것이 남도선율이 아니고 무엇이겠냐고 늘 주장한다. 나는 이 육자배기의 선율을 남도 전통의 흥그레타령으로 끌어올렸고 「향가」의 맥락으로, 다시 '시경'의 「풍요」까지 끌어올렸다. 노래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손재오 감독은 '남도트로트'를 계속해서 추적하고 분석하며 체계화시킬 특별한 방법론이 무엇인가를 질문했다. 내가 다 알 수도 없는 일이지만 남도라는 로컬을 주목하는 시선과 트로트 창법을 분석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해둘 필요가 있겠다. 보다 디테일한 방법론은 후학들이 승계해나가지 않겠는가. 기본적인 내 시각은 전통이라는 이름의 어떤 대상이 아니라, 가 행하는 예술과 연행의 틀 속에서 이전과 지금 나아가 미래를 찾는 방식이다. 판소리나 민요가 어떻게 승계되고 발화되었는지보다 예컨대 지금의 트로트나 랩 속에 전통적인 것들이 어떻게 스며들어있는지를 추적하는 셈이랄까. 주지하듯이 판소리는 동편제니 중고제니 따위의 전국적인 지평 속에서 남도의 선율 및 어법으로 정착되었다. 시대사적 수요와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나라 잃고 가족 잃고 죽을 지경에 이른 백성들의 심중을 힐링시켜준 처방전이었다고나 할까. 그것이 계면조(界面調)라고 하는 즉 횡경막을 울리는 공명의 방식이었다고 나는 읽었다. 시대는 변한다. 시대정신도 변한다. 베이비부머 세대까지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나면 새로운 세대가 또 주인으로 등장한다. 이제 트로트나 발라드가 아니라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직조할 것이고 그 음악이 시대를 공명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저마다의 횡경막을 울리는 공명의 방식이 그것이다. 이름이 바뀌고 장르가 바뀌어도 흉중의 경계를 넘나드는 계면(界面) 울림의 방식은 영원하다. 나는 남도트로트와 남도발라드라는 이름으로 접근했지만, 미래의 팬덤은 누군가 또 다른 이름으로 작명하지 않겠는가.로컬(Local)로의 전회(轉回)남도트로트는 '남도'로 지칭되는 로컬 미의식을 담아낸 명칭이다. 왜 로컬인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들이 있으니 참고 바란다. 지방, 지역, 골목 등의 공간적 범주를 넘어서는 개념이다. 문제는 지방분권의 시대, 문화분권의 시대로 호명되는 이 시대를 어떻게 정의하고 대응하느냐는 것이다. 분권자치와는 거꾸로 가는 서울 중심 정책이나 수도권 집중 현상들을 호도하기 위한 레토릭일 뿐인가? 지방이 죽어가고 마을이 없어져 간다고 징징대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온갖 기회요인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데 말이다. 근본적인 변화는 생각의 혁신에서 온다. 내가 로컬로의 전회를 주장하는 이유다. 여기서 말하는 로컬은 중앙 혹은 수도권에 대응하거나 복속되는 개념이 아니다. 중심 심장과 변방 모세혈관이 대등하게 대칭하는 글로뮈론을 주창해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이를 낱개의 사례로 풀어 이라 명명하고 본 지면에 연재해왔다. 그 일부를 모아 '남도를 품은 이야기'(다할미디어, 2022)를 펴냈다. 향후 남도트로트에 대해서도 갈무리작업을 할 예정이다. 오랜 세월 행간과 여백에 내뱉은 이름도 빛도 없이 살다 가신 이들의 푸념이 펄펄 살아 시가 되고 소설이고, 문학이 되고 철학이 되어 사람들에 의해 불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다시 송가인과 김태연의 절절한 수리성, 남도트로트를 듣는다. 미래세대로 올 또 다른 주인공들 그리고 또 다른 장르를 상상한다. 그곳에는 변함없이 배와 가슴 사이를 교섭하며 발끝에서 두성까지 온몸을 전율시키는 공명의 방식이 있다.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 인간과 비인간, 서울과 지방을 정직하게 직면하는 존재론적 전회(Ontological Turn)가 필요한 시대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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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0)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백설이 자자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고려말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이 읊은 매화시이다. 매화를 노래한 우리나라 최초의 시로 알려져 있다. 흰 눈이 수북이 쌓인 골짜기는 필시 고려말의 혼란기를 뜻하는 것이다. 혼란의 구름이 머물러 있으니 눈 속에 피는 설중매를 마주할 길이 없다. 매화를 기다리는 마음은 나라의 혼란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심정을 읊은 것이다. 석양에 홀로 청청하게 서 있었다는 행간을 읽으면, 깊은 눈 속에 매화가 피어있듯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와중의 격변을 그려볼 수 있다. 그저 눈 속에 피는 한 송이 매화를 읊은 것이 아니다. 이색이 누구인가.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이다.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더불어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태어난 고향 마을 이름이 길은(吉隱)이다. 큰 스승님들이 지어주신 대여섯 개의 호를 나누어 쓰다가, 한 페친의 권유로 시방은 이 이름을 내 호로 사용하고 있다. 어찌 삼은의 언저리라도 갈 수 있겠는가만, 길하고 풍요로운 본질을 그윽이 품고 초야에 은닉해 남은 삶을 꾸리겠다는 마음만은 변함없다. 옛 선비들이 앞다투어 설중매를 노래하고 그 기운에 의탁해 세사에 더럽혀진 마음을 씻고자 했던 이유도 대개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2008년경 본 지면에 소개했던 내용이기도 하지만, 졸저 '남도를 품은 이야기'(다할미디어, 2022) 한 대목을 다시 가져와 본다. "역학적으로 보면 겨울은 곤음(坤陰)에 해당한다. 시간을 분절하고 공간을 나눠 오행의 의미를 부여할 때 만물이 생장을 정지하는 죽음의 계절을 겨울로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치 해 뜨는 동쪽을 새싹의 색깔인 청색으로 정하고 해가 지는 서쪽을 색깔 없는 흰색으로 정하는 이유와도 같다. 그래서다. 매화는 죽음으로부터 소생하는 혹은 환생하는 재생의 꽃이다. 하고많은 해석들이 있지만 단연 매화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고 봐야 한다." 고향 산은 아득히 음기가 서려 있고 대지의 바람은 차고 눈은 깊이 쌓였는데 창을 올리고 편히 앉아 주역을 읽노라 가지 끝에 흰 것 하나, 하늘 뜻을 보이네 삼봉 정도전이 노래한 '매설헌도(梅雪軒圖)'이다. 나는 이 시를 호우의 철학으로 풀이하여 정몽주가 읊은 봄비와 비교해본 바 있다. 겨우내 곤음의 동굴 속에서 검은 피와 붉은 피를 튀기며 새로 올 봄에 대한 혈전을 치렀을 그들의 심경을 읽어내 보고자 했던 것이다. 삼봉 정도전은 이후 이성계를 도와 유교 조선을 기획하고 건국에 성공한다. 주역을 읽으며 올려다본 가지 끝의 흰 것, 그것이 새로 맞이한 삼봉의 봄이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목은 이색의 시는 처량하기 그지없다. 분명 백설 잦아진 골 양지바른 어느 언덕에 설중매 만발했을 텐데, 기울어가는 석양을 홀로 바라보며 갈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고려가 망하지 않고 심기일전 불교와 무신권력을 혁명했더라면 목은은 눈 속의 매화를 발견한 기쁨을 노래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삼봉을 승리자로만 읽는 것은 아니요 목은을 패배자로만 읽는 것도 아니다. 목은은 줄곧 김구용 정몽주 이숭인 등을 학관으로 채용해 신유학의 보급과 발전에 기여한다. 유교와 불교의 융합을 주장함과 동시에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고 불교의 폐단을 줄이려고도 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도로 쫓겨나자 조민수와 함께 창왕을 옹립한다. 이성계 세력이 권력을 잡자 여러 곳으로 유배되었고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연루되어 또 유배 생활을 한다. 이성계의 끊임없는 출사 종용이 있었지만 끝내 고사하고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생을 마감한다. 문하에 충절을 지킨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조선왕조 건국에 공헌한 제자들도 많이 배출된다. 정도전, 하륜, 윤소중, 권근 등이 그들이다. 변혁이나 혁명의 의미를 서로 달리 해석한 때문이었을까? 홍매화는 어떻게 붉은 꽃이 되었을까 옛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다. 한 임금이 매화꽃을 어찌나 사랑했던지 매화라는 궁녀까지 총애하게 되었다. 이것을 시기한 신하들이 모의하기를, 매화가 역적들과 밀통해 임금을 죽이려 한다고 했다. 매화는 참소를 받고 처형되었다. 매화꽃 때문에 궁녀 매화를 잃었다고 생각한 임금은 전국의 모든 매화나무를 없애라고 명을 내렸다. 하지만 어떤 시골에서 매화나무를 끔찍하게 사랑했던 한 소녀가 몰래 매화나무를 길렀다. 발각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다. 소녀는 이것이 일반 매화와는 다른 빨간 매화라고 우겼다. 신하들이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봄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소녀는 매일 밤 손끝을 매화 가시에 찔러 피를 냈다. 꽃망울에 붉은 피를 흘려 붉은 기운을 넣기 위함이었다. 날마다 피를 흘린 소녀는 이내 죽고 말았다. 봄이 되자 놀랍게도 그때까지는 전혀 보지 못하던 홍매화가 피었다. 매화와 관련된 이야기는 주로 충절이나 정절, 고결한 의지, 강직한 품성 등을 나타내는 데 소환되는 특급 콘텐츠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일본 등 동양의 시인묵객들이 매화를 노래하거나 그림으로 그리고 혹은 도자기 등의 예술품으로 표현했던 이유도 이런 심성을 흠모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녀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잉태와 모성의 여신성(女神性), 봄이 상징하는 재생과 부활의 에너지들이 응축된 콘텐츠라는 점 재론이 필요치 않다. 어찌 이것이 옛일에만 국한되겠는가. 마침 우리집 안마당을 둘러보니 설중매가 이미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하지만 정초 한발의 서슬이 채 가시지 않아서일까. 봄이 아득하기만 하다. 문득 석양에 홀로 서서 갈길 몰라하는 목은을 마주한다. 눈 녹는 그 길에 대통령선거가 있다. 올해도 봄날의 정령 매화가 지천으로 필까? 정치로 말하자면 격조는 언감생심 차마 부끄러워 설중매를 거론할 수조차 없는 현실인데 말이다. 가난하지만 비굴하지 않게 살려고 안빈낙도를 꿈꾸는 일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듯하다. 포은과 목은, 삼봉의 혈전들이 그러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곤음의 시간, 그저 매일 밤 손끝을 매화 가시에 찔러 피를 내야 할 모양이다. 시대의 도도한 흐름을 달리 해석하는 것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예컨대 봄의 전령 매화나무를 모두 베어버리는 무모함을 눈 뜨고 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것은 역사를 거스르는 퇴행이다. 매월당 김시습의 探梅 큰 가지 작은 가지에 눈이 모두 쌓였는데 따뜻한 기운 알아내고 차례대로 피는구나 고운자태 곧은 마음이라 비록 말이 없지만 남쪽 가지엔 봄의 정취 가장 먼저 어리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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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9)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한강의 끝자락 조강포에서 터울림을 한 것이 4년 전이다. 주지하듯이 조강포는 마금포, 강령포와 더불어 한강 하류의 3대 포구였다. 한강, 예성강, 임진강의 염하(鹽河)가 만나 한길을 이루고 서해로 접어드는 물길이다. 전라 충청의 모든 물류가 한양으로 나들던 길목이요 대중국 교류의 대문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쉬었다가 한물을 올라가면 서울 마포다. 지금은 철책으로 막아버려 북쪽 땅끝이 되어버린 곳이다. 2018년 당시 나는 이곳을 중심으로 풍물활동을 하던 노나메기팀과 합류하여 조강포 나루표지석 앞에서 신년 마당밟이를 하였다. 땅을 울리니 터울림이요 바람을 더불어 울리니 공명(共鳴)이었다. 아시아문화연구원 김용국 원장과 만나 내가 제안을 하였고, 노나메기 대표가 응대하여 이루어진 쾌거였다. 분단 이후 최초로 조강포를 울렸던 쇠북소리는 북녘땅 어디까지 울려 퍼졌을까. 지난 2003년 장두석, 박병천, 박사규(기천 문주)선생님을 따라 백두산 정상에서 분단 이후 최초의 천제를 모셨던 기억이 새롭다. 땅이란 무엇일까. 국토란 무엇일까. 조강포에서 바라보면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곳이 모두 북한이다. 우리의 울림이 얼어붙은 한강을 그윽하게 울려 평안도로 황해도로 울려 퍼졌을까. 분단 이후 최초로 울린 조강포의 터밟이, 울림(共鳴)이란 무엇인가 지난해 말 (사)나라풍물굿의 요청으로 특강을 하였다. 대주제는 '전환기의 풍물굿: 풍물굿이 변화하는 이 시기에 어떻게 대처하고 적응해 갈 것인가'였고, 내 강의 주제는 '울림이란 무엇인가-대동의 공명론'이었다. 질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리토르넬로'를 소개하며 우리 농악의 '울림', 그 정체에 대해 설명한 강의였다. 주의할 것은 여기서의 대동(大同)이 집단주의나 전체주의하고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어쨌든 하고많은 다른 표현들 놔두고 왜 농악을 '울린다'라고 표현하는 것일까? 통상 서양에서는 '새가 노래한다'고 하고, 우리는 '새가 운다'라고 하는데, '운다'라는 표현이 '울음을 운다'의 뜻일까? 이론이야 많이 있겠지만 내가 주장해 온 결론을 말한다면, 더불어 울리는 일 곧 공명(共鳴)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맞울림과 더불어 울림에 대해서는 본 지면을 통해 여러 번 소개했으므로 구체적인 리뷰는 생략한다. 내 강의는 농악이란 이름의 출처, 농악의 기원, 특히 '울림'이란 공명의 본질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땔나무꾼 나를 초청한 (사)나라풍물굿은 2021년 나라터밟이 행사를 주도하고, 만북울림이라는 이름으로 광화문 등 나라터 울림을 주도했던 그룹이다. 지난해 이들은 한강, 낙동강, 섬진강, 금강, 영산강 등 5개 강의 발원지와 하구를 찾아 샘굿이라는 이름으로 상생의 울림을 도모하기도 했다. 농악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는 시선이자 일종의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나는 이들을 일러 천만 농악꾼(풍물꾼)이라고 표현한다. 본래 마을굿에서 연원한 농악을 염두에 둔다면 천만 아니라 이천만 삼천만 동호인을 보유한 집단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다. 이들이 행하는 활동과 운동이 사실은 '농악'의 본질을 연행해 온 것이고, 곧 공명의 울림을 실천해왔다는 점을 환기하고 싶다. 지면상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나누기로 하고, 농악(農樂)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 한 토막만 붙여두기로 한다. 농악(農樂)이란 이름에 대하여 농악(農樂)이란 이름이 일제강점기 우리 풍물을 농사(農事)에 제한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들 한다. 농악의 바이블이라고 하는 정병호의 '농악'에서도 그렇게 주장했고, 여타 전문 연구자들도 그렇게 주장해왔다. 그래서 대안으로 사용한 이름이 '풍물'이다. 과연 그러한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풍물을 축소하여 농악이란 이름으로 호명한 것이 아니라, 농악을 오히려 축소하여 풍물이란 이름으로 호명했다고 하는 편이 옳다. 물론 '풍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온 저간의 역사와 활동은 그것대로 존중되어야 하지만, 농악이란 이름 혹은 울림이라는 정체를 올바로 지적해두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정초의 마당밟이와 지신밟기에 포섭된 벽사(闢邪)적 기능뿐 아니라 대지와 천상의 신을 울리는 신명의 기능을 염두에 두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남도 문화재위원 김희태가 오랫동안 이를 주장해왔다. 나는 그가 발굴한 여러 자료를 통해 농악이란 이름의 출처뿐만 아니라 그 맥락에 대해 더욱 견실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농악이란 용어가 사용된 내력을 몇 가지만 살펴본다. 장흥사람 안유신(安由愼, 1580~1657)이 지은 '유두관농악(流頭觀農樂)'은 보성에서 농악을 보고 지은 시다. 16세기에 농악이란 이름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1890년대 매천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농악에 대한 자세한 설명까지 곁들였다. 충청도 서천 유생 최덕기(崔德基, 1874~1929)가 쓴 향촌일기 <갑오기사(甲午記事)>에도 농악이 나온다. 김제출신 근대학자 석정 이정직(1841~1910)의 저서 <연석산방미정시고(燕石山房未定詩藁)>에는 시 제목을 아예 '농악'으로 뽑았다. 1914년까지 살았던 보성선비 이교문(李敎文, 1846~1914)의 <일봉유고(日峯遺稿)>에도 '농악'이란 제목의 7언 율시가 있다. 동학과 관련한 석남역사(石南歷史) 및 후손들의 증언집에도 농악이란 이름이 빈출한다. 여기에 마당밟이 지신밟기를 포함한 마을굿(당산굿), 두레풍장, 나례희, 군사 훈련, 유랑 연희, 무격의례 혹은 탈놀이 등 수많은 장르가 합해져 이루어진 것이 오늘날의 농악이다. 관련 내용은 차차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강상헌은 지난해 농민신문 칼럼에서 갑골문 농(農)자를 천문(天文)에 빗대어 설명한 바 있다. 요약해서 말하면 농사는 살림의 다른 이름이다. 죽임의 반대말이 살림이다. 글농사, 밥농사 등 한 해 농사에 비유하는 수많은 언설들이 이를 말해준다. 농사와 농악을 농업만으로 이해했던 오류를 시정하는 것이 터울림 혹은 땅울림이라는 공명의 방식을 제대로 인식하는 첩경이다. 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지난해 칼럼에서 해남의 소농지원 사업을 소개한 바 있다. 이것이야말로 기왕에 해왔던 지력 약탈농업, 소농 수탈농업 등 땅의 기운을 빼앗고 마을의 정기를 빼앗고 종국에는 지역이 소멸해가는 기왕의 시스템을 혁신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다. 농악이란 이름을 너무 농업에 의존한 호명으로 격하시켜온 것 아닌가? 농사의 효용만을 따져, 땅을 수탈하는 농업, 소농과 가족농을 죽이는 농업구조로 재편해온 것처럼 말이다. 어디 농업만 그러하겠는가? 정치, 경제, 문화 전반이 다르지 않다. 예컨대 농악이 가진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맥락을 살피지 못한 채 어떤 주된 기능만을 내세우게 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아지지 않겠는가. 농악이란 이름의 출처와 공명의 본질에 대해 극구 이야기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농악의 출처가 그렇고 생성의 역사가 그러하며 재구성된 맥락이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꿈꾸어 본다. 혹여 이번 대통령에 당선된 누군가 취임식 할 때, 덩더꿍 꽹과리 들고 덩실덩실 춤추고 나올 수는 없을까?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넬슨 만델라가 취임할 때, 저들 고유의 춤을 추며 나왔듯이, 자신을 괴롭혔던 교도관과 그의 친구들을 귀빈석에 모셔 자랑스럽게 소개했듯이, 그런 농악 한마당 취임식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일까? 편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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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8)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해마다 명절이 되면 어머니는 '밀백기'를 만드셨다. 추석과 설은 물론 유두 백중에도 빠짐없이 준비하셨다. 설날 필수적으로 장만하는 것이 조청(엿)이고 추석날 필수로 준비하는 것이 송편이라면 모든 명절을 통틀어 준비하는 음식이 '밀백기'다. 송편도 각각의 명절마다 준비하던 것이었지만 어느 시기부턴가 추석 음식으로 정착되었다는 점, 몇 차례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설날 가래떡을 찍어 먹기 위해 조청을 준비한다는 점도 지난 칼럼에서 소개해두었다. 그렇다면 왜 명절에 밀백기를 해야만 했을까? '밀+백기'에서 '밀'은 명절을, '백기'는 두부조림 혹은 두부탕을 말한다. 진도, 해남 등 남도 일부 지역에서 명절을 '밀'이라 한다. '밀'이란 명칭의 분포권은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지금의 잔존지역보다 훨씬 넓었을 것이다. <전남방언사전>을 쓴 이기갑은 '밀'이 '명일'에서 온 말일 수 있다 한다. '명일(名日)'은 '명절'이다. 지금으로 치면 '국경일'의 총칭이다. '일'이 탈락하면서 '명'이 '밀'로 변화되었다. 백기라 호명하는 두부조림은 고춧가루 등의 양념을 치지 않는다. 돼지고기를 넣기는 하지만 두부볶음 혹은 두부국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뚜부백기'라고도 한다. '백기'는 어디서 온 말일까? 감옥 출소 후 먹는 두부의 출처 콩밥 먹는다는 말이 있다. 징역살이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사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일제시대에는 전쟁물자 동원을 위한 공출제도 등으로 인해 농촌생활이 극도로 궁핍했다. 보리밥은커녕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 어려웠다. 따라서 당시 만주지방에서 생산되던 값싼 콩을 대량으로 들여와 콩밥을 해먹인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런가? 합리적인 추론이긴 하나 2% 부족해 보인다. 주목할 것은 감옥을 출소할 때 너나없이 흰두부를 입에 가득 넣어 먹인다는 점이다. 오래된 전통일까? 근대에 생긴 풍속일까? 출소자에게 두부를 먹이는 것은 흰색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의미, 정화, 씻김 등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흰두부처럼 정화하고 새사람이 되라는 의미로도 풀이한다. 또 이런 해석도 있다. 교도소에서 콩밥을 많이 먹었으니 다시는 감옥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먹인다는 것이다. 두부가 콩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이치라나. 감옥에서 영양공급이 불충분했을 것이므로 영양소 많은 두부를 먹인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이 설은 콩밥이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니라는 설에 배치된다. 두부에는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필수 아미노산, 뇌세포의 대사 기능 촉진, 불안감을 해소하는 가바(Gaba) 등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 영양식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균형 잡힌 식단이 아니라는 뜻으로 들린다. 중국 산시성(山西省) 츠바이치((吃白起·흘백기) 전통 명절에 밀백기를 만드는 곳을 추적하였더니 우리나라보다는 중국의 한 지역이 눈에 들어온다. 산시성에 현존하는 백기육(白起肉)이란 흰두부 요리다. 고기 육(肉)자가 들어가 있으니 고기요리일까? 아니다. 순두부탕이라고 할만한 구성이다. 진도와 남해안 지역에서 지금도 명절마다 만들어서 먹는 밀백기와 많이 닮았다. 고기도 넣지 않고 갖은양념도 넣지 않고 그저 흰두부 중심으로 끓인 음식이다. 아니, 무엇보다 백기라는 이름이 같다. 산시성에서는 이 요리를 만들어 먹으면서 '츠바이치(吃白起·흘백기)'라 한다. '백기를 삶아 먹는다'는 뜻이다. '백기'는 사람 이름이다. 전국시대 때 얘기다. 진(秦)나라 전쟁의 신으로 불리는 백기(白起)가 지금의 산시성 가오핑(高平)시에서 조(趙)나라를 대적한다. 마침내 조나라 군사가 투항했는데 '반란이 우려된다'며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하고 그 속에 군사들을 참살했다. 한반도 현대사에 산견되는 제주 4.3이며 여순이며 민족동란에 이르는 처형의 모습들이 눈에 어른거린다. 조나라로 돌려 보낸 어린이 240명 외 45만 명을 이같은 방식으로 갱살(坑殺, 구덩이에 산채로 파묻음)했다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사기 열전에는 이를 '조나라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趙人大震)'고 보고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백기는 중국 역사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잔혹한 처형 혹은 살인자로 낙인찍혀 있다. 산시성 사람들이 백기육 즉 두부탕을 먹는 것은 원수의 뇌를 씹어먹듯 조상의 한을 되갚는다는 의미라 한다. 물론 조나라의 패배는 효성왕 조단(趙丹, 기원전 265~245)이 노장 염파를 전쟁에 쓰지 않고 돈을 써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방식으로 애송이 조괄(趙括)로 바꾸었기 때문이라 한다. 옹졸한 제왕이 무능한 장수를 등용했기에 40만 대군이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다. 어머니가 명절마다 만드시던 '밀백기'를 상고한다. 진도와 남도지역에 잔존하는 밀백기의 전통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남도지역과 지금의 산시성 곧 기원전 조나라와 어떤 특별한 관계라도 있단 말인가. 아니면 대(對)중국 문화교류의 풍속이 진도를 중심으로 한 남도지역에 잔존하고 있단 말인가. 아니면 우리 또한 어떤 원수의 뇌를 씹어먹듯 밀백기를 명절마다 만들어 먹었으며 이 행위를 통해 조상의 한을 되갚고 있기라도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 원수는 누구이며 우리의 조상은 어떤 패전 혹은 어떤 억압의 시대를 감내해왔단 말인가. 어쩌면 출소하면서 흰두부를 먹는 전통도 어떤 연관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라마다 지방마다 전통도 다르고 풍속도 다르다. 하지만 동아시아를 통틀어 유사한 전통과 풍속도 있다. 중국 산시성의 흘백기와 진도 등 남도 해안의 밀백기 풍속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생각해보는 추석이다. 두부의 역사 지역에 따라 더부, 둠비, 두위, 뒤비, 드비, 디비, 조패, 조푸, 조피, 조프 등으로 부른다. 언제부터 두부를 만들어 먹었을까? 심승구의 논문 '조선시대 조포사와 진관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두부가 전래 된 시기는 고려말이다. 이색의 <목은집>에, 과거를 치른 뒤 두부를 먹었다(1365년)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최덕경의 '대두의 기원과 장(醬, 젓갈, 간장, 된장)·시(豉, 메주) 및 두부(豆腐)의 보급에 대한 재검토'에 의하면 두부가 문헌 속에 등장하는 것은 중국의 오대(五代, 당과 송의 중간시대)다. 조포사(造泡寺)와의 연관은 두부를 '두포(豆泡)' 혹은 '포(泡)'라고 불렀다는 데서 찾는다. 이 사찰에서 나라 제사에 쓰는 두부를 만들었다. 능(陵, 임금의 무덤)이나 원소(園所, 왕세자의 무덤)에 속한 국가기관의 하나, '능침사' 또는 '능침조포사' 등으로 불렀다. 이외 관가에서 두부를 만들어 바치던 곳을 조포소라고 했다. 이들 연구에 의하면 16세기 이전 두부는 오늘날의 형태라기보다는 거의 순두부에 가까운 것이었다. 당시의 제사용 두부와 그 의미들을 상상해볼 수 있는 정보들이다. 이것으로 백기(白起)의 이름이 등장하는 기원전까지 두부가 소급될 수 있을지 알기 어렵다. 아마 두부가 만들어진 이후 각색되거나 재구성된 신화 아닐까 싶다. 우리 어머니들이 명절마다 두부를 만드시던 까닭 또한 명절이 절기 제사였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기원에 관한 소급의 가부를 떠나 '밀백기' 혹은 '두부백기'라는 이름을 공유하는 한중간의 문화 유사성이다. 또한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 출소자들에게 먹이는 흰두부는 죄의 씻음이나 정화, 나아가 거듭남의 의미(과거를 보고 나서 먹는 두부)가 담긴 풍속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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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