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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5)<br>백자음각태일전명편박물관 특설강좌의 추억 이규진(편고재 주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설한 박물관특설강좌를 일 년간 수강했던 적이 있었다. 세상을 뜬 아내가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할 때였다. 병원 밥을 사 먹고 병실 한 구석에 쪼그리고 잠을 자며 24시간 직접 간병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강의가 제대로 귀에 들어올 까닭이 없었다. 가망도 희망도 없이 나날이 시들어 가는 아내의 지치고 힘든 모습이 목요일 오전에 한 번 병원을 잠시 떠나 있는 동안에도 자주 눈에 밟혔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결국 박물관특설 강좌가 끝나기 전에 세상을 떴다. 박물관 특설강좌가 끝나갈 무렵 수강생들에게 과제물이 주어졌다. 박물관을 돌아보고 리포트를 써내라는 것이었다. 나는 동원 이홍근 선생이 기증한 백자상감당초문태일전명탁잔과 내가 일찍이 광주 우산리 4호 요지에서 습득한 바 있는 도편을 비교 분석한 글을 써냈더니 수료식 날 우수상을 주었다. 따라서 지금도 백자음각태일전명편과 상장을 보면 아내가 생각난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도 목요일만 되면 나보다 먼저 박물관 특설강좌 시간을 챙겨주던 아내였다. 그런 아내가 세상을 떴을 때의 막막함이란---. 싸늘히 식은 아내의 시신을 침대차에 싣고 어둠침침한 긴 낭하를 따라 영안실로 향하던 그 날의 그 참담했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백자상감당초문태일전명탁잔에 대해서는 일찍이 최순우 전 국립박물관 관장이 언급을 한 적이 있었다. 그의 주장은 이 탁잔이 연질인 것으로 보아 남쪽 지방 어느 곳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달랐다. 리포트에서 그 근거를 몇 가지 거론했지만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글씨체였다. 탁잔의 태일전(太一殿)은 흑삼감이고 4호 요지의 도편은 음각에 글씨체도 달랐지만 공통점도 있는데, 두 점 모두 콩태(太)자가 아니라 대(大)자 밑에 일(一)자가 붙어 태일전(太一殿) 아니라 대일전(大一殿)이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이 유사점 등을 들어 탁잔은 적어도 우산리 일대에서 만든 것이 아니냐고 주장을 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근래 재미있는 자료가 발견되었다. 경기도자박물관에서 우산리 4호 요지를 발굴한 결과 '백자음각태일전명' 접시가 출토된 것이다. 이 또한 태일전(太一殿)이 아니라 대일전(大一殿)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왜 도공은 태(太)자를 대(大)자로 써야만 했던 것일까. 한자를 모른 탓에 생긴 실수였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엉성하게 쓴 백자음각태일전명접시의 전(殿)자가 아무래도 눈에 익어 자료를 찾아보니 내게 전(殿)자만 남은 도편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또한 백자음각태일전명편을 습득할 당시 함께 수습한 것으로서 백자음각태일전명편 글씨체와 동일인의 솜씨가 분명한 것이었다. 돌아보니 아내가 세상을 뜬 것도 박물관 특설강좌에서 리포트를 쓰던 시절도 벌써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잎 떨군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를 귀 가득히 들으며 우산리 골짜기에 서 있던 때는 그 보다도 더 아득한 세월 저 편의 일이다. 그러나 그런 세월들이 아득하다 한들 그릇에 태일전 명을 새기며 공납을 위해 도공들의 손놀림이 분주하기만 했을 그 시절에 비하면 어찌 길다고만 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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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4)<br>청자종 편마음으로 듣는 저 종소리 이규진(편고재 주인) 내게는 죽편으로 널리 알려진 서정춘 시인이 만들어준 자필 시집이 한 권 있다. 기존의 시집 중에서 20여 편을 고르고 이것을 서 시인 본인이 철필로 꾹꾹 눌러 써 만들어준 이 시집의 제목은 ‘종소리’. 죽편도 좋지만 이 종소리 또한 내가 좋아하는 시이기 때문에 이 자필 시집의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한 번을 울어서 여러 산 너머 가루가루 울어서 여러 산 너머 돌아오지 말아라 돌아오지 말아라 어디 거기 앉아서 둥근 괄호 열고 둥근 괄호 닫고 항아리 되어 있어라 종소리들아 멀리멀리 퍼져 나가는 종소리의 긴 여운이 귓가에 맴도는 듯한 시가 아닐 수 없다. 한국 종鍾을 이야기할 때 그 특징으로 우선 정상부의 용뉴龍鈕와 몸체의 비천상을 이야기한다. 외형상 아주 아름답다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종은 어디까지나 소리를 위해서 존재하는 기물이다. 저 멀리서 새벽을 일깨우며 들려오던 산사의 종소리는 얼마나 신비롭던가. 한국 종의 매력은 실상 외형보다도 맥놀림에 의한 그 소리에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종 상부에 음관을 두고 종 아래에는 명동을 두어 소리가 하늘을 향해 소리치고 땅이 공명하는 한국 종의 아름답고 그윽한 그 종소리는 흔히 영혼을 깨우고 세상을 밝히는 울림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종은 소리를 위해 존재하는 기물이기 때문에 금속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타종을 위해서는 우선 이를 견딜 수 있는 내구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깨지기 쉬운 청자로 종을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실제로 청자종靑瓷鍾이 존재한다. 아쉬운 것은 원형이 남아 있는 실물은 없고 깨진 조각으로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이대 박물관에 있는 음각무늬편, 강진 청자박물관의 목련편, 부안 청자박물관의 '양각 부처님 편'이 그것들이다. 필자도 근래 이 청자종 편을 한 점 구했다. 지인 집에 들렀다가 눈에 띄어 양도를 받은 것인데 여간 흥분되는 일이 아니었다. 청자종 편은 상대와 하대의 윤곽이 남아 있는데 상대는 아래쪽을 향해 하대는 위쪽을 향해 연판문을 두고 있다. 상대 바로 밑에는 유곽 없이 양각의 목련만 여섯 개가 보이고 몸체에는 비천상의 휘날리는 천의 자락이 일부 남아 있는 가운데 당좌의 연꽃무늬도 약간 보인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의 형태가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남아 있어 전체적인 종의 모양새를 유추해 볼 수가 있다. 앞에서 열거한 박물관 소장품들보다 크기도 크거니와 더 구체적으로 종의 형태를 연상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치지도 못할 청자종은 왜 만든 것일까. 종소리는 처음에는 귀로 듣지만 결국은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에밀레종으로 널리 알려진 봉덕사 신종에 새겨진 글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의 밖에 있어 보아도 능히 그 근원을 볼 수 없으며 대음(大音)은 천지의 사이에 진동하나 들어도 그 울림을 들을 수 없습니다. …… 그러므로 신종을 매달아 중생으로 하여금 일승(一乘)의 원음인 종소리를 듣고 깨닫게 하려 합니다.” 이에서 보듯 종소리는 단순히 울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진리를 깨닫기 위한 방편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하면 고려인들은 청자종을 통해 그 소리 안 나는 진리의 종소리를 듣기 위한 것이었을까. 푸른 청자빛 하늘을 통해 영원을 꿈꾸었던 고려인들로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청자종 편을 통해 느껴지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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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3)<br> 청화백자산수문분접시저 멀리 북한산과 도봉산이 이규진(편고재 주인) 바보산수라는 말이 있다. 김 기창 화백의 민화 풍 그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와는 성질이 약간 다르지만 분원산수라는 말도 있다. 분원백자 중 청화로 산수화가 그려진 것을 말하는데 접시나 연적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분원산수는 대개 정형화 되어 일정한 양식을 보인다. 저 멀리 원경으로 산이 보이고 근경의 양쪽으로는 절벽, 그리고 그 협곡을 빠져나간 중경의 강 위에는 배들이 떠있다. 사실 분원이 남한강 가에 자리 잡은 것은 수운을 이용한 교통의 편리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로 돌아가 마지막 분원이 있던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에서 도자기를 가득 실은 배를 타고 한양을 향한다고 가정해 보자. 한강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따로 흐르다 두물머리에서 만나 하나로 합쳐진다. 합쳐진 강은 흘러 분원리 앞을 지나 하남시 검단산과 남양주시 예봉산 사이의 두미강이 된다. 도미강이라고도 불리는 두미강은 가파른 산 사이에 좁은 협곡이 있어 물길이 빨라지는데 이곳이 두미협이며 1973년 팔당댐이 건설된 곳이다. 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상류에서 내려오던 배들이 두미나루에서 하루를 묵게 된다. 이를 위해 검단산 쪽으로 이 나루를 끼고 형성된 것이 바로 배알미 마을이다. 한때는 80여 호의 마을이 뱃사공들을 상대로 번창했었다고 하는데, 댐과 더불어 이제는 옛 추억이 되어 버렸다. 여하튼 물길이 세찬 협곡을 빠져나가면 이제 강물은 순해지고 저 멀리 북한산과 도봉산이 그 위용을 뽐내며 다가온다. 분원산수는 바로 이곳 일대의 풍경을 도자기에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근래 분원산수가 그려진 청화백자산수문분접시 한 점을 구했다. 정확히 말하면 지인으로부터 강제로 뺏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강권을 행사해야 할 만큼 한 눈에 반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우선 이 분접시는 크기가 작다. 지름이 5Cm가 약간 넘다보니 화장용기로도 작은 편에 속한다. 그 작은 접시에 청화로 두 줄의 선을 돌리고 그 안에 분원산수가 빼곡히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일반적인 분원산수와는 약간 다르다. 원경의 산과 중경의 배는 같으나 근경의 협곡이 제대로 나타나 있지를 않다. 좌측 협곡 위의 소나무는 그런대로 이해가 가지만 우측의 대나무인 듯한 것도 분원산수에서는 보지 못하던 양식이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 해도 작은 접시 안에 빼꼭히 그려진 분원산수의 모습은 아름답다. 접시의 테두리가 손상되어 있지만 그 결점마저도 아름다움을 손상시키지는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청화백자산수문분접시. 분접시는 분가루를 기름에 섞어 쓰기 위한 일종의 화장용기다. 지금이야 화장품이 발달해 별의별 것이 다 있지만 예전에는 분도 흔치가 않았다. 얼굴색에 맞게 쌀이나 기장 그리고 분꽃 씨를 갈아 가루를 만들고 여기에 소량의 활석가루나 칡가루 또는 황토 등을 첨가한다. 이렇게 만든 가루에 흡착성을 위해 다시 기름에 섞는데 기름은 살구씨 복숭아씨 홍화씨 등에서 추출한 것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개화기 이후 상품용으로 만든 분가루에는 납 성분이 든 것이 있어 얼굴을 망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여성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행로는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도자기로 만든 화장용기로는 분접시 외에 유병 향합 연지합 분합 분수기 등이 있다. 분접시는 원형이 기본이지만 사각이나 육각형처럼 각이 진 것도 있다. 뚜껑이 없는 분접시는 다른 화장용기와 달리 시중에서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종류다. 더구나 청화로 산수문이 그려 진 분접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흔치 않은 청화백자산수문분접시를 보고 있노라면 지금은 잊혀진 분원 인근의 정겨운 풍경과 더불어 이곳을 오가던 뱃사공들의 숨결과 여인네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랄까 진한 갈망이 느껴지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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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에 담긴 이야기(2)청자투각돈편(靑磁透刻墩片)-이 의자는 누가 앉았던 것일까 이규진(편고재 주인) 강화도에서 민속품을 수집해 답십리 고미술 상가에 넘기던 아주머니가 있었다. 그 강화도 아주머니에게서 구매한 것이 청자투각돈편이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강화도 아주머니에게는 답십리 고미술 상가 중에서도 자주 들리던 단골 가게가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 단골 가게가 문이 닫혀 있었다. 강화도 아주머니는 할 수 없이 옆 가게를 들렸는데 그 주인이 마침 나와는 친한 사이였다. 그러잖아도 이웃집 단골 물건을 중간에서 거래하기도 뭐하고 찜찜하던 차에, 내가 생각난 주인은 내게 전화를 했고, 달려간 나는 군말 없이 구매한 것이 청자투각돈편이다. 그날따라 강화도 아주머니의 단골 가게가 문이 닫혀 있지 않았더라면, 강화도 아주머니가 또 옆 가게를 들리지 않았더라면, 더구나 그 옆 가게 주인이 내게 전화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청자투각돈편은 내 것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참으로 오래전 일로서 그 강화도 아주머니도 이제는 이 세상 분이 아닐 것이 분명하다. 세월은 무정하건만 청자투각돈편과의 인연만이 남아 아직도 유정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강화도는 몽고 침입 시 정권과 왕실이 피난을 가 몽고에 항거했던 지역이다. 따라서 이 시기만 놓고 보면 강화도는 전국에서 고급 청자의 가장 큰 사용처였다고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강화도에서 출토되는 청자 중에는 의외로 명품들이 많다. 1963년 최항의 무덤에서 묘지석과 함께 출토되었다는 호암미술관 소장의 국보 제133호인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전자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강화도 아주머니에게서 구매한 청자투각돈편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런 종류로는 양질에 속한다. 청자돈으로는 보물 제416호인 이대 박물관 소장품이 널리 알려져 있다. 4개 1조로 완벽한 모습을 보이는 이 청자투각돈은 해방 전 개성 고려동에 살던 농부 김 씨에 의해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움집을 만들려고 마당 한구석의 땅을 파다 나온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농부 김 씨는 일본인들에 의한 강탈을 염려해 다시 땅속에 묻어 두었다 해방이 된 후 개성 유일의 골동 가게인 조일상회로 가져가 거금을 손에 쥐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 후 이 청자투각돈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끝내는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이 되었다. 그런데 이 청자투각돈은 유명세에 비해서는 소성 과정에서 환원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탓인지 황갈색이 더러 보인다. 그에 비하면 강화도 아주머니에게서 구매한 청자투각돈편은 환원이 잘 이루어져 유색이 비색에 가까운 편이다. 청자 의자를 두고 말하는 청자돈의 기형은 대개 비슷하다. 통형에 위는 막혀 있고 아래는 터져 있으며 옆은 대개 3단으로 나누어 투각을 하고 있다. 청자투각도편도 예외는 아니어서 옆 부분에 해당하는 곳은 투각으로 무늬를 장식하고 있다. 성형을 한 후 완전히 마르기 전에 대칼 같은 것으로 밖에서 안쪽으로 투각을 한 듯 뒷면을 보면 작업 시 태토가 밀려나 뭉친 부분들을 볼 수 있다. 투각 외의 장식으로 청자투각돈편의 윗부분에는 섬세한 음각 무늬가 들어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자세히 보면 유면이 많이 닳은 흔적을 볼 수 있다. 이로 보아 청자투각돈편은 부장품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사용하다 파손되어 버려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한민족 고유의 난방인 온돌은 그 역사가 오래 되었지만 보편화한 것은 조선 중기에 와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상류층에서는 입식 생활이 일반적이었다는 이야기다. 청자돈과 관련된 유물이 심심찮게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이 청자투각돈편은 누가 사용했던 것일까. 왕이었을까 왕비였을까 아니면 왕자나 공주였을까. 그도 아니면 어느 고관대작이었을까. 비록 한 조각 도편에 불과하지만 이 청자투각돈편을 보고 있노라면 저 아득한 시공 너머 고려인들의 화려했던 삶과 꿈이 오롯이 따스한 정감으로 전해져 오는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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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연재 ‘도자의 여로’, 파편에 담긴 이야기새로운 금요연재 ‘도자陶瓷의 여로旅路’가 여러분과 함께 한다. 집필자는 책과 고미술품 사랑방 편고재片古齋 주인 이규진 님이다. 이 연재를 통해 40여년간 전국의 폐도요지閉陶窯址에서 건져 올린 수많은 도자기 파편破片과 그에 담긴 서사敍事를 진지한 필체로 전하게 된다. 흥미로운 靑瓷透刻䃦청자투각돈 파편, 청자종靑瓷鐘 파편, 청화백자靑華白磁전접시 파편, 합천 삼가면 수집 호랑이 무늬 도자 파편 등의 수집과 그에 얽힌 사연이 이어진다. 집필자는 우리 도자기 역사를 밝히는 데는 완전한 도자기나 그 조각 난 파편이나 같은 위치에 있다는 지론持論에서 "박물관에 몇억 원짜리 도자기를 전시하는 것도 좋지만 파편 1억 원어치를 사다 놓는 것도 연구에 큰 도운이 될 텐데, 그런 생각들에 못 미치는 것이 안타깝지요”라고 강조하였다. 연재를 통해 백자의 색깔이 ‘순백’에서 ‘설백’으로, 다시 ‘청백’으로 변하였다는 사실이나 청자 색을 중국에서는 황실에서 비밀스럽게 쓰는 색이라는 의미로 ‘비색秘色’이라 하지만, 우리는 쪽빛을 ‘비색’이라고 한다는 등의 전문적인 감식안鑑識眼도 얻게 될 듯하다. 집필을 맡은 이규진 님은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 문예지 편집장을 거쳐 기업체 홍보실, 광고회사 출판 책임자 등으로 일하였다. 우리 전통문화, 그중에서도 도자문화陶瓷文化에 대해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품고 있으며, 현재는 책과 고미술품이 있는 사랑방 편고재片古齋(답십리 고미술 상가)를 운영하고 있다. 도자기 관련 서적 2천여 종, 발굴보고서류 150여 종, 40여 년간 수집한 수많은 도자기 파편에서 건져 올린 이야기, 금요연재 ‘도자의 여로’에서 풀어 놓는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편집자 주) 연재를 시작하며 "그래, 어디 한 번” 이규진/편고재 주인 세상에는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간절히 원했으나 빗나가 버린 꿈, 바로 서 보지도 못한 채 무너져 내린 꿈들, 그러나 그러한 지워진 꿈들의 회상 속에는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이 묻어나기도 한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한 움큼의 모래알처럼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의 무게는 늘 아쉬움과 허전함으로 다가오기 때문일까. 도편陶片들도 어찌 보면 이루지 못한 꿈의 흔적이요 무너져 내린 꿈의 조각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완성품으로 살아남아 인간의 온기를 느꼈어야 마땅한데도 조각나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던 세월, 그 세월이 어찌 안쓰럽지 않으랴. 그래서 나는 참 많이도 그 안쓰러운 세월 속에 발을 담그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억새풀 몸 비비며 서걱이는 폐도요지閉陶窯址에 불던 소소한 바람 소리가 귀 가득히 들려오는 듯하다. 고미술상 구석에 버려진 채 남루襤樓를 뒤집어쓰고 있던 도편들 때문에 마음은 또 얼마나 애처롭고 설레었던가. 많은 세월이 흐른 탓인지 그 아득한 날들의 발자취들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게 된다. 아니 그런 날들도 추억이 되고 이야기가 될 수 있다면 그래, 어디 한 번 일부나마 여기에 털어놓아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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