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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판소리 명창 이일주( 李一珠)의 생애와 예술논문초록 판소리 명창은 소리의 실천을 통하여 문화의 정수를 계승·창조함으로써 민중 측의 평가와 선택을 받아 민족문화 총체의 형성에 기여하는 사람이다. 판소리의 사설이나 그 음악적 특성 등을 알아보는 것도 좋지만, 판소리의 전승자요 연주자인 명창을 논하는 것도 판소리 연구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판소리는 구두전승예술이기 때문에 후계자에게 전수하고 죽으면 그 전수한 것 이외에는 각 명창에 대한 것은 모두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대단한 명창이었다는 말만 몇 가지 에피소드와 더불어 무슨 전설처럼 전해진다. 그래서 옛 명창을 논하기가 힘이 든다. 판소리를 할 때, 나아가서는 학문적 작업의 대상으로 삼으려 할 때, 지난날의 명창에 대한 검토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부각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한 예술가의 생애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데는 여러 가지 까닭이 있을 수 있겠다. 첫째 한 예술가의 삶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를 들 수 있고 둘째, 그 예술이 속하는 문화와의 단절을 중시해서 관심이 집중되는 경우 등을 상정할 수 있다. 그런대로 가장 중요한 것은 후자의 경우일 것이다. 종래의 이력서식 생애를 가지고는 도저히 그 예술이나 그가 속한 문화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이미 작고한 명창들의 생애사는 틀에 맞춰서 모든 것이 재구성되고 말았기 때문에 안타깝기 그지없다. 세월이 더 흘러가면 짜맞추기식 명창론이 더욱 심화되어 예술을 알기 위한 생애사는 전혀 쓸모없는 것이 될 가능성이 짙다. 이러한 문제를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명창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명창 이일주(李一珠)는 충청도에서 출생하여 전라도에 터를 잡아 동초제 2대 전수자로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 2호로 지정되어 있는 현존하는 소리꾼이다. 그의 판소리는 국창 이날치의 증손이라는 가계의 내력과 함께 특히 부친 이기중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는 "동초 김연수바디”를 오정숙 명창으로부터 이어받아 전북을 동초제의 성지로 끌어올린 주역이기도 하다.부친 이기중의 영향으로 판소리에 입문한 이일주는 당대를 대표했던 박초월, 김소희 문하를 사사하면서 명창들의 음악세계를 물려받음과 동시에 새로운 바디 탄생을 예고할 수 있었다. 그 후 동초제 여류명창 오정숙을 만나 5바탕에 적공함으로써 판소리계의 이목을 받아왔다. 타고난 목구성과 피나는 수련으로 성음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는 평가를 받는다. 동초제 심청가로 전주대사습에 도전하여 1979년 영예의 장원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써 자타가 공인하는 명창으로 거듭나기에 이른다. 그 후 1982년 도문화상 수상과 함께 1984년에는 전라북도 최초의 무형문화재가 되었다. 1986년부터 전라북도립국악원 창악교수로 초빙되어 2001년까지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그 결과 전국 최다 대통령상 수상자를 배출하기도 하였다.한편 1990년 KBS 국악대상에 선정되었으며, 2006년 12월에는 목정문화상을 2007년 11월에는 동리대상을 수상하였다. 소리에 임하는 정열도 대단하여 1981년 심청가 완창발표회를 시작으로 1983년 춘향가, 1990년 수궁가, 1992년 흥보가 등을 국립극장에서 완창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신나라 레코드사의 초청으로 남도민요, 판소리 5바탕이 완창 취입되어 출반되고 있다.이상에서 이일주의 생애 및 예술 활동과 예술 세계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현존하는 판소리 명창의 일대기를 조감할 때, 이일주에 대한 연구는 단편적인 생애사와 음반의 해설서의 단편적인 언급만 이루어지고 있으며, 판소리사적 위상에 걸맞은 이일주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에 본고는 이일주의 생애와 예술을 필자와의 대담을 통하여 실상의 명쾌한 접근을 이루었으며, 왜 이일주가 판소리사에서 새롭게 주목되어야 하는가를 자세히 살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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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송순섭 판소리 연구논문초록 송순섭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현역 동편제 소리꾼이다. 판소리의 위상이 세계적으로 증대된 오늘날, 판소리 ‘보존’과 ‘발전’을 위해 힘을 기울이는 송순섭의 노력은 더욱 눈길을 끈다. 본 연구에서는 송순섭이 지금까지 형성해 온 예술세계를 살피기 위해 종합예술인 판소리의 장르적 성격을 살리고자 공연학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공연학은 인류학의 인접학문으로 인류학의 방법론이 작용된다. 이러한 배경 하에 문헌자료 및 음반자료를 중심으로 전개된 종래의 판소리 연구의 방법론에 송순섭 본인과의 면담 조사를 첨가하였다. ‘판소리 연구’ 이름 아래 송순섭의 창극 활동까지 주목한 것은 공연학적 판소리 연구의 전제조건인 공연자 검토 단계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기 때문이다.예술세계 구축에는 성장과정이나 과거의 기억, 사승·교류 관계 등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때문에 송순섭의 예술세계를 고찰하기 전에 제Ⅱ장에서 생애사 기술을 시도하였다. 출생부터 현재까지 ‘가족 관계와 판소리계 입문→박봉술과의 만남→김연수와의 교류→전수자로서 시련→인간문화재로서 후손 교육’이라는 통시적인 흐름에 따라 정리하였다. 송순섭은 박봉술을 직계 스승으로 모심으로써 정통 동편제 계승자로서의 의식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김연수와의 교류를 통해 사설의 중요성과 적극적인 창작 의욕을 길렀다. 또 전수자로서 내림소리의 완창 공연에 진력하는 모습과 인간문화재 지정 후 교육자로서의 면모 확대 양상을 살폈다.송순섭의 주된 활동 내용은 판소리의 공연 및 사설 정리, 창극 공연의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제Ⅲ장에서는 내림소리 공연 및 사설 정리에 주목하여 여기에 나타나는 예술세계를 살폈다. 내림소리 세 바탕은 현존 판소리 다섯 바탕 가운데 동편제적인 요소가 강하다. 탄탄한 구조와 간략한 사설이 남성적이라는 동편제를 대표하는 특징은 송순섭에 와서 더욱 강화되었다. 송순섭 창본은 음악·문학·연극적 견지에서 수용자 입장을 최대한 고려하여 형성되었다.즉 청관중의 청각적 재미 추구, 독서물로서 가치 확장, 사설 압축과 너름새 확대가 그 창본의 특징이다.제Ⅳ장에서는 창극 공연에 주목하여 그 예술세계를 살폈다.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한 창극에서는 대부분 일본과의 불행한 역사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기서는 송순섭의 애국애족 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한편 설화나 동화 속의 이야기를 주제로 삼은 창극에서는 한국적인 정서를 전하였다. 송순섭의 창극에는 연출적 지향이 셋으로 대분된다. 청관중 지향으로 오락성 강화, 후계자 지향으로 교육적 활용, 작중인물 지향으로 제의성 강조가 그것이다.제Ⅴ장에서는 송순섭 판소리의 판소리사적 가치와 의의를 확인하였다. 송순섭이 가진 특징적인 세 가지 면모에 주목하여 그 가치와 의의를 고찰하였다. 첫째 ‘국악 불모지를 개척한 소리꾼’으로서 부산에 거주한 24년 동안 국악 부흥을 위해 진력하였다. 부산에서 변함없는 국악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그의 노력이 밑바탕된 결과라 하겠다. 둘째 ‘동편제 소리를 계승하는 소리꾼’으로서 송흥록을 시조로 한 동편제 법통을 간직하고 있다. 셋째 ‘창극인으로서 소리꾼’으로서 창극 공연을 통해 국악계 내외의 정신적 거리를 줄여줌과 동시에 국악계의 미래를 쌓아가는 후손 교육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본래 ‘한국 고유의 민속예술’이었던 판소리는 ‘세계의 소리’로 의의가 확장되었다. 이에 따라 판소리계는 ‘보존’과 ‘발전’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극복해야만 한다는 사명을 따게 되었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본 연구에서는 송순섭에 의한 ‘후학 양성’과 ‘국악계의 문호 해방’을 제시하였다. 시대 요구에 적합한 활동을 의욕적으로 지속하고 있는 송순섭이야말로 판소리를 한 층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소리꾼이라 믿으며, 21세기 판소리와 소리꾼으로서의 참모습을 전망하였다.Song Sun-seop is current dongpyeonje professional performer who is designated as a holder of No. 5 Pansori , an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property. Today when the fame of Pansori is increased internationally, Song Sun-seop's effort trying to 'preserve' and 'develop' the Pansori pays more attention. This study tried the Performance Studies approach emphasizing the genre features of Pansori as a composite art in order to investigate his art world which has been formed until now. The Performance Studies as a related study relates to the anthropology, so the methodology of anthropology is used in this study field. This study added the data from interviewing Song Sun-seop to the existing methodology used in previous Pansori studies, which were developed around the literature review and music album data under such background. Under the title of 'Pansori Study', the reason that this study focused on his activity in Changguk(Korean traditional opera) was because the activity was a necessary factor for the stage of reviewing performer as the precondition of Pansori research using the Performance Studies approach.The performer's growth process, his remembrances, his relationship with teachers and successors are reflected in forming the art world. So, before reviewing Song Sun-seop's art world, this study tried to describe his life history in Chapter II. From the birth to today, his life story is described in time order under the subtitles of his family and his entrance to the Pansori world → his meeting with Park Bong-sul → his exchange with Kim Yeon-su → his ordeal as a Pansori bearer → his teaching successors as a human cultural asset. By being directly taught by Park Bong-sul, he established the consciousness as the orthodox bearer of dongpyeonje. Through his exchange with Kim Yeon-su, Song Sun-seop recognized the importance of narration called as saseol in Pansori, and raised active creation spirit. Besides, this study investigated his appearance taking full efforts in performance of naerim-sori(ancestral sound of voice and music) in full as the bearer of dongpyeonje and his expanded ability as a teacher after being designated as a human cultural asset.Song Sun-seop's major activities can be divided into 3 categories: performances of , , ; the saseol summarization; the performance in Changguk. Chapter III focused on his naerim-sori performances and saesol summarization, and investigated his art world seen in these activities. 3 batang(version) Pansori works of naerim-sori have the strongest features of dongpyenje among the existing 5 batang Pansori works. Dongpyeonje's representative, masculine features of solid structure and simple are more reinforced by Song Sun-seop. His changbon(a vocal music script) was composed in fully considering the receiver from the aspects of music, literature and drama. That is, the increased auditive interest for audience, the expanded value as the reading text, the compressed saseol and the expanded neorumsae (motions) were the features of his changbon.In Chapter IV, this study focused his performances in Changguk and investigated his art world around such activities. Most Changgeuk by Song Sun-seop based on historical figures have the background of Korean's misfortunate history colonized by Japanese. In this section, Song Sun-seop's patriotic spirit can be seen. Meanwhile, in Changguk dealing the tales or fables, he delivered Korean emotions to the audience. His performances in Changguk are divided into 3 directional orientations: the audience-orientation for reinforcing the amusement, the successor-orientation for educational utilization, and the character-orientation for emphasizing the proposal feature.Chapter Ⅴ identified Song Sun-seop's value and meaning as a professional performer in the Pansori history. This study focused on his 3 aspects as a performer and investigated their values and meanings. First, he have took full efforts for re-boosting the gukak(Korean traditional music) for 24 years while he has lived in Busan as the performer developing the barren land against gukak. Gukak's constant popularity in Busan may be the result from his efforts. Second, as the successor of the songs of dongpyeonje, he succeeded to the dongpyeonje line originated from Song Heung-rok, the ancestor of dongpyeonje. Third, as the performer playing the Changguk, he has greatly contributed in narrowing the psychological distance between gukak world and out world through several Changguk performances as well as training disciples to be responsible for future gukak world.Pansori, which was originally the Korean unique folk art, expanded its meaning into the world sound. Accordingly, the Pansori world came to have the mission to solve the both challenges of 'preservation' and 'development'. To solve these matters, this study proposed the both solutions of training disciples and opening the door of gukak world. Believing that Song Sun-seop consistently doing activities suitable for the current age's needs would be the professional performer to leading the Pansori to a higher plane of achievement, this study forecasted the Pansori's status in 21C and Song Sun-seop's true appearance as a professional perfor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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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김동진류 대금산조 연구논문초록 본 연구는 김동진류 대금산조의 음악적 특징을 고찰하는 것으로 김동진의 생애사 연구를 통해 그의 음악활동과 김동진 대금산조 형성을 논구하고, 김동진류 대금산조의 음악적 특징을 고찰하는 것으로 본 연구를 통해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첫째, 김동진의 생애사를 검토하여, 그의 음악활동이 기반이 되어 김동진류 대금산조가 형성되었음을 밝혔다. 어린 시절부터 남도예인들의 풍류를 보고 자라며 자연스럽게 국악인으로서 입문하게 되었고, 고수로 활동한 그의 형 김동준 및 당대의 뛰어난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의 음악세계를 확장하였으며, 김동진류 대금산조를 탄생시켰다. 둘째, 김동진류 대금산조의 독자선율을 추출하기 위해 김동진이 영향을 받은 강백천류 대금산조 및 한주환류 대금산조와 선율 비교분석을 한 바, 조 구성과 선율 진행에 있어 강백천의 가락보다는 한주환의 가락과 매우 유사한 점이 많음을 알 수 있었다. 보편적으로 김동진류 대금산조는 시나위더늠의 산조로 인식되고 있으나 시나위더늠의 강백천류 대금산조 및 소리더늠의 한주환류 대금산조와의 비교분석을 통해 김동진류 대금산조는 소리더늠의 한주환류 대금산조와 관련성이 깊다. 조의 구성에서도 강백천류 대금산조에는 우조보다 계면조로만 나타난데 비해, 한주환류 대금산조와 김동진류 대금산조는 조의 명칭만 다를 뿐 대부분 동일한 조로 구성되어 있다. 셋째, 강백천류 대금산조의 독자선율 중 유사·반복선율을 분석하여 그 가락을 여타 음악과 비교 분석한 결과, 김동진류 대금산조의 특징적인 선율은 남도의 판소리와 민요 선율에서 기악화된 선율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밝혔다. 이상 본 연구의 의의는 첫째, 대금산조의 명인 김동진은 성장과정에서 주변의 음악적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였다.둘째, 보편적으로 김동진류 대금산조는 시나위더늠의 강백천류 대금산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소리더늠의 한주환류 대금산조와 더 깊은 관련성이 있음을 밝혔다.셋째, 김동진류 대금산조에 존재하는 선율 중 다수는 판소리와 남도민요의 선율을 기악화 한 것임을 조명하였다.김동진은 유년시절 판소리 명창들과의 조우가 잦았고, 성장 후 상경하여 ‘종로패’란 이름으로 민속악의 명인들과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창극, 무용, 민요 등의 반주와 시나위 합주, 대금산조 독주 등의 연주활동을 통해 민속예인으로서의 왕성한 음악인생을 펼쳤으며, 김동진류 대금산조를 완성하여 후대에 계승토록 하였다.다만, 그의 뛰어난 예술성에도 불구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 버린 점과 더불어 지역적인 한계로 인해 많은 연주자들에게 전해지지 못하였다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본 연구를 통해 김동진류 대금산조의 맥이 오롯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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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란 무엇인가판소리는 '판'과 '소리'의 합성어이다.문제는 ‘판’의 의미이다. 우리말에서 ‘판’의 일반적 의미는 ‘상황·장면’과 ‘여러 사람이 모인 곳’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취할 경우 판소리라는 이름은 ‘다수의 청중들이 모인 놀이판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소리는 노래의 다른 말로, 목소리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판소리는 여러 시청자들을 상대로 하여 판에서 부르는 노래라고 통칭할 수 있다. 그러나 가곡, 별곡, 영산(단가) 등과 같이 옛날 놀이판에서 불리던 소리는 판소리라고 하지 않고, 판소리에 대비되는 말로서 '토막소리'라고 한다. 판소리는 이런 '판의 노래'를 범칭하지 않는다. 창자가 고수의 장단에 맞추어 서사적이고 극적인 긴 이야기를 판을 짜서 부르는 특정한 공연만을 판소리라고 한다. 판소리는 선생에서 제자에게로, 가창식 전수에서 가창식 습득으로 전승, 발전되었다. 즉, 사제전승(師第傳承) 및 구비전승(口碑傳承)에 의존해왔다. 한 작품을 익히는 데도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북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창(소리), 말(아니리), 몸짓(너름새)을 섞어가며 긴 이야기를 엮어가는 것을 말한다. 창자가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서사적인 이야기를 소리와 아니리로 엮어 발림을 곁들이며 구연하는 고유의 민속악. 구비서사시이다. 판소리는 전통적으로 광대라고 불려진 하층계급의 예능인들에 의하여 가창·전승되어 왔다. 그들은 때로는 농촌이나 장터에서 노래했고, 때로는 양반·부호들의 내정(內庭)에서 연희하기도 하였다. 판소리의 유파 동편제 동편제는 운봉·구례·순창·흥덕 등지의 이쪽 즉, 전라도 동북지역에 전승되어 오는 소리제를 순조 때의 명창 송흥록(宋興祿)의 소리제에서 송광록(宋光祿)·박만순(朴萬順)·송우룡(宋雨龍)·송만갑(宋萬甲)·유성준(劉聖俊)으로 전해지는 소리제를 주축으로 한다. 그 밖에 김세종(金世宗)·장자백(張子伯), 정춘풍(鄭春風)·박기홍(朴基洪)으로 전해지는 소리제 또한 동편제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동편제 소리는 비교적 우조(羽調)를 많이 쓰고 발성을 무겁게 하고 소리의 꼬리를 짧게 끊고 굵고 웅장한 시김새로 짜여 있다. 서편제 서편제는 보성·광주·나주 저쪽, 즉 전라도 서남지역에 전승되어 오는 소리제로 철종 때의 명창 박유전(朴裕全)의 소리제에서 이날치(李捺致)·김채만(金采萬)으로 전해지는 소리제를 주축으로 하고, 그 밖에 정창업(丁昌業)·김창환(金昌煥)·김봉학(金奉鶴)으로 전해지는 소리제로 큰 줄기를 이루었다. 서편제 소리는 비교적 계면조(界面調)를 많이 쓰고 발성을 가볍게 하며, 소리의 꼬리를 길게 늘이고 정교한 시김새로 짜여 있다. 중고제 중고제는 경기도·충청도지역에 전승되어 오는 소리제로 순조 때의 명창 김성옥(金成玉)·김정근(金定根)·황호통(黃浩通)·김창룡(金昌龍)으로 전하여지는 소리제와 또한, 순조 때의 명창 염계달(廉季達)·고수관(高壽寬)·한송학(韓松鶴)·김석창(金碩昌)으로 전하여지는 소리제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중고제 소리는 동편제 소리에 가까우며 고박한 시김새로 짜여 있다. 강산제 강산제는 서편제의 수령 박유전이 말년에 전남 보성군 강산리에서 여생을 보내며 창시한 유파이다. 박유전은 젊었을 때 뛰어난 기량과 목소리로 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그의 사랑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곳에 묵고 있는 많은 유생들과 친밀하게 지내게 되었다. 유생 중에는 판소리에 대한 높은 견식과 일가견을 가진 이들이 있었고, 그들이 피력한 조언을 바탕으로 창시한 것이 바로 강산제이다. 강산제는 서편제가 가지는 애절한 느낌을 지양하고 될 수 있으면 점잖은 가풍(歌風)을 조성하도록 하는 게 특징이었는데, 유학의 영향을 받아 삼강오륜에 어긋나는 대목은 삭제, 또는 수정하는 게 보통이었다. 강산제의 대표적 판소리는 '심청가'이며, 이 계통의 명창으로는 박유전, 정재근, 정응민, 박춘성, 성창순, 성우향, 조상현 등이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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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선우일선의 신민요 연구초록 일제강점기 우리 음악계는 신민요라는 서양음악의 영향을 받은 음악 사조가 발생·유행하면서 전환기를 맞게 된다. 국악계와 대중음악계가 모두 신민요에 주목하며 일시적 경향으로서 신민요가 아닌 대세적 음악으로 신민요를 수용하게 된 것이다. 특히 1934년 로 데뷔한 선우일선은 이러한 신민요의 대중적 입지를 공고히 한 대표적인 가수로 1940년대 초까지 활동하면서 많은 신민요와 민요, 가요곡을 발표하였다. 또한 선우일선의 신민요는 오늘날까지 남북한에서 민요 혹은 가요라는 이름으로 널리 보급되며 불리고 있다. 이 논문은 선우일선 신민요의 음악적 특징을 비롯해, 오늘날 선우일선의 신민요가 어떤 방식으로 수용되고 있는지를 연구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선우일선이 부른 신민요의 특징 중 하나는 토속적인 단어를 사용하거나 순 우리말의 입소리를 가장 잘 활용한 소리꾼이라는 것으로 언어선택의 탁월성을 들 수 있다. 전달성의 어려움 때문에 ‘고어’ 내지 ‘토속어’를 노래속에 담아내는 것이 쉽지 않음에도 선우일선의 신민요속에는 아름다운 옛 언어들이 자연스럽게 노랫말로 사용되고 있다.선우일선 신민요 선법의 특징은 경토리의 곡들이 대부분이고 가끔 메나리 토리와 육자배기 토리도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선우일선이 경서도 소리에 능통했다는 뜻인데, 민요조로 된 서도잡가 , 경기민요 , , 과 메나리조 민요 , , 등 많은 민요음반을 남겼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반면 유행가를 많이 부르지 않은 덕분에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다른 신민요 가수와 달리 일본식 요나누키 음계가 주를 이루는 곡은 거의 없으며, 장음계와 화성 단음계를 이용한 흔적도 보인다.선우일선의 신민요 가운데 가장 많이 보이는 선법은 경토리 계열이며 이러한 경토리 계열의 신민요는 주로 신경토리와 신반경토리로 신민요로 나뉜다.선우일선의 신민요 가운데 오늘날까지 활발히 전승되고 있는 곡은 , , , , 등 약 10여곡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제대로 간직한 채 전승되는 곡이 있는가 하면 아예 다른 느낌의 곡으로 변화하여 불리고 있는 곡들도 있다.(중략) The musical world of Korea was at a turning point, as Sinminyo(new folksong), the trend of music affected by western music, emerged and became popular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The Korean classical music circle and the Korean popular music circle all have accepted Sinminyo, noting its value, not in a passing phase but in the mainstream.Particularly, Seonwooilseon who debuted back in 1934 with the song [Catching the flowers], made Sinminyo become widely popular and continued her singing career, releasing Sinminyo, folk songs, and popular songs, as a representative singer until the early 1940’sAlso, Seonwooilseon’s Sinminyo, widely known as a folk song or a popular music in South and North Korea to this day, is still sung.In this thesis, the goal is to gain a understanding of how Seonwooilseon’s Sinminyo has been accepted and the characteristics of Seonwooilseon’s Sinminyo.One of the characteristics of Seonwooilseon’s Sinminyo is her excellent choice for the language, as a singer using indigenous terms and expressions as well as YIBSORY of pure Korean words.Though it is not easy to express archaic words or indigenous words through the songs due to the difficulty of communicating ideas and feelings, beautiful traditional words are naturally being used in her lyrics.The mode of Seonwooilseon’s Sinminyo features that many of her songs are Gyeongtori, and some are Menaritori and yukjabaegitori.This means Seonwooilseon was a woman versed in Gyeonseodosori, and this can be confirmed that she released many records of folk songs such as from Seodojapga, , , from Gyeonggiminyo, , , from Menariminyo, and so forth..On the other hand, because she didn’t sing many popular songs, unlike other Sinminyo singers around the same time, few of her songs had Japanese Yonanooki scale and some even show major scales and harmonic minor scales.The most remarkable mode of her Sinminy is in Gyeongtori category, and this kind of Sinminy is mainly divided into Singyeongtori and Sinbangyeongtori.So far, about ten songs such as , , , , habe been inherited among Seonwooilseon‘s Sinminyo, but some have been sung in original versions while others have been changed to new versions."Of these, and are inherited into and from Gyeonggiminyo, into from Seodominyo. However, they are inherited not in original versions but in new versions, for political reasons or melodic complex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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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경기민요 명창 묵계월의 생애사 연구논문초록 본 논문은 경기민요 명창 묵계월의 생애사Life history를 통해, 경기민요의 근․현대사를 정리함으로써, 전통예술의 학론적 기반을 구축하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명창의 생애사’란 명제의 특성상 가계家系는 물론, 특히 ‘구술심전口述心傳’에 의한 도제식徒弟式 전수傳受 교육상 사승師承 관계를 예의 주시했다. 묵계월의 가계는 당시 대부분의 가창가歌唱家가 그러했듯이 한미寒微해 11세부터 20세까지 양어머니에 의해 교육된 소리꾼으로 출발했지만, 중요무형문화재로 선발된 이후 비로소 예인藝人으로서의 신분 상승, 나아가 그 영예에 충실하고자 자신의 사명감에 솔선수범率先垂範하였음을 증명하였으며, 사승관계를 통해 경기민요에 관심 갖게 된 동기 및 그 학습과정과, 공연 및 음반활동, 특히 경기민요연구회 결성과 연구회 활동, 나아가 경기민요의 무형문화재 등재 과정을 경기민요의 발달사적 차원에서 정리하였다. 물론 이상의 정리 작업이 참고문헌을 통한 연구·정리가 아니라. 온전히 한평생(80여년) 경기민요 가창자로 살아온 묵계월과, 40여년 스승으로 모시고 함께 활동해 온 연구자와의 대담 녹취는 그 어떤 유형의 문헌적 기록 이상의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녔으며, 노령으로 인한 기억상실은 몇몇 문헌에서 보충하므로, 묵계월 개인의 전기적 가치 이상 경기민요의 발전사적 가치 및 미래 제시적 연구물이고자 하였다. 특히 목계월·안비취·이은주 3인을 주축으로 한 경기민요연구회의 세 명인은 경기민요 무형문화재로 등재된 이후, 이들 명인은 생활인으로서의 명창이 아닌, 공인, 이른바 예인藝人으로서의 품위는 물론, 사명을 다 했음을 무대공연 및 왕성한 음반활동, 그리고 민속예술의 대중화에 기여한 민속공연활동의 시례를 다양한 팜플렛 및 초대장·홍보게시물 등 자료 제시를 통해 예증했다. 그 중 특히 묵계월의 남다른 업적은 거의 독보적으로 이문원 소리선생으로부터 전수傳受해 완창完唱해 오던 송서율창誦書律唱의 맥을 제자 유창에게 전수傳授해 2009년 서울시 문화재 제 41호 송서율창 보유자에게 계승하므로 스승의 도는 물론, 당대에서 끊어질 뻔했던 한 전통예술의 맥을 이었다는 점에서 참다운 사도師道를 다했다 할 것이다. 이 밖에도 묵계월의 문하에는 인간문화재 보유자 2명, 전수조교 4명, 전수 장학생 5명, 대통령상 수상자 9명, 경기민요 이수자 36명 등 많은 후학을 양성하므로 민속예술가로서는 물론, 위대한 교육자의 역할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예능 못지않게 중시한 인성교육의 면면을 점검하고 예증하였다.따라서 묵계월 명창 한 분의 생애사 논고였지만, 이 논고를 통해 초기 한국 민요의 발달 과정은 물론, 앞으로 국악인 모두가 사명처럼 수행해야 할 과제를 제시하므로 경기민요의 발전사 및 위대한 교육자로서의 면모를 밝혀 후학의 귀감으로 삼고자 했다.This article aims to establish an academic basis of Gyeonggi folk song, a type of Korean traditional art by examining the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of Gyeonggi folk song through the life history of a master singer Muk Gyewol. Following the typical definition of ‘life history’ of a master singer, the article particularly focuses on both the pedigree, and the unique relations between a master and pupils that are formed especially when obeying to masters and his or her teachings are considered as strictly absolute and such teaching are usually orally passed down to the pupils.As most other singer families did in Korea, Muk’s family had low social status. When she was eleven, Muk started her career as a professional folk song singer under the teachings of her stepmother, which continued till she turned to twenty. It was not until she was selected as an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when she was finally upwardly mobile. The article shows how Muk took the initiative and set an example of a master singer in order to devote herself to the honor of the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Also the article attempts to explain Muk’s reasons and motivations to get involved in Gyeonggi folk song, the learning process, performance and other activities such as forming Gyeonggi folk song research association and its activity by thoroughly understanding the relations between a master and pupils. Moreover, the process of listing Gyeonggi folk song as an Intangible Cultural Property was examined from the aspect of the development of the Gyeonggi folk song.This research is not just conducted through the examinations on references or previous researches. It also includes the record of conversation between the researcher who has been a pupil of Muk for about 40 years and Muk herself who has lived as a master singer of Gyeonggi folk song for her whole life. Surely it is more valuable resource than any other literature records on this topic. However, Muk’s loss of memory due to old age was supplemented by other literature records. Hence, the article proposes more than just an individual biography: the valuable development of Gyeonggi folk song and its future value. After they were designated as an Intangible Cultural Treasure, Muk Gyewol, An Bi-chwi, and Lee Eun-joo, who are master singers as well as the main figures of the Gyeonggi folk song research association, not only maintained dignity as a public figure but also greatly performed their mission as a master singer. The article also illustrates it through their stage performance, active involvement in recording and shows how folk performance contributed to popularization of folk art by investigating various pamphlets, invitations and advertisements of the performance.The unique and great achievement of Muk Gyewol is in her making great efforts to teach and passing down her skills to her pupils, which can be seen as unequaled. She had carried on the legacy of singing Songseo-yulchang that she learned from her teacher, Lee Munwon and succeeded to her pupil, Yoo Chang who were designated as the 41 Intangible Cultural Treasure of Seoul in 2009. As a result, it can be said that Muk prevented the tradition from being broken off. Surprisingly, under Muk’s teaching there are two students who hold the designation of Human Cultural Asset, four apprentices as assistant instructors, five apprentices with scholarship, nine awardees of President Prize and thirty six students who completed the Gyeonggi folk song course. She fostered numerous pupils and fulfilled the mission both as a master singer and folk artists. Furthermore, she not only focused on the students’ skills as a singer but also paid close attention to build students’ upright character as an individualIn conclusion, the article deals with the life history of a master singer, Muk Gyewol and covers the overall history of Korea’s Gyeonggi folk song. Also it shows how Muk Gyewol has set an example of a great teacher for the future generation and successfully fulfilled her mission as a master singer through her whole life. Finally it suggests tasks that are assigned to other younger Korean folk sing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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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와 김초향1933년 판소리 명창들이 중심이 되어 산조명인(散調名人)·경서도소리명창·민속무용의 명인들을 규합하여 판소리·남도잡가·창극·산조·민속무용·경서도소리 등 한국전통음악의 공연 및 전수를 목적으로 모인 단체이다. 1933년 5월 10일에 당시 여류명창 김초향(金楚香)의 발의로 서울 관훈동에 있던 김초향의 집에 송만갑(宋萬甲)·김창룡(金昌龍)·이동백(李東伯)·정정렬(丁貞烈)·한성준(韓成俊) 등 판소리명창을 중심으로 한 여러 민속악인들이 모여 창립하였다. 연구회는 만들었으나 사무실을 마련하지 못하였으므로 1935년 서울 익선동에 있던 당시 여류명창 박녹주(朴綠珠)의 집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박녹주의 주선으로 전라남도 순천의 독지가 김종익(金鍾益)의 후원을 받아 그 해에 익선동에 큰 한옥을 마련하여 사무실을 차렸다. 당시 참가한 명인·명창들을 보면 송만갑·이동백·김창룡·정정렬·김연수(金演洙)·정광수(丁珖秀)·김준섭(金俊燮)·김초향·박녹주·김여란(金如蘭)·임소향(林少香)·김소희(金素姬)·박초월(朴初月) 등이었고, 김재선(金在先)·정원섭(丁元燮)과 같은 명고수(名鼓手), 강태홍(姜太弘)·박종기(朴鍾基)·한주환(韓周煥)·박상근(朴相根)·신쾌동(申快童)·정남희(丁南希) 등의 산조명인, 오태석(吳太石) 등 가야금병창명인, 한성준·박소군(朴素君)과 같은 무용명인(舞踊名人), 김연승(金演承)과 같은 경서도소리명창 등이다. 연구회는 여러 가지 공연에 참가하였고, 1935년에는 창극단체를 조직하여 그 해 봄에 정정렬 편곡으로 창극 「춘향전」을 창립기념작품으로 서울동양극장(東洋劇場)에서 공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힘입어 조선성악연구회 창극단은 대구·부산·진주·광주·전주·함흥·평양·마산·충무·여수·목포·대전·청진·사리원·개성 등지의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공연하며 성황을 이루었다. 김초향(金楚香, 1900-1983)은 경북 대구(현재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판소리 여성 명창이다. 성명을 김초향(金初香)이라고 기록한 문헌도 있다. 12세(1911)부터 대구에서 가곡을 배웠고, 14세에 서울로 올라와 이동백(李東伯, 1866-1949), 김창환(金昌煥, 1855-1937), 정정렬(丁貞烈, 1876-1938), 송만갑(宋萬甲, 1865-1939) 등에게 소리를 배웠다. 14세에 장안사의 전속기생으로 들어가 판소리 몇 대목을 배우고, 바로 극장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공연으로 적지 않은 인기를 끌었던 그는 당시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기획 기사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소개되기도 했다. 30대 초반까지 무대에서 판소리 공연을 하고 레코드에서 음반을 취입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32세 때, 조선음률협회에서 박록주(朴綠珠, 1909-1979)·박월정(朴月庭)·김초향의 특별공연으로 기획한 삼대여류명창회(三代女流名唱會)에서 단가 〈장부한〉과 〈소상팔경〉, 〈춘향가〉 중 '사랑가', 〈흥보가〉 중 '흥보 집터 잡는 대목', 〈심청가〉 중 '화초타령' 등을 불렀다. 34세에 조선성악연구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는데, 그의 익선동 자택에서 조선성악연구회가 발족했으며, 창립 초기에는 그곳이 연구회 건물로 사용되었다. 결혼 후 국악계를 떠나 은거했다. 단가 〈운담풍경〉(Okeh 12100 短歌 雲淡風景 金楚香 鼓韓成俊), 〈춘향가〉 중 '박석티'(Victor 빅타-大衆盤 KJ1075 春香傳 박石틔(上) 金楚香 伴奏빅타-朝鮮樂團), 〈심청가〉 중 '범피중류'(Columbia 40081-A·B 沈淸傳 泛彼中流(上)·(下) 金楚香), 〈흥보가〉 중 '흥보 집터 잡는 대목'(Okeh 12107 興甫傳 興甫집터닥는데(上)·(下) 金楚香 鼓韓成俊), 〈적벽가〉 중 '삼고초려'(Regal C174-A·B 三國誌 三顧草廬 (一)·(二) 金楚香 鼓韓成俊·Regal C175-A·B 三國誌 三顧草廬(三)·(四) 金楚香 鼓韓成俊) 등을 유성기 음반으로 남겼다. 성음의 억양이 지나치고, 일구 일절에 편벽의 힘을 쏟아 전체적으로 부자연스럽다는 평이 있었다. 이화중선(李花中仙, 1899-1943)과 대비되는 창법을 구사했다고 하는데,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창법보다는 격정적으로 질러내는 창법을 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흥보가〉를 장기로 삼았으며, 〈춘향가〉 중 '사랑가'도 잘 불렀다. 강태홍(姜太弘, 1894-1957)과 함께 〈운담풍경〉을 작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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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가야금 병창 중요무형문화재인 향사(香史) 박귀희 명창우리나라 최초의 가야금 병창 중요무형문화재인 향사(香史) 박귀희 명창(1921∼1993) 박귀희 명인의 고향인 경북 칠곡군은 2012년 향사 박귀희 명창 뮤지컬(연희 창극)을 제작·발표하고, 전국가야금병창대회도 열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칠곡군에서 호국평화공원과 연계하여 향사 박귀희 명창 기념관을 건립하여 국립전통예술고 유품전시관으로부터 유품을 확보하여 전시할 계획이다. 평생을 국악발전에만 쏟은 국모 박귀희가 있었기에 우리 국악은 체계를 잡고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국악을 통해 우리 문화의 초석을 다진 향사 박귀희의 숭고한 예술정신을 기리기 위해 고향 칠곡에서는 칠곡향사아트센터의 개관을 앞두고 고인의 유품 기증이 이어지고 있다. 칠곡군 관계자에 따르면 칠곡향사아트센터 내 박귀희 명창 전시실 조성을 위해 고인의 유품을 기증받은 결과 약 160여 점에 달하는 유품을 수집했다고 밝혔다. 고인이 설립한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구 국악예술학교)를 비롯하여 고인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다수의 유품을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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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제무형유산영상축제-우리는 언제나 태평성대를 기원한다우리는 언제나 태평성대를 기원한다 TV만 틀면 안 좋은 내용의 뉴스들이 나온다. 이러한 난세에 우리의 안녕을 바라며, 과거의 우리 선조들이 태평성대를 기원했던 방법인 태평무를 소개하고 동작한다. 태평무의 역사와 특징을 사료와 전공자의 실제 시연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우리의 안녕을 염원하는 방식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 정신과 태평을 기원하는 마음은 같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끝맺는다. #무형유산유튜브공모전 #영상축제공모전 #국제무형유산영상축제 #우리는언제나태평성대를기원한다 http://iiff.i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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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제무형유산영상축제--30년대 판소리 트랙12020국제무형문화유산영상축제 코로나로 각종 전통행렬이 취소돼 30년대 판소리를 활용해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보았다. 1935년 '새타령' 음원은 국악음반박물관이 2003년에 최초로 복각, CD음반으로 제작 공개하여 여러 방송, 인터넷상에 다양한 경로로 많이 복제 배포된 바 있다. 전통행령은선왕조를 창건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 봉안행렬을 참고 했습니다.봉안이란 신주(神主)나 화상을 받들어 모시는 것을 말한다. 1688년 숙종 14년에 서울 영희전의 태조 어진을 새로 모사하기 위해 전주 경기전의 태조어진을 서울로 모셔갔다가 다시 전주로 모셔오는 과정을 재현하는 모습이다. #무형유산유튜브공모전 #영상축제공모전 #국제무형유산영상축제 #30년대판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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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작화 : [장편소설] 흙의 소리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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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투고] 신년경구21년 1월 4일, 이만유 선생이 투고한 작품으로 신년 경구는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신년 경구 신축년 새해 맞아 경구(警句)로 덕파무애(德波無涯) 덕 베풂은 끝이 없다 좋고도 뜻깊다만 무언가 제자리 잃은 무덤덤한 명구네 신년 경구 모름지기 시대를 반영해야 덕담 교훈 좋지마는 사회문제 부각하여 모두 다 뒤돌아보고 깨닫도록 하는 말 경자년 신년 경구 어이없는 화민성속(化民成俗) 지금이 어느 땐데 누가 누굴 교화하나 시민이 주인인데도 어리석은 대상 돼 * 시작 노트 경구(警句)는 사전적 의미로 기발한 감상을 간결하게 표현한 구(句)다. 다시 말해 진리나 삶에 대한 느낌이나 사상을 간결하고 날카롭게 표현한 것이다. 경구는 사람의 의표를 찌르면서도 풍자와 함축성이 풍부하여 듣는 사람이 저절로 수긍하게 하는 것이다. 격언이나 속담, 덕담 등 일반적인 뜻이 아닌 그 말이 나온 특수한 경우에만 표현 가치를 지닌다. 그 예가 교수들이 뽑는 올해의 사자성어 아시타비(我是他非)이고 시사문경의 무중생유(無中生有)도 시의적절하다. 신년 경구는 이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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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작화 : [장편소설] 흙의 소리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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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한러수교30주년기념 러시아 청소년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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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명작다큐] 카레이스키150 3편 “오딧세이-기나긴 여정”KBS 다큐 [KBS Documentary] 명작다큐 카레이스키150 3편 "오딧세이-기나긴 여정”(2014.08.29 방송) 3편 '오딧세이-기나긴 여정'은 러시아공영방송 RTR의 여자 앵커 고려인 5세 마리나 김의 1인칭 시각으로 강제이주 이후 현재까지의 고려인들의 역사를 살펴본다. 러시아 공영방송 RTR의 고려인 앵커우먼 마리나 김 -마리나 김은 고려인 5세다 올해 33세인 그녀는 러시아 공영방송 RTR의 기자이자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 활동 중이다. 취재능력과 빼어난 미모로 러시아를 대표하는 저널리스트로 성장중이다. -마리나 김은 2차세계대전 참전 베테랑들을 취재하던 중 우연히 1918년생인 고려인 2세 정상진을 만났다. 정상진은 소련 태평양한대 소속 해병대원으로 1945년 8월13일 청진항 상륙전에 선봉대로 참전했다. 그는 한반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유일한 한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온 노병이었다. -마리나 김은 정상진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느끼면서 점차 정상진의 일생을 취재하는 과정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임을 깨닫는다. 평양과 서울을 취재하는 마리나 김의 분단조국 체험기 -마리나 김은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평양과 서울을 차례로 취재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평양에서는 아리랑공연을 보고 유치원과 지하철 백화점 그리고 판문점을 취재하면서 북한의 속살을 살폈다. 서울을 방문하여 임진각을 찾고 세종시를 취재하고 명동과 강남에서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남북을 오가면서 분단된 할아버지의 나라에 대해 한없는 연민과 아픔을 느낀다. 3천만 한인들 중 가장 풍요로웠던 1930년대 연해주 고려인들 -1930년대 고려인의 숫자는 20만 명에 이르렀다. 소비에트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고려인의 근면성이 어울려 연해주 고려인 사회는 활기가 넘쳐 흘렸다,300개가 넘는 고려인 학교가 생기고 순한글 신문 '선봉'을 비롯하여 각종 잡지와 신문이 발간되고 한인라디오 방송국, 고려극장 등이 생겨 수준 높은 교육과 문화를 향유할 수 있었다. 학살과 강제이주 고려인 사회를 덮치다. -1937년 스탈린은 일본이 만주와 중국을 연달아 침입하자 연해주 고려인들이 일본에 동조할 것이란 판단 하에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학살한다. 지금까지 공식 발표된 학살자는 2,000여명이었으나 고려인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6,500명이 넘는다. -지도자를 처형한 후 소련 당국은 고려인 18만 명을 전원 중앙아시아 오지로 이주시킨다. 18만 고려인의 강제이주는 엄청난 시행착오를 일으키며 숱한 희생자를 낳았지만 고려인들은 하소연할 곳조차 없었다. 고려인 집단농장 폴리타젤, 시온고, 북극성 등의 눈부신 성장 -맨손으로 중앙아시아에 던져진 고려인들은 척박한 땅을 갈무리해 중앙아시아에 벼농사 재배를성공시킨다. 김병화, 황만금,김만삼 등의 헌신적인 지도와 고려인들의 협동심이 어우러져 마침내 소련 영방에서 최고의 생산성을 자랑하는 민족으로 거듭났다. -소련 최고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가 고려인 농장을 방문하고 베트남 호치민 수상이 고려인 농장을 방문하여 모내기를 하고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이 고려인 마을 찾았다. 소련파 고려인- 북한정권을 수립하다. 해방이 되고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북한에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기 위해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엘리트 500명을 북한으로 보낸다. 이들 고려인들을 소련파라 부른다. 허가이 박정해 박창옥 남일 등이 대표적인 소련파다. 그러나 이들 소련파들은 1950년 후반 김일성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 중앙아시아로 쫓겨 난다. 또 다시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다. 질기고 질긴 조국의 뿌리 김치, - 현재 고려인은 50만 명 정도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 대륙 20여개 국에 살고 있다. 스탈린의 한국어 교육 금지조치로 인해 고려인들은 한국말을 거의 잊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밥상에는 여전히 짐치라고 부르는 김치와 밥이 오른다. 고려인들이 있는 곳 어디나 김치 시장이 활기를 띈다. 고려인 한민족의 북방 진출의 파트너 -지난 8월16일 고려인 자동차 랠리 팀이 모스크바를 거쳐 중앙아시아 연해주 그리고 평양에서 8.15 경축행사를 한 후 개성을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대장정을 성공리에 마쳤다. 고려인들은 한국말을 모르지만 150 전 조국을 떠났던 할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남북분단에 대한 한없는 아픔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명작다큐 카레이스키150" 관련 영상 보기 1편 "디아스포라 이산” https://youtu.be/n4iPCVjLR2c 2편 "레지스탕스 항전”https://youtu.be/d8Yy9iSer5w 3편 "오딧세이-기나긴 여정”https://youtu.be/WNCzzVizAMc#카레이스키#고려인#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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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명작다큐] 카레이스키150 2편 “레지스탕스 항전” (2014.08.28 방송)KBS 다큐 [KBS Documentary] 명작다큐 카레이스키150 2편 "레지스탕스 항전” (2014.08.28 방송) 최초 발굴-100년 전 연해주 청소년 공연단 상트 페체르부르크 공연 동영상! -취재진은 러시아국립영상사진 아카이브에서 연해주 고려인 지도자이자 최재형 선생이 사비를 털어 조직한 80여 명의 한인 청소년 공연단이 매스게임을 하는 동영상을 특종 발굴하였다. -이 필름은 상트 페체르부르크에서 1913년 열렸던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 탄생 300주년 축하행사에 참가한 고려인 청소년들의 공연 영상이었다. 고려인들이 러시아에 이주한지 50여 년이 되던 이 때 최재형은 고려인의 역량을 러시아 황제 앞에서 선보인 것이다. -고려인 청소년 공연단이 흰색 한복바지, 저고리를 입고 신식 모자를 쓴 채 집단율동을 씩씩하게 선보이는 장면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체코 현지 취재-체코군단과 연해주 고려인 독립군과의 무기 거래 -오스트리아는 1차세계대전 중에 식민지 체코인들을 징집하여 전선으로 보낸다. 이들 체코인들이 러시아로 도망쳐 만든 군대가 체코군단인데 그 수가 무려 7만 명이었다. 이들은 태평양을 건너 프랑스로 가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으로 온다. 이때 경비가 필요했던 체코군단과 무기가 필요했던 고려인 독립군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무기구매가 은밀하게 이뤄졌다. -체코군단의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일본의 은행을 털었던 15만원(현재가치 75억 원)사건은 영화 '나쁜 놈 참한 놈 이상한 놈'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15만원 사건의 주역이었던 애국지사의 후손들을 통해 15만원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짚어본다 -체코 프라하에서 취재진은 체코군단의 지도자였던 가이다 장군이 상해임시정부를 방문해서 받았던 선물의 목록을 발굴하였는데 이는 상해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체코군단과 연해주 독립투쟁의 연관성을 인정하는 주요한 자료다. 상해임시정부가 가이다 장군에게 선물한 화병은 막대한 분량의 무기를 우리 독립군들에게 헐값으로 넘겨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청산리 전투의 주역 이범석 장군이 생전에 체코군단과 북로군정서가 은밀하게 대량의 무기를 구매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증언하였다. 특히 체코군으로부터 구매한 무기를 은밀하고 신속하게 운반하기 위해서 동포들로 구성된 운반대가 수백 명 규모로 조직되어 연인원 수천 명이 이어받기로 운송한 사실들을 확인했다. 연해주 고려인 독립군 부대 일본군 7만 대군과 싸우다. -1910년 후반 10만이 넘는 연해주 고려인 사회는 한반도와 잇닿아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연해주를 기반으로 독립투쟁을 벌인다. 특히 1918년 일본군이 러시아혁명에 간섭하며 연해주와 시베리아에 7만 대군을 파병하자 연해주 고려인들은 소비에트 혁명군과 손잡고 일본군과 전면전을 선포한다. -일본군에 맞서 연해주 곳곳에서 고려인 무장독립군부대가 생겨나는데 한창걸 부대 최호림 부대, 혈성단, 독립단 부대, 솔밭관 부대, 우리 동무군, 대한의용군, 군비단 등 최대 36개 부대 4천여 명의 고려인 독립군이 연해주와 하바롭스크 주 곳곳에서 5년 동안 일본군과 치열한 무장 투쟁을 벌인다. -올가항 전투, 달레테첸스크 전투, 파르티잔스크 전투, 볼로차예프 전투 등에서 소비에트 혁명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러시아 반혁명군에게 강력한 타격을 준다. 이처럼 지속적이고 강력한 독립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요인은 연해주의 10만 고려인 사회의 적극적인 군자금모집과 각종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연해주 고려인 항일무장투쟁의 장엄한 역사는 해방 이후 남북이 나눠지면서 남쪽에서는 반공이데올로기에 가려서 지워졌고 북에서는 김일성 중심의 무장투쟁이 강조되면서 사라졌다. 연해주 고려인 독립투쟁의 역사를 재조명하여 이들의 숭고한 투쟁을 선양해야 할 때다. 러시아 혁명의 주역이 된 고려인 -취재진은 러시아 정치사회역사 도서관에서 1921년 11월 28일 크렘린 궁에서 러시아 혁명의 최고 지도자 레닌과 이동휘 선생을 단장으로 한 고려인 대표단이 조선독립에 관해 깊이 논의한 역사적 자료를 취재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고려인들은 전폭적으로 혁명을 지지한다. 고려인들이 혁명을 열렬히 지지한 이유는 계급타파와 민족차별철폐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일본군과 싸우는 소비에트 정부의 정책이 조선독립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고려인의 입장을 생생히 표현하고 있는 보리스 쿠스토디예프의 그림 '제2차 코민테른 대회 기념축제'라는 그림 속의 태극기를 통해 혁명의 열기와 고려인의 기대를 확인해본다. 또한 고려인 독립군 부대의 깃발과 레닌의 연설장에 태극기를 들고 참석한 고려인 대표단의 필름도 취재했다 ※"명작다큐 카레이스키150" 관련 영상 보기 1편 "디아스포라 이산” https://youtu.be/n4iPCVjLR2c 2편 "레지스탕스 항전”https://youtu.be/d8Yy9iSer5w 3편 "오딧세이-기나긴 여정”https://youtu.be/WNCzzVizAMc#카레이스키#고려인#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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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명작다큐] 카레이스키150 1편 “디아스포라 이산”KBS 다큐 [KBS Documentary] 명작다큐 카레이스키150 1편 "디아스포라 이산” (2014.08.21 방송) 올해는 1864년 조선인이 최초로 러시아 연해주에 이주한 지 150년이 되는 해다. 이들은 연해주를 기반으로 조선말부터 한인 사회를 일궈 가다 이주 70여년 만에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다. 갖은 역경을 이기고 지금은 러시아 모스크바, 연해주, 중앙아시아 등 유라시아대륙 20여 개국에 50만 명이 살고 있다. 이들을 고려인, 카레이츠, 카레이스키라고 부른다. 취재진은 지난 1년간 러시아 전역과 중앙아시아 5개국 및 폴란드 체코 독일 등의 기밀문서 및 영상 자료들을 집중 발굴하고,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한국 근현대사의 숨은 주역들을 발굴 취재하였다. 중앙아시아는 갈수록 자원 개발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한국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있고 이 지역 출신 카레이스키 3만 명을 포함하여 우즈벡 키르키즈인 수만 명이 한국에 취업하여 고려인 촌을 형성하고 있다. 러시아 푸틴 정부는 연해주 개발과 한반도를 연계하기 위해 2011년부터 연해주 특별 개발을 시작했다. 러시아 이주 150주년을 맞이하여 민족의 고난기에 디아스포라와 유랑의 고통에 내몰렸던 고려인들의 역사를 돌아보고 한민족의 일원인 이들과 우리가 어떤 관계를 설정할 것인가를 조망해본다. 1편 디아스포라 - 이산 특종 발굴1-고종의 시종무관 김인수 참령의 후손 100년 만에 이르쿠츠크에 나타나다. 김인수는 대한제국의 참령이자 고종황제의 시종무관이었다. 그는 러시아 국적자이기도 했다. 조선에서 황제의 통역관으로 근무하던 중 러일 전쟁이 터지자 러시아로 탈출하였다. 취재진은 이르쿠츠크서 자신들이 김인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러시아 가족을 만났다. 이들은 김인수가 남긴 사진과 친필 편지를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보관하고 있었다. 김인수는 러시아로 탈출한 후 러시아 장교 빅토르 김으로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폴란드 바르샤바전선까지 참가했다. 김인수는 러시아군 대령으로 전선을 누비며 러시아 황제로부터 최고 훈장까지 받았다. 김인수의 후손들은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자 김인수 부인의 성으로 바꾸고 숨어 살았다. 특종 발굴 2 - 100년 전 폴란드 탄네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 포로가 된 고려인들 1차세계대전 당시 러시아군으로 독일군에게 포로가 된 고려인들의 자료가 독일 훔볼트 대학에서 발견되었다. 그들의 생생한 자필 신상카드, 군복차림의 각종 사진들, 더구나 100년 전 우리의 노래와 수수께기 등을 담은 음반도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그들의 노래는 100년 전 우리 노래가락을 생생히 들려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이들 포로들의 정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취재진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이들은 연해주의 짜레찌예 출신의 고려인이며 구한말 일본군에 맞서 두만강 변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다 나라가 망하자 러시아 시베리아 보병사단에 몸을 의탁했던 베테랑 전사들이었다. 이들은 1차세계대전 당시인 1914년 8월 러시아군이 독일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폴란드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 포로가 되었다. 1916년 3년 째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하던 중 이 기록을 남겼다. 이들 외에도 4,000명의 고려인 1차 세계대전당시 러시아군에 입대하여 독일전선에 참전한 기록들을 발굴하였다. 의병장의 5대손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다 카자흐스탄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데니스 텐은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 남자피겨스케이팅 부문에서 카자흐스탄의 유일한 메달인 동메달을 획득한다. 데니스 텐은 구한말 원주 진위대 장교 출산의 의병장 민긍호의 5세손이다. 의병장의 후손이 어떻게 카자흐스탄까지 가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데니스텐이 소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는 과정을 밀착 취재하여 그가 느끼는 할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생각과 그의 동메달이 고려인들에게 주는 자부심을 살펴본다. 또한 카자흐스탄 곳곳에 흩어져 사는 민긍호의 후손들이 고려회관에 모여 데니스 텐의 메달을 응원하는 과정을 통해 고려인들의 끈끈한 친족애를 살펴본다. 동메달을 따자마자 홀로 조용히 원주를 방문하여 할아버지 민긍호의 산소를 참배하는 데니스 텐의 모습을 단독 취재했다. ※"명작다큐 카레이스키150" 관련 영상 보기 1편 "디아스포라 이산” https://youtu.be/n4iPCVjLR2c 2편 "레지스탕스 항전”https://youtu.be/d8Yy9iSer5w 3편 "오딧세이-기나긴 여정”https://youtu.be/WNCzzVizAMc#카레이스키#데니스텐#고려인#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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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아리랑 공모전 대상 ‘애니깽 아리랑’대상의 주인공은 멕시코에 거주 중인 마리아 에우헤니아 올센 아길라르의 ‘애니깽 아리랑’입니다. 마리아의 선조는 일제 강점기에 멕시코로 이주한 조선인 노동자, 소위 애니깽 중 한명이었습니다. 그들은 힘든 노동 속에서도 조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아리랑을 불러왔고 세대를 거쳐 전승되어왔습니다. 마리아는 이주노동자의 4세 후손으로서 멕시코 유카탄 무궁화 뮤직&발레단(The Mugunghwa Ballet of Korean Music and Dances in Yucatán)의 단장을 맡아 멕시코 내에 한류를 전파하고 있다. 이번 공모전에서 그녀의 작품은 조상이 가진 한(恨)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아리랑으로 잘 표현하였다는 심사평과 함께 대상의 영예를 차지하였습니다. - 공모형식_노래 부르기 - 공모주제_지역·전통아리랑 - 참가자_마리아 에우헤니아 올센 아길라르(Maria Eugenia Olsen Aguilar) #멕시코 #감동 #아리랑 #한국문화재재단 #공모전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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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작화 : [장편소설] 흙의 소리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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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투(花歌鬪)화가투(花歌鬪): 1920년대 초부터 1940년대까지 유행하던 놀이로, 시조를 적은 종이쪽을 가지고 하는 성인여자놀이.내용시조가 카드에 올려져 사용되었던 놀이로 일명 ‘가투(歌鬪)’라고도 한다. 1920년대 초부터 1940년대까지 유행하였다. 이 놀이는 윤태오(尹泰五)가 경영하던 불선사(不羨舍)에서 1922년에 『가투』를 발행한 데 이어, ‘경성여자기독교청년회’가 주최한 ‘새봄 첫머리 현상 가투대회’(1926.2.25.)를 조선일보사가 후원함으로써 구체화되었다.『조선일보』는 1926년 1월 5일자 3면에 「자미 잇는 가투노리-조선뎍 취미를 본위로 한-」이라는 해설을 싣고, 이후 14회에 걸쳐 「가투에 실린 시조 백수」를 분재하였다. 이 행사를 제1회로 하여 조선일보사가 후원한 가투대회는 1940년 1월 13일에 제12회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