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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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님 명무의 '이숙향 류 구고무'서영님 명무의 '이숙향 류 구고무'는 '3고무'에 그 기원을 두면서 3개, 5개, 7개, 9개 등 북의 수를 응용하여 다양한 변화와 균형미를 느끼게 하는 춤이다. 특히 전승체계가 원활치 않아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 현재의 '9고무'는 이숙향 선생으로부터 전승받아 2005년 서영님에 의해 초연된 바 있다. 오늘의 9고무는 독특한 북의 리듬과 함께 9개 북 사이를 들고나며 힘차게 도약하는 서영님 특유의 장쾌한 매력이 더해져 우리 춤의 신명나는 또 다른 멋을 선보인 춤사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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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명고, 일산 김명환김명환(金命煥, 1913-1989)은 전남 곡성군 옥과면에서 태어나 20세기에 활동한 판소리 명고이다. 호는 일산(一山)이다.17-18세(1929-1930) 무렵 장판개(張判盖, 1885-1937) 문하에서 판소리와 북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20세에 본격적으로 박판석(朴判錫)을 스승으로 모시고 북을 익혔다. 비슷한 시기 주봉현(朱鳳鉉)에게 북 치는 자세 등을 배웠으며, 공창식(孔昌植, 1887-1936), 김정문(金正文, 1887-1935), 김봉학(金鳳鶴, 1883-1943), 박중근(朴重根) 등에게도 학습했다. 24세에 장판개에게 다시 북을 배웠으며, 41세부터 보성의 정응민(鄭應珉, 1896-1963) 문하에서 학습했다. 오용록(吳龍祿, 1955-2011), 정회천(鄭會泉, 1957- ), 김정수(金晶洙), 장종민 등이 그의 제자이며, 1981년에 김명환의 문하생들을 중심으로 '일산회'가 결성되었다.22세 때 임방울(林芳蔚, 1904-1961)의 '수궁가' 공연 무대에서 처음으로 북을 잡았다. 25세에 상경해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송만갑(宋萬甲, 1865-1939), 이동백(李東伯, 1866-1949), 김창룡(金昌龍, 1872-1943), 정정렬(丁貞烈, 1876-1938), 김정문 등의 고수를 역임했다. 44세에 광주에 고법연구소를 차리고 정광수(丁珖秀, 1909-2003), 공대일(孔大一, 1911-1990), 안채봉(安彩鳳, 1924-1999), 한애순(韓愛順, 1924- ) 등의 명창과 교류하며 고법의 폭을 넓혔다. 56세에 광주를 떠나 서울에 고법연구소를 열었으며, 61세부터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감상회에 고수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74세부터 1년간 국립창극단 지도위원을 맡았다. 1978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고법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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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계 거장 박범훈 명인박범훈 동국대 석좌교수가 최근 조계종 불교음악원장을 위촉받았다. 25일 '박볌훈류 피리산조'연주회를 준비히고 있다. 중앙대학교 총장, 청와대 교육과학문화수석비서관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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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5도 무형문화재 '평안도 향두계놀이' 보유자 유지숙유지숙 명인은 공연을 통해 서도소리와 북녘의 민요를 널리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고, 민속악 발전과 문화향유를 공유하기 위해 지속적 전승활동을 해오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전승 교육사 유지숙 명창은 현재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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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산조춤의 대가, 김진걸산조 춤의 명인 김진걸(金振傑, 1926-2008) 1926년 출생, 2008년 사망. 서울 출신의 무용가이다. 조택원의 뒤를 잇는 한국무용계의 맏형이자, 한국 신무용의 2세대를 대표한다. 1955년 동양극장에서 첫 공연을 가진 이래, 모두 11차례의 개인 발표회를 여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규모가 큰 무용극보다 '산조'(散調)등의 걸작을 만들었다. 아울러 김진걸무용연구소를 설립해 김영희, 조흥동, 이운철, 정명숙, 문일지 같은 재능 있는 무용 인재들을 배출했다. 그 밖의 주요 출연 작품으로 <영은 살아 있다>, <심청> 등이 있고 주요 안무 작품으로는 <배신>, <향토의 선율>, <초혼> 등이 있다. 제자로는 임미자, 조흥동, 민준기, 이운철, 정명숙, 김세일라, 문일지, 김숙자, 김경자, 심의식, 정금란, 조카딸 김수남, 정창영, 유정숙 등 우리 무용계를 빛내는 명인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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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자 명무의 도살풀이살煞을 푸는 민속무용의 일종으로 경기도도당굿의 영향을 받은 살풀이춤을 가리키는데 주로 김숙자金淑子류의 살풀이춤을 지칭한다. 도살풀이춤은 경기도도당굿에 대한 김숙자의 탁월한 해석력을 바탕으로 새롭게 양식화된 무속계통의 전통무용이다. 김숙자는 자신만의 개성 있는 춤기법을 정리하여 무속계통의 전통무용 유파를 형성하였다. 경기도도당굿에서는 각 거리마다 연주되는 도살풀이장단에 맞추어 무녀가 소리를 하며 부채와 방울 등무구巫具를 들고 어정거리며 춤을 춘다. 특히 경기도도당굿 12거리의 마지막 의식에서도 춤을 추는데 이 춤을 도살풀이춤이라 부른다. 그러나 경기도도당굿에서 추는 도살풀이춤은 의식적儀式的인 성격이 강해 단순한 춤사위를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이어서 이를 무용으로 양식화했다고 볼 수 없다. 이에 반해 김숙자류의 도살풀이춤은 경기도도당굿의 무속적 특성들이 전통무용의 내외적內外的 형식미로 양식화되어 있어 전통무용의 범주에서는 이를 ‘도살풀이춤’으로 인식하고 있다. 매헌 김숙자(梅軒 金淑子: 1926-1991)는 화성 재인청 출신인 부친 김덕순에게 무속에 담겨있는 가무악을, 모친 정귀성에게 무속전반을 배웠다. 세습무가 출신인 김숙자의 경기도당굿시나위춤에 특징적 요소는 경기도 지방에 전승되어 온 경기도당굿에서 화랭이와 무녀가 추던 의식무 성격의 춤을 발전시켜 전통무용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따라서 김숙자의 춤들은 원래 경기 도당굿 굿판에서 추던 무속춤이었지만 재창조와 전승과정에서 무대화되고 예능화된 대표적인 무속 계열의 춤이다. 부친 김덕순과 모친 정귀성으로부터 김숙자에게 전승되어진 경기도당굿시나위춤과 경기류 민속춤은 현재 그의 제자 이정희를 통해 명맥이 유지되고 있으며 이정희의 제자 한수문 등으로 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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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포구락무 예능보유자 박설자진주포구락무(晋州抛毬樂舞)는 궁중에서 행했던 춤과 노래 중 하나인 포구락무가 고종이 재위시 진주에 전해진 것에서 비로된 춤이다. 포구락은 공을 구멍에 던져 넣는 놀이를 표현한 것이며, 포구락무는 고려시대 때 중국에서 들어와 조선 전기까지 전승되었다. 진주 포구락무는 경상남도 지정 무형문화재 제12호로 1991년 12월 23일 지정되었다. 복원된 진주포구락무로 1984년 5월 경남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1985년 9월 제2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한 후, 1991년 경남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받았다. 정금순 선생이 초대 예능보유자가 되어 활동하다 작고하자, 2004년 박설자 선생이 뒤를 이어 예능보유자가 되었고 보존회 회장을 맡아 현재까지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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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판소리를 지켜낸 추담홍정택(洪正澤,1921~2012)의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호는 추담(秋潭)이다. 본명은 홍웅표이다. 1921년 12월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삼거2길 13(신흥리 286)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홍순열(洪順悅)과 어머니 김판덕(金判德) 사이에서 7남 2녀 중 넷째 아들이다. 홍정택은 어린 시절 고향에 찾아든 창극단 공연을 관람하면서 소리의 매력에 빠져 창 연습을 시작하였다. 1935년 5월 판소리 명창 임방울(林芳蔚)이 어린 홍정택을 지도하며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1938년 주산공민학교(현 주산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동년 4월 홍정택은 이기권(李起權)을 스승으로 모시고 소리를 배웠다. 이기권의 개인 지도와 판소리 학원 수업으로 판소리 열두 마당을 모두 소화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수궁가'를 특기로 지도받았다. 한번 소리를 들으면 잊지 않고 가사를 줄줄 외울 정도로 신동이었다고 한다. 소리의 진수를 터득하고 많은 국창(國唱)들과 접촉하여 자신의 소리를 평가받고자 서울의 조선성악연구회를 찾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성악연구회는 소리를 가르치기도 하고 창극단을 설립하여 소리의 대중화에도 앞장섰던 단체였다. 정정렬(丁貞烈)[1876~1938]의 제자인 이기권(李基權)[1905~1951]의 수제자로 이기권에게서 판소리 다섯 바탕을 익혔다. 1943년 4월 홍정택은 조선창극단에 입단하여 전국 순회공연을 하였다. 당시 홍정택은 소리 실력은 날로 커가고 목소리는 고우면서도 우렁차서 임방울에 빗대어 ‘홍방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선일창극단에 들어가 이도령 역과 심봉사 역을 맡은 홍정택은 춘향 역과 심청 역을 맡던 김유앵(金柳鶯)(1927~2009)과 부부가 되었다. 22세에 조선창극단과 김연수창극단에 입단해 민족의 망국한(亡國恨)을 소리에 담아낸 홍정택은 판소리가 절멸의 위기에 처한 1970년대 전주의 판소리를 외롭게 붙들었다. 1954년 5월 김연수창극단에 입단하여 전국 순회공연을 하였다. 홍정택은 '수궁가'로 1984년 9월 20일 전라북도 무형 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부인 김유앵은 1987년에 『춘향가』로 문화재 지정을 받아서 부부 무형 문화재가 탄생하게 되었다. 일찍이 홍정택은 어렵게 일구어 놓은 판소리를 후진들에게 가르치는 활동으로 방향을 정해 강단에 서기 시작하였다. 1946년부터 군산국악원 판소리 강사를 시작하였고, 1963년부터는 전주국악협회에서 판소리를 가르쳤다. 1984년 9월 전라북도 도립국악원 판소리부 전임 교수에 임용되어 1991년 정년 퇴임하였다. 고등학교 판소리 전임 강사와 전주에 있는 우석대학교 강사 등 60여 년 동안 후진 양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2007년 7월 추담제판소리보존회를 설립하였다. 유년 시절 고향을 떠나면서 언젠가는 멋있고 아름다운 소리꾼이 되어 다시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했던 홍정택은 70여 년의 세월이 흐른 2007년부터 추담제판소리보존회 주관으로 추담 전국국악경연대회를 고향 부안에서 개최하였다. 대회를 통해 발굴 배출된 소리꾼들로 전정민·최승희·김옥주·조소녀·김세미 등은 현재 경향 각지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2012년 11월 25일 숙환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비전길 69(가산리 244) 국악의 성지에 있다. 최승희, 조소녀, 전정민, 조영자, 윤소인, 김소영 명창 등이 처음 소리를 시작할 때 홍정택에게 배웠을 정도로 홍정택은 판소리 후학들을 길러 내 소리 문화의 전통 계승에 앞장섰다. 대통령상을 수상한 외손녀 김세미(현 추담판소리보존회 이사장)·김선미 명창 등을 배출해 판소리로 일가를 이루었다.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서 추담 홍정택의 국악 정신을 기리고 국악의 저변 확대를 위해 매년 추담전국 국악 경연 대회.가 2007년부터 시작되어 오고 있다. 홍정택 약력 1921년 부안 신흥 출생 1935년 5월 첫 무대(임방울 스승) 1938년 익산 이기권 선생님께 판소리 5바탕 사사 1943년 4월 조선창극단에 입단 1946년~ 군산국악원 판소리 강사 1954년 5월 김연수창극단 입단, 전국순회공연 1963년~ 전주국악협회에서 판소리 강사 1968년 제1회 세종상 국악 경연 대회 장원, 1980년 전라북도 문화상, 1982년 한국국악협회 국악 공로상 1984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수궁가' 보유자 지정 1984년~2012년 전라북도 도립국악원 판소리부 전임 교수 재직 1992년 추담판소리 고법연구소 설립 1997년 전라북도 목정 문화상, 1997년 목정 문화상 2001년 제11회 동리 대상 2004년 한국국악협회 국악 공로상 2006년 전북예총 문화상 2007년 7월 추담제판소리보존회 설립 2007년 제1회 추담전국 국악 경연 대회 개최 2008년 전북인 대상 2019년 ‘추담 홍정택 석상 제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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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예술가 무세중의 ‘황토아리랑’조동일 교수 "초기 문화운동 판에서 무세중은 '신명'이 너무 넘쳐 학교에 남지 않고 현장으로 나갔다.” 신명으로 몸과 마음으로 공연을 하는 무세중 선생. 1989년 8월 15일 광복절날에 독립기념관을 ‘황토아리랑’으로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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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 명무의 호남살풀이춤전북무용의 뿌리는 주로 기방무용(妓房舞踊)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호남살풀이춤 역시 그러하다. 특히 최정철(예명 최선)의 살풀이춤은 스승으로부터 배운 수건춤을 오랜 세월동안 무대화로 승화시킨 춤이다. 그의 춤은 한(恨)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으며, 맺고 풀고 얼르는 묘미와 함께 고도의 절제미는 춤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최선의 호남살풀이춤(동초수건춤)은 보는 이들의 숨을 멈추게 한다. 전주국악원에서 춤을 가르치던 기녀 출신 선생 추원에게 배웠다. 특히 그때 배운 수건춤은 ‘호남살풀이춤’의 바탕이 됐다. 그 춤을 ‘동초 수건춤’이라 했어요. ‘동초’는 동기(쪽찌지 않은 어린 기생)와 초립동의 합성어인데, 조그만 수건이나 부채를 들고 춘다. 수건은 입으로 물거나 손으로 뿌리며 추기도 한다. 최선은 1945년 10세때부터 춤을 추기 시작하여 1946년에는 김미화 무용연구소에 입소, 1952년부터 추월 선생 및 정인방선생으로부터 호남살풀이춤 사사, 1960년에는 전주 도립극장에서 처음으로 무용발표회 개최, 1961년에는 최선 무용연구소 개설과 함께 수차례에 걸친 무용발표회 및 세계 각국의 무용 순회공연을, 1996년에는 도지정 무형문화재 호남살풀이춤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전수관 및 여러 대학의 출강을 통하여 춤의 전수를 위해 제자를 양성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고 있어 명무(名舞)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다. 영남보다 춤기운이 쇠해진 호남의 한국춤을 지키고 있다. 그는 "무대에서 죽는 게 바람이다. 무대에서 춤춘 후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끊어지는 숨" 그게 소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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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편제·서편제 아우른 '선비 명창'정광수 명인은 본명은 정용훈(丁榕薰)이고, 호는 양암(亮菴)이다. 해방 이후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의 전승자로 지정된 예능보유자. 판소리명창. 김창환, 유성준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으며, 수궁가와 흥보가에 능했다.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이다.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국창(國唱)으로 불렸던 조선조 말 명창 정창업의 손자로 15세에 명창 김창환 문하에 들어가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유성준에게 수궁가와 적벽가를, 정응민에게 심청가를, 이동백에게 적벽가를 각각 배웠다. 창극 운동에도 참여하다가 광복 이후 광주에서 삼남국악원을 설립해 제자를 양성해 왔고 1964년 인간문화재가 됐다. 판소리보존연구회 이사장을 지냈으며 지난해에도 국립국악원에서 공연을 갖는 등 최근까지 왕성하게 활동해 왔다. 1909년 9월 12일 전남 나주시 공산면 복용리 신동산마을에서 출생. 본명 용훈(榕薰), 호 양암(亮菴). 조선조 판소리 명창 정창업(丁昌業)의 손자. 1925년 16세에 나주군 삼도면 양화리(현 광주시 광산구 내산동)에서 김창환 명창과 아들 김봉학에게 판소리 「춘향가」·「흥보가」를 배웠다. 1936년에는 진주에서 유성준에게 「수궁가」와 「적벽가」를 배웠는데, 유성준의 「적벽가」는 삼고초려가 없는 「민적벽가」이므로 이 부분은 1940년에 이동백으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또한 1940년 보성에서 정응민에게 「심청가」를 배웠다. 30대 이전에는 주로 학습과 독공을 하였고, 1943년부터 광복 때까지는 동일창극단에서 활동을 하였다. 1939년 6월 빅타 레코드에서 「적벽가」 ‘새타령’을 취입하였다. 1946년부터 1960대 초까지 광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광주예기권번, 광주국악원, 서동민속예술학원, 삼남국악원 등에서 소리선생을 역임했다. 1954년에는 광주에서 한덕수와 함께 『창극조 대춘향가』사설집을 발간했는데, 당시 유행하던 정정렬 제 사설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은 소리선생으로서 교재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964년 처음으로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춘향가」’를 지정할 때, ‘지자군(持字軍) 대목(방자 편지 가져가는 데)’의 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1974년 판소리 지정제도 개편 시에는 유성준 제 「수궁가」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76년에 문화재청 무형문화재 기록사업의 일환으로 「수궁가」(처음∼토끼 배 가르는데)를 녹음하였고, 1991년 뿌리깊은나무에서도 「수궁가」 완창(3LP)을 취입하였는데 이 녹음은 오선보로 채보되어 있다. 1986년에는 자신의 판소리 5바탕 사설을 정리한 『전통문화오가사전집』을 출판하였다. 판소리 양대 산맥인 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른 예인(藝人)이었다. 많은 국악인들은 우리 소리의 예스런 본디 모습(고제·古制)을 온전히 간직했던 큰 소리꾼이 갔다고 입을 모은다. "한학에도 밝아 ‘선비 명창’으로 통한 정 명창이 무대에 나서면 태(態)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 소리라도 엥겨 멋진 발림(손짓 몸짓)을 할라치면 그런 가경(佳景)이 없는데 이를 영 만나볼 수 없게 됐다”고 이보형씨(문화재전문위원)는 애도했다. 정 명창은 일제 때 대동가극단·동일창극단 창극무대를 누비다 광복 후 광주에서 광주국악원을 창설,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1964년 판소리 ‘춘향가’로 우리나라 최초 무형문화재의 한 사람이 됐고, 1974년 중요무형문화재 ‘수궁가’ 보유자가 됐다. 82세 때 ‘수궁가’ 음반을 냈고 아흔을 넘긴 고령에도 국악로보존회 무대 등을 지키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지난달 29일에도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주최로 서울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서 공연할 예정이었으나 건강악화로 딸 의진씨가 대신 무대에 섰다. 정 명창은 판소리 사설집을 정리한 ‘전통문화 오가사집’ 등 저서를 남겼다. 1983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대통령문화훈장), 2000년 제7회 방일영국악상(方一榮國樂賞)을 수상했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대통령 문화훈장)과 KBS 국악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저서로 ‘전통문화 오가사전집’이 있다. 유족으로 아들 은석씨 등 1남2녀가 있다. 정광수는 김창환의 서편제 계열의 소리로 입문하였고, 나중에 유성준의 동편제 계열의 소리를 학습하였기 때문에 그의 소리는 동·서편제의 특징을 함께 지니고 있다. 긴장감 있는 성음을 구사하면서도 부침새가 정교하고 화려하여 어려운 소리라는 평을 받았으며, 또한 기품 있는 너름새를 구사하여 ‘조선조 광대의 너름새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유성준 제 「수궁가」 전승에 크게 기여하여 김영자·안숙선·정의진·정옥향 등 여러 이수자를 배출하였다. 2003년 11월 2일 향년 94세로 작고하였다. 1983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대통령문화훈장), 1995년 동리대상, 2000년 제7회 방일영국악상(方一榮國樂賞)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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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 명인의 '문둥북춤'문둥북춤은 경남과 부산지역의 고성오광대 탈춤에서 나오는 탈춤으로 즉흥성이 강조된 춤이다. 문둥이 과장은 야류·오광대에만 보이는 독특한 과장으로, 수영야류를 제외하고 현전하는 모든 야류·오광대에서 연행된다. 동래야류는 제1과장 문둥이과장, 통영오광대는 제1과장 문둥탈, 고성오광대는 제1과장 문둥북춤, 가산오광대는 제3과장 문둥이과장, 진주오광대는 제2과장 오탈놀음으로 연행된다. 고성오광대 제1과장 문둥북춤 과장은 양반의 자손으로 태어나 조상들의 누적된 죄업으로 인해 천형인 문둥병에 걸려서 고통을 받는 문둥이가 삶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다가 신명을 통해 이를 승화, 극복하는 내용이다. 문둥북춤 과장은 대사 없이 춤으로만 연행되는데, 문둥이는 놀이가 시작되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며 등장한다. 전위예술가 무세중의 문둥탈춤은 평생 회복할 수 없는 고름 가득한 상처를 가지고 시련을 견디는 모습을 형상화 한다.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경상도에 들어와서 조선인에게 저지른 코베기 전략으로 인해 코가 없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민초들의 아픔을 보여주고 그것을 몸굿으로 풀어낸다. 무세중은 봉산탈춤(이근성), 양주별산대놀이(김성대), 동래 들놀음(박덕업), 남사당 덧뵈기춤(남형우) 춤사위를 스승에게서 전수 받은 후 1969년 '한국 민속 가면무극 춤사위 종합 전수 발표회'를 가졌다. 민속악회 시나위 정기연주회(1973), 마당극제(1975년), 노비 문서 전시회(1975), 한국 전통 택견 발표회(1977), 무세중 창작 발표회 <전통과의 충돌>(1975)을 공연했다. 1977년 독일로 건너간 후, 자신의 이름을 따서 극단을 설립하고 유럽의 젊은 연기자들과 함께 탈춤과 실험 연극으로 서방 세계를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1982년 잠시 귀국하여 反 이데올로기, 反 테크놀로지, 反 연극을 통한 <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푸리,(통.막. 살)>를 전위적 표현으로 시도 하였고 초현실주의 그림 작품들을 고통과 잔혹을 표현 하여 이 나라에 신선한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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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금산조와 피리 시나위의 명인, 지영희지영희 전통음악가로 해금산조와 피리 시나위의 명인이다. 본명은 지천만(池千萬),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1909년 9월, 경기도 평택군 포스연 만호리 소재의 경기 세습무 지용득 명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모친 김기덕이 평택군 포승면 일대에서 알아주는 세습무 집안을 이어가는 무속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독학으로 피리, 호적 해금, 장고 등 여러 악기를 섭렵했고, 전통음악과 관련된 여러 분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조항련에게 호적을, 정태신에게 양금을, 지용구에게 해금을, 양경원에게 피리를, 김계선에게 대금풍류를, 방용현에게 대금산조와 풍류를, 최군선에게 농악을, 오덕환에게 무용 장고를, 박춘재에게 경기소리와 서도소리를, 신쾌동에게 거문고산조를, 김상기에게 거문고풍류를 배웠다. 이처럼 여러 무악 명인들에게 장단 등을 배웠으며 가야금과 아쟁은 자득했고 해금산조, 피리산조 연주자로 유명하다. 1937년 조선음악연구소에 입소하여 악사가 된 이후, 1938년에는 한성준무용단(韓成俊舞踊團)의 반주악사로 활약하였으며, 1946년에는 서울중앙방송국 전속국악사가 되었다.1960년에는 국악예술학교 교사로서 유망한 신인들을 많이 길러냈다.1962년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프랑스 파리 세계민속예술대제전에서 우리 음악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것은 매스컴을 통해 널리 소개되었다. 1963년 한국국악예술학교 부설 학생국악관현악단을 조직하였으며, 1965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상임 지휘자 취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1967년에는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으며, 1973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76년 미국 하와이에 한국민속예술원을 창설하고 활동하였으나 1980년 작고하여 우리 국악계에 평생을 헌신한 고귀한 삶을 마감하였다. 부인은 국가무형문화재 23호인 '가야금산조 및 병창'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은 성금연(成錦鳶) 명인이다. 자녀로는 지수남, 지수복, 지성자, 지미자, 지순자, 지윤자, 지명자, 지재현이있다. 손자 강봉천이 국악 작곡으로 활약을 하고 김귀자, 최희연 등이 대를 잇고 있다. 이철희, 이상윤이도 미국에서 대를 잇고 있다. 지영희(池瑛熙, 1909~1980)약력 1909년 경기도 평택 출생 1938년 한성준무용단 반주악사 1946년 서울중앙방송국 전속국악사 1960년 국악예술학교 교사 1963년 한국국악예술학교 부설 학생국악관현악단을 조직 1966년 제1대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 1967년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73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 기예능보유자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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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춤 대가 김진홍 선생이매방 선생을 만나 한국춤의 세계를 알았지만 김 선생은 이매방의 울타리를 넘어 자신만의 춤, '김진홍류'를 만들어 냈다. "안으로 삭일 수 있는 춤, 내면 세계가 깊이 있게 녹아 있는 춤이 바로 이 고장 춤이지." 60년 부산 춤판을 지킨 김 선생이 정의하는 부산 지역 춤사위에 대한 이해이다. 이매방(승무,살풀이), 이춘우(입춤), 문장원(동래한량춤), 김계향(지전춤) 선생 사사했다. 김진홍 약력 1935년 경남 하동 출생1955년 부산 동구 범일동 김진홍 무용학원 개설1983년 제9회 전주대사습놀이무용부문 장원(승무) 제33회 진주개천예술제 특장부문 최우수상1987년 부산광역시 문화상 수상1991년 한국무용협회 이사1993년 부산시립무용단 예술감독 겸상임 안무자1994년 한국무용협회 부산지회장1996년 부산동아시아 경기대회 및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 문화식전 전문위원2008년 부산시 예술총연합회 부산예술대상 ㈔우리춤협회 고문 ㈔한국무용협회 부산지회 고문 부산민속예술보존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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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처럼 살다 간 아리랑 명인 정은하!고 정은하(1956-2023)명인! 영천 출생으로 아리랑 명인이다. 2012년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시 혁혁한 기여를 했다. 아리랑 리더로서 전국 아리랑공동체 결속에 기여해 왔다. 영남아리랑보존회장을 맡으면서 지부와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영남지역 25여 지부와 제주도아리랑보존회, 울릉도아리랑보존회 를 탄생시켰다. 특히 영천아리랑 음반(1999년), 대구아리랑(2003년), 영남지역 아리랑 음반(2006년)을 남겼다. 또한 2003년부터 대구아리랑축제와 대구아리랑전국경창대회를 개최해 왔다.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장으로서 사할린아리랑제에도 함께 해왔다. 사비를 털어 제1회 상주아리랑제(2008년)와 제1회 울릉도아리랑제 첫 막을 여는데 큰 역활을 해주었다. 정은하 선생은 영남지역 민요와 영남아리랑을 전승하고 있는 전승자로서 현장조사시 음악적 분석에 대해서 탁월한 안내를 해주었다. 그만큼 연구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음악적 기량과 기억력이 좋아서, 언제나 전화만 해도 궁금해 하는 각 지역 아리랑은 물론 경기민요에서부터 서도민요, 영남민요는 지역의 토리대로 척척 불러주었다. 특히 잘 들리지 않는 일제강점기 SP음반 음원을 녹음해서 보내면 사설을 줄줄 풀어 주었다. 필자가 2009년부터 안동대 민속학연구소에서 수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현장조사사업단 연구원으로 참가하던 시절에 채록한 음원을 들려주면, 서울 사람 귀에는 전혀 채록이 안되는 발음과 사투리 뜻까지 해결해 주었다. 영남지역 향토민요 전승단체들과 학계를 자연스럽게 연결해주었다. 우리 연구자들이 이렇게 빚을 지었다. 17세 되는 1970년대 중반부터 31살까지 서울에서 국악활동을 했지만. 평생 투박하지만 정겨운 경상도 사투리 그대로 말하는 것이 매력이고, 타고난 리더로서 여장부였다. 제자들의 학비도 대주는 등 많은 장학사업을 했다. 결혼도 안하고 평생 함께해 온 국악계 명사와 소리꾼들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전해 주었다. 스승이신 이창배 선생부터 이춘희 선생까지 국악계와 국악인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나에게는 30년 동안 함께 협력해 온 아리랑운동 동지였다. 이제는 그 이름처럼 하늘에 별이 되었다. 별이 되어 은하수로 돌어갔다. 정 은 하!! (아리랑학회 연구이사 기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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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백중놀이와 예능보유자 박동영'밀양백중놀이'는 매년 음력 7월 보름경에 경상남도 밀양 지방에서 지주들이 마련해준 술과 음식으로 하루를 즐겁게 노는 데서 유래한 성인남녀놀이이다. 박동영은 경남 밀양 출신, 1979년 밀양민속예술보존회 가입하면서 밀양백준놀이 전승활동 전개, 하보경 명인에게 양반춤,범부춤, 북춤 전수, 김타업에게서 쇠가락, 장구가락, 병신춤 전수, 김상용에게 오북춤 전수 받았다. 2002년에 '상쇠'와 '오북춤'으로 밀양백중놀이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99년 제1회 밀양시민대상(예술 부분) 수상, 1989년 제3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문화체육부장관 표창장을 받았다. 전승활동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고 있다. 현재 박동영 예능보유자는 보존회장을 겸하면서 밀양 백중놀이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연합회장까지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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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송만갑의 소리제를 이어간 금파 강도근흥보가를 가장 멋들어지게 불렀던 이는 고(故) 강도근 명창이다. 판소리 명창 강도근(姜道根)은 전북 남원시 향교동에서 태어나 20세기에 활동한 판소리 명창이다. 본명은 강맹근(姜孟根)이다. 그의 집안에는 음악가들이 많은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줄타기 명인 강원종의 아들이자, 대금산조 명인 강백천의 사촌동생, 판소리 명창 안숙선의 외삼촌이다. 판소리와 창극으로 이름을 날렸던 강산홍과 가야금의 명인 강정열은 당질이며, 가야금산조로 남원과 진주에서 활동했던 강순영 또한 그와 사촌간이다. 10세 때부터 남원의 김정문에게 흥보가를 사사했다.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그가 부른 흥보가는 송흥록(宋興祿)-송광록(宋光祿)-송우룡(宋雨龍)-송만갑(宋萬甲, 1865-1939)-김정문(金正文, 1887-1935)으로 이어지는 바디이다. '수궁가'에도 능했는데, 그가 부른 수궁가는 송흥록-송광록-송우룡-유성준으로 이어지는 바디이다. 동편제의 마지막 명창 강도근은 우직한 농사꾼이기도 하다. 농사꾼 아버지인 강원중과 어머니 이판녀 사이에서 9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돈이나 명예에 초연한 고집스러운 소리꾼으로, 타계하기 직전까지 농사꾼임을 자처하며 고향 남원에서 농사를 지어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리에서는 검은 흙냄새가 난다. 판소리에서는 이런 소리를 ‘철성(鐵聲)’이라고 한다. 자그마한 키에 다부진 모습으로 약간 쉰 듯하면서도 청청한 수리성과 가늘고 단단한 상청을 이루는 성음이 특징이다. 생전 고향 남원을 떠난 적이 없어 음반은 적은 편이다. 1990년 흥보가와 수궁가완창 LP레코드 음반을 통해 그의 소리 세계를 접할 수 있다. 강도근 후계자 양성소를 설립, 동편제 소리의 맥을 이어온 판소리 동편제의 마지막 대가이다. 안숙선(국립창극단장)은 초기에 그가 길러낸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17세 되던 해에 동편제 판소리 명창 김정문 문하에서 소리를 배운 강도근은 흥보가 중'제비 후리는 대목'이 특기이다. 20세 때 상경하여 조선성악연구회에서 당대 최고 명창의 한사람인 송만갑 선생에게 판소리 다섯마당을 두루 배웠고, 25세 때에 구례로 가서 박봉술의 형 박봉채(朴奉彩)에게 판소리를 지도받았다. 지리산 쌍계사 일대에서 7년여 동안 혼자 공부한 후 하동으로 유성준을 찾아가 판소리 수궁가를 배웠다. 해방을 전후해서 동일창극단, 조선창극단, 호남창극단 등을 전전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목포, 이리, 여수, 순천 등지의 국악원에서 창악 강사를 지냈다. 1973년 이후 남원국악원을 창립하여 강사를 지냈고, 틈만 나면 선유폭포 등 지리산 등지를 다니며 연습을 한 노력파였다. 조선시대 명창으로 추앙되던 송만갑의 판소리 전통을 이어받아 동편제 소리를 고수해 오던 그는 환갑을 넘겨 60대 중반에서야 판소리계에 이름을 내기 시작한 은둔의 예술인이기도 했다.금파 감도근 약력 남원 출생 (1918-1996) 1928년(10세) 김정문에게 흥보가 사사 1953년 부산 전국판소리경연대회 최우수상 1981년 한국국악협회 국악공로상 1985년 남원시민의 장 문화장 1986년 KBS국악대상 1992년 동리대상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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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산조와 거문고산조의 명인. 녹야 김윤덕녹야 김윤덕은 1918년 어두운 시대에 태어났지만, 풍류를 익히는 즐거움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3년 정읍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정지선에게 양금정악을 배운 것에서 시작해 가야금정악, 거문고 정악을 배우며 지방 풍류를 두루 익혔다. 1947년 상경한 김윤덕은 다양한 산조를 접하게 되었고 풍류에 대한 그의 열정은 더욱 커졌다. 산조에 대 한 지평을 넓혀가던 그는 정남희의 음악적 깊이와 격조에 큰 인상을 받았는데, 정남희의 산조가 뿌리가 실한 산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가야금산조는 조선 말기 김창조가 시나위음악을 토대로 판소리 음악을 도입해 연주하며 유명해졌는데, 그즈음 한숙구와 박팔괘가 가야금산조를 짜서 연주하였고, 그 이후에 가야금산조 명인들이 탄생해 나름대로 가락을 지어 보유자의 이름을 딴 가야금산조들이 등장했다. 정남희는 가야금산조 1세대인 김창조와 한숙구가 사사한 안기옥에게 가야금산조를 전승받았고, 김윤덕은 자신이 인정한 정남희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웠다. 가야금산조의 기본은 탄탄한 오른손 터치와 왼손 농현, 그리고 성음인데, 각자가 배운 산조가락을 변형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독창적인 연주법을 창안하는 것이 실력 차이를 만들어낸다. 음악적 재질이 매우 뛰어났던 김윤덕은 스승인 정남희의 산조에 새로운 가락을 짜 넣어 ‘김윤덕류 가야금 산조’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의 산조는 이영희, 황병기, 원한기, 이재숙, 김승희 등에게 이어졌다. ‘김윤덕류 가야금산조’는 중중모리와 자진모리장단에서 헤미올라(Hemiola)·신코페이션(Syncopation) 등 장구 장단과 엇갈리어 떨어지는 가락이 3배나 되는 등 복잡하고 다양한 리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담백한 농현의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흐름이 남성적이고 묘법이 뛰어나며 미세한 삼라만상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해 듣는 이로 하여금 깊은 감동을 끌어낸다는 평을 받는다. 김윤덕은 가야금을 반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가야금 병창에도 뛰어났고, 거문고산조 등 다양한 민속 풍류를 아우르는 명인이었다. 당시 민속악인으로 유일하게 자신의 가락을 악보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그는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대한국악원 국극사의 단원으로 활동하였고, 1950년부터 1961년까지 국립국악 원에 출강하며 많은 제자를 배출했으며, 1960년대 이후부터 서울대학교와 국악예술학교 등에 강사로 재직하면서 후진 양성에 애정을 보였다. 그가 제자들을 ‘제자님’이라고 존대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음반 작업도 활발히 했는데, 1960년대에 거문고산조 음반을 취입하였고, 1977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기록 음반에 가야금산조를 취입하였다. 또한 『가야금구음정악보』, 『현금산조보』, 『현금정악보』, 『가야금풍류국문 신보』, 『가야금정악보』 등의 악보를 발간하기도 했다. 김윤덕은 국악기 명인들과 함께 해외공연을 다니며 우리 전통음악을 세계에 알리는 문화 사절단 역할도 톡톡히 했는데, 미국 카네기홀에서는 10회 앙코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지난 4월에 그를 기념하는 기념우표가 발행됐을 만큼 근대 국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문화재청) 녹야는 어려서부터 정자선(양금풍류), 김화동(가야금병창), 김광석(가야금풍류), 김용근(거문고풍류)에게 풍류 음악을 익혔고, 20대 후반부터 정남희, 강태홍에게 가야금산조를 한갑득에게 거문고산조를 전수받았다. 가야금산조와 거문고산조의 명인. 그의 가락은 형식과 구성에 있어 우조, 계면조, 평조의 구분이 확실하고 흐름이 남성적이었으며 단모리 가락의 묘법이 뛰어나고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1968년에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가야금과 거문고 외에도 양금·설장고 등 많은 악기에 고루 능했고 가락을 기록할 때는 한글 문자보다 양악의 오선보를 병용했다.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그의 가락은 형식과 구성에 있어 우조, 계면조, 평조의 구분이 확실하고 그 흐름이 남성적이었으며 단모리 가락의 묘법이 뛰어나고 미세한 삼라만상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했던 것이 특징이었다. 스승의 전통을 이어 받아 '김윤덕류 가야금산조'와 '김윤덕류 거문고산조'를 만들었으며, 1968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저서에 〈현금산조보〉, 〈현금정악보〉, 〈가야금구음정악보〉, 〈가야금풍류국문신보〉, 〈가야금정악보〉 등의 악보가 있다. 녹야 김윤덕 약력 전북 정읍 출생(1918-1978) 1930년 천원공립보통학교를 졸업 1933년 정읍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 정자선(鄭慈善)에게 양금을, 1932년 김광석(金光錫)에게 가야금을, 1933년 김용근(金容根)에게 거문고를 배웠다. 1947년 정남희(鄭南希)에게 가야금산조, 1948년 한갑득(韓甲得)에게 거문고산조 전수받음 1945년 대한국악원 국극사의 단원으로 활동 1950~1961년 국립국악원 국악사 및 국악사양성소 강사 겸직1961년 서울대학, 숙명여고, 서울국악예술학교 재직 일본·멕시코·유럽·미국 등지에서 해외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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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교방굿거리춤’ 명인 김수악"그의 구음이면 헛간의 도리깨도 춤춘다" "그 앞에만 갔다 오면 춤이 달라진다" 춘당(春堂) 김수악은 전설적인 영남 제일의 춤꾼이다. 김수악은 1926년 함양군 안의읍에서 만석꾼 집안 장남의 5자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순녀. ‘수악’은 집에 들른 스님이 명이 길어지라고 지어준 이름이다. 큰 언니 김취란은 가야금의 명인이며 황병기의 스승으로 유명한 예인이다. 7살에 진주로 이사한 순녀는 9살부터 진주권번에서 본격적으로 춤, 소리, 악기를 배웠다. 판소리는 유성준·정정렬·이선유·김준섭 등 당대 최고의 명인들에게 다섯 바탕을 사사했다. 구음은 전두영에게 배웠고, 강태홍·김종기·박상근 등에게 가야금과 아쟁도 배웠다. 춤은 김옥민을 시작으로 한성준의 ‘검무’, 최완자의 ‘굿거리춤’ ‘검무’ ‘입춤’을 물려받았다. 26세에 어머니가 되었지만 춤이 더 귀했다. 결혼과 육아로 춤을 접었는데. 1946년 의기 논개의 비석을 세우기 위한 모금공연 ‘대춘향전’ 출연으로 다시 무대에 섰다. 1949년에는 진주에서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예술제 ‘개천예술제’에서 춤과 소리, 연주로 대중을 휘어잡았다. 1960년대 초반 남편 사별후 시골 아낙네로 살던 중 국가의 권유로 '진주 검무' 예능보유자가 된다. 1969년부터 목포 유달국악원, 1971년 광주 호남국악원에서 춤을 가르치고 1973년 진주 민속예술원을 설립했다. ‘강산 제일무’라는 별칭은 1980년대 후반 서울에서 ‘교방굿거리춤’을 추면서 전국으로 퍼졌다. 최완자의 ‘굿거리춤’에 김녹주류의 ‘소고춤’을 이어붙여 만든 김수악만의 브랜드 ‘진주교방굿거리춤’. 97년 경남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고 김수악은 예능보유자가 됐다. "굿거리춤은 발디딤과 손놀림 등 모든 춤의 원동력이라 그것부터 배워야 해요. 교방이라는 이름 때문에 기생춤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마당에서 추는 군무와 달리 실내에 서서 추는 입춤이어서 동작이 아담하고 기교가 뛰어나죠.” S라인의 손목사위도 김수악 굿거리춤의 특징이다. "60년대부터 춤을 가르치는데, 녹음한 곡은 다양하지도 않고 듣기도 민망할 만큼 시원치않았어요. 그렇다고 악사를 쉽게 구할 수도 없고. 호남에는 소리꾼과 악사들이 많은데 영남은 사정이 달랐어요. 결국 제가 장구치고 입으로 소리 내면서 제자들을 가르쳤지요. 다양한 악기 소리를 내려니 악기 특성별로 소리도 달리 내야 했어요. 어릴 때 판소리 다섯바탕을 남선생에게 배우면서 호방한 동편제를 익혔기 때문인지, 장조와 단조의 구음을 자유롭게 구사했지요.” 전국에서 공연되는 굿거리춤에는 녹음된 김수악의 구음이 단연 최고다. 병상에서 제자들에게 강조한다. "무겁게 추되 발디딤을 살랑살랑하면서 속은 깊으게. 몸에 알뜰한 멋이 들어야만 알뜰한 예술이 나와!” 김수악 약력 1926년 5자매 중 둘째로 출생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12호 진주검무 기능보유자 지정1969년 목포 유달국악원 지도교수1971년 광주호남국악원 지도교수1973년 김수악민속예술학원장1975년 경성대 기악강사1977년 진주시립국악원 전임지도교수1983년 한국국악협회 경남지회 진주시 지부장1986년 진주시립국악학교 지도교수1997년 경남무형문화재 제 21호 진주교방굿거리춤 기능보유자 지정 수상 경상남도문화상, 경남진주시문화상, 대한민국사회교육문화상 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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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한량춤'의 명무, 김진홍"춤은 칼과 같아서 하루만 안 갈아도 녹이 스는거여."(이매방) 김진홍이 평생 등에 비수처럼 꼽고 살았던 좌우명이다.30대 한창 젊을 때 진주살풀이와 진주교방굿거리, 진주검무로 명무가를 일궜던 김수악 명인에게서도 예술의 경지가 어디까지인지 깨닫게 된다. "자네는 음악과 춤이 무엇인지 아는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절이 인생의 희로애락이어서 그것이 바로 춤이라네."(김수악) 스승의 물음에 딱히 답을 못했던 기억이 선하다. 스승의 선문답 같은 화두를 지금도 놓치지 않았다.1976년(42세) 부산민속예술보존회에 입회하여 만난 김석출(동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의 사촌동생 김계향은 또 다른 춤의 세계를 열어준다. 당시 동래학춤의 입장단(구음)을 하던 김계향에게서 굿공부를 하면서 지전춤, 반야용선춤, 꽃맞이춤 등 춤의 뿌리가 되는 굿춤(무무)을 배웠다. 잠깐 경기 재인청 재인(才人) 이동안으로부터도 태평무와 진쇠춤도 배웠다.1983년 49세 때 제9회 전주대사습에서 승무로 무용부문 장원을 한다. "춤이라 하는 것은 테크닉을 많이 넣으면 춤추는 사람한테 여유가 없어지는 거라예. 테크닉 많이 넣고 잔가락 많이 넣고 추는 춤은 그냥 춤일 뿐이지예. 빨리 많이 추는 것보다 시간이 걸리드래도 한 동작 바르게 추는 춤은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합니더."춤은 끝까지 감상하고 난 뒤에도 여운이 남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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