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뉴스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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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경기소리 2004년 02월 26일 ~ 27일일 시 : 2004년 02월 26일 ~ 27일 오후 7:00 ~ 9:00 주 최 : 사)경기민요보존회,580-3224 장 소 : 국립국악원 우면당 내용 - 12좌창중 : 유산가, 제비가, 소춘향가, 십장가 민요: 정선아리랑, 한오백년, 강원도아리랑, 금강산아리랑, 노랫가락, 청춘가 등 기타: 휘모리 잡가, 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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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앙상블 '달' "달하" 2004년 02월 20일일시 : 2004년 02월 20일 오후 7:00 ~ 9:00 주최 : 거문고앙상블 '달' 문의 : 018-227-7465 장소 : 국립국악원 우면당 내용 - 겨울섬에서/계성원 rock garden 당신/이상규 달/박정규 설국/조원행 달하/임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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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국악관현악단 정기연주회 2004년 02월 19일일 시 : 2004년 02월 19일 오후 7:30 ~ 9:30 주 최 : kbs국악관현악단,781-2255 장 소 : 국립국악원 예악당 내 용 : 실내악 및 창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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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금화악회 정기연주회 2004년 02월 18일일 시 : 2004년 02월 18일 오후 7:00 ~ 9:00 장 소 : 국립국악원 우면당 주 최 : 금화악회. 02) 3277-2449 내용 : 술대굿 춘별곡 거문고와 타악을 위한 화(和) 정유후사 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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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女舞), 허공에 그린 세월 2004년 02월 12일 ~ 13 일일시 : 2004년 02월 12일 ~ 13 일 오후 7:30 ~ 9:30 [주 최] 주)크림스커뮤니케이션스, 축제의땅, 공연예술기획 이일공 3446-6418 [협 찬] 문화관광부, 서울특별시, CID국제무용협회, 세계민족무용연구소, 예술방송국 [장 소] 국립국악원 예악당 내용 - 장금도의 민살풀이춤, 강선영의 승무 , 최희선의 달구벌입춤 김수악의 교방굿거리춤 , 김금화의 거상춤, 권명화의 살풀이춤, 한동희의 나비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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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얼 이영주 2004년 2월 25일남도소리 2004 - 줄소리, 노래소리' 일시 : 2004년 2월 25일 19:00 장소 : 광주문화예술회관 062) 510-9333 * 출연-이영주 가야금병창단, 김덕숙 * 사회-강현구, 고수-김동현 * 가야금병창, 한국무용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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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문화인물: 신 흠생애 및 업적 신 흠(申 欽) : 1566~1628, 조선 중기의 문신.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판서,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을 지냄. 조선 시대 4대 문장가로 일컬어질 만큼 뛰어난 문장력으로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 제작에도 참여하였음.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정주(程朱)학자로 이름이 높아 한문학의 태두로 일컬어짐. 작품으로는 《상촌집(象村集)》, 《야언(野言)》, 《낙민루기(樂民樓記)》 등이 있음. 신흠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간결하고 장중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선조의 신망을 받으면서 항상 문필과 연관된 문한직(文翰職)을 겸했다. 그러면서 대명(對明) 외교문서의 작성,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문운의 진흥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시대의 난관을 극복하며 인조대(代)에 와서는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왕조 최고의 벼슬인 영의정에 올랐다. 문장에 있어서는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계곡 장유(谿谷 張維), 택당 이식(澤堂 李植)과 더불어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호칭되며 조선 4대 문장가로 널리 알려졌으며, 한편 한문학의 정종(正宗)으로 칭송받기도 했다. 젊었을 때는 경당(敬堂) 또는 백졸(百拙)이라 호를 지었고 어떤 때는 남고(南皐)라 부르기도 하고 현헌(玄軒)이라 바꿔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김포 상두산(象豆山)아래 농장생활을 할 때는 상촌거사(象村居士)라는 호 하나를 사용했다. 만년에 들어서는 방옹(放翁)이라 일컫기도 하고 유배생활 중에는 여암(旅菴)이라 편액을 걸기도 하였다. 한편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부음을 듣고 애도하며 글을 지을 때는 현옹(玄翁)으로 명명했다. [img:2월(신흠-).jpg,align=,width=243,height=365,vspace=0,hspace=0,border=1] 신흠은 1566년(병인년·명종 21) 1월 28일 한성부 장의동에서 태어났다. 정숙한 덕과 훌륭한 예의범절을 갖춘 어머니 은진 송씨가 가슴속으로 큰 별이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난 다음날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신흠은 모습이 남달랐는데, 이마가 넓고 귀가 컸으며 눈은 샛별 같았고 오른 뺨에는 탄환 모양의 사마귀가 있었다. 어린 시절에 노는 것도 범상치 않았으며 몸가짐이 단정하고 무게가 있었다. 그는 부계와 모계 모두 사대부 가문으로 남부럽지 않은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으나, 일곱 살 되던 해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여의어 외조부인 의정부 좌참찬 송기수의 집에서 자라게 된다. 여덟살 때부터 외조부의 훈도를 받아 글 공부에 전념하여 10세 때에는 논어와 이소(離騷)를, 13세 때에는 경서·사서·제자·문집을, 14세 때에는 천문·지리·율력·산수·의학을 두루 섭렵하고 유려하게 글을 잘 지어 명성이 드러났다. 1581년 16세에 향시(鄕試)에 급제하고 20세에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仕試), 21세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한다. 학문에 전념한 결과 일찍부터 문명(文名)을 떨쳤고 관직에 나가서는 준엄한 이념과 행동을 보이면서 자기 시대의 수많은 과제를 정면으로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래서 그는 관료로서 또는 정치가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흠이 살았던 시대는 혼란과 격동의 시기였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계축옥사와 인조반정, 정여립의 난과 이괄의 난 등 크고 작은 정치적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그 사건들의 고비마다 신흠은 정치권의 중심에 있었고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그 사건들과 관련을 지니게도 되었다. 그 결과 그는 삭탈관직, 방축, 유배등의 세월을 보내야 했고 고통을 새겨야 했다. 그러나 그는 방축이나 유배의 생활에 동요되지 않았고 오히려 풍요한 마음을 경영하며 글로 부유한 세상을 맞이하였다. 신흠의 문장 작법은 육경(六經)에 기초하고 있으며 어려서는 한퇴지를 좋아하였고 장년이 되어서는 고문(古文)을 거의 모두 읽었으며 만년에 이르러서는 좌씨(左氏), 사기(史記), 장자(莊子), 이소(離騷), 예기(禮記), 고악부(高樂府), 선시(選詩), 이백(李白), 두보(杜甫)의 시등 제가(諸家)의 글을 섭렵하고 애송하면서 대가의 문체를 수명(修明)하였다. 그가 남긴 『상촌집』63권에는 한시 2036수가 전해지고 있으며 이들 작품은 문장 4대가로서의 명성을 새겨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청구영언』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는 한글 시조 30편은 한시에 비해서 비록 적은 수이긴 하지만 순수한 우리말을 사용하여 수준 높은 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공적을 더욱 크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기념 행사 계획 1. 기념행사 ○ 행 사 명 : 문화유적 답사 - 기 간 : 2004. 2.18(수) - 장 소 : 신흠선생 관련 문화유적지 - 주 관 : 대전동구문화원(☎042-623-7211) - 내 용 : 경기광주, 대전동구 주산동지역 유적답사 ○ 행 사 명 : 신흠선생 연구책자 발간 - 기 간 : 2004. 2월중 - 주 관 : 대전동구문화원(☎042-623-7211) - 내 용 : ‘신흠의 생애와 문학’에 대한 연구책자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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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문화인물: 조희룡생애 및 업적 조희룡(趙熙龍) : 1789~1866, 조선 후기의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 수예론(手藝論)을 강조함으로써 매화도와 묵란도에서 고유의 화풍을 확립. 1847년 벽오시사(碧梧詩社)를 결성, 후배화가들을 이끌고 문인화단의 중심인물로 활동, 추사 김정희 등이 도입한 중국 남종 문인화로부터 이념미를 배제하고 조선적 감각을 가미한 《조선문인화(朝鮮文人畵)》의 세계를 열었음. 작품으로는 《홍매도대련(紅梅圖對聯)》, 《홍백매 팔연폭(紅白梅 八連幅)》, 《위천하지노인도(爲天下之勞人圖)》 등이 있음. 1. 과거를 딛고 새롭게 나아가게 하는 힘 ‘조선 문인화(朝鮮文人畵)’의 세계를 연 화가 조희룡은 1789년 5월 경기도 양주(지금의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보낸 어린 시절은 정조 치하의 평화로운 세상으로서 ‘조선진경(朝鮮眞景)’ 문화가 꽃을 피웠다가 퇴락하던 시기였다. 그림에서 조선적 소재를 추구하던 ‘조선진경’은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등 불세출의 대가들을 배출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조선진경은 지속되지 못하고 정체기를 맞이하였고 때맞춰 유입되던 청의 발달된 문물로 인해 신선감을 잃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그 폐해로 말미암아 사회기강이 해이되고 색정적 속기가 만연하자 ‘건강한 조선’을 앞세우던 ‘진경’은 1830년대에 이르면 문화현상으로서의 주도적 위치를 급속히 상실하고 만다. 사회는 사치에 빠지고 타락과 방종이 극에 달해 있었다. 조선사회가 나아갈 새로운 길을 찾던 젊은이들은 당시 일부 선각자에 의해 도입되던 중국의 남종 문인화(南宗 文人畵)에 주목하였다. 거기에 새로운 길이 있었다. 조선진경의 현장주의는 문인화의 관념세계로 대체될 수 있었고 그것의 색정적 속기는 탈속한 정취를 강조하는 문인화의 고답적 이상주의로 해소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젊은이들은 문인화의 고답성이 조선 백성들의 영혼을 맑게 씻어 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탈속한 정취에의 열렬한 추종이 문인화 운동의 추진력이 되었다. 조희룡은 30세 전후에 이러한 문인화를 학습하게 되었다. 그는 문인화를 공부하면서 자신의 길을 개척한다는 창조적 자세를 견지하였다. ‘남의 수레 뒤를 따르지 않겠다(不肯車後)’라는 그의 자세는 그로 하여금 과거를 끊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img:1월(조희룡).jpg,align=,width=359,height=349,vspace=0,hspace=0,border=1] 2. 불긍거후(不肯車後)로 연 새로운 세계 [매화도와 묵란도] 조희룡은 처음 배웠던 중국의 대가 동이수와 나빙의 매화법에 매달리지 않고 전혀 새로운 매화의 세계를 열었다. 대작 매화도 ‘장륙매화(丈六梅花)’를 창안하고 소략하였던 꽃그림에서 수만송이가 만발한 매화도로 발전시켰다. 이어 선비의 고결함을 상징하던 매화를 대자대비한 부처의 마음으로 탈바꿈 시켰고 더 나아가 매화줄기의 전체적 구도를 비상하는 용으로 대체함으로써 그림 전체에 격렬한 역동성을 부여하였다. 매화도에 있어 조희룡 만큼 확실한 위치를 구축한 화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시’를 보편으로 규정하고 ‘난’을 외부로 표출된 미의 실체로 규정하면서 자신의 이러한 이론이 구현되어 있는 난을 ‘경시위란(經詩緯蘭)’이라 했다. 난에는 나라 잃은 중국 한족들의 ‘극단적 상실의 정서’ 대신 시를 통해 얻어진 ‘깊고 그윽한 즐거움’이 기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본질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기초 화란법조차 무시되는 거침없는 필치가 종종 구사되었고, ‘뿌리뽑힌 채 고통에 시달려 바짝 마른 난잎’ 대신 ‘ 잘 자라 살지고 알맞게 통통한 잎새’가 그려졌다. [조선 문인화(朝鮮 文人畵)] 조희룡을 내세움은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하나의 세계를 제기하는 것이다. 조희룡을 주장함은 우리 미술계가 잃어버리고 있었던 ‘조선 문인화’라는 세계를 찾아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조선을 전면에 내세우며 우리 강산과 토종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그린 시대를 ‘조선진경’이라 하였듯이 조선인의 감각을 중시하는 문인화를 우리는 ‘조선 문인화’라 할 수 있다. 조희룡은 중국 남종 문인화에서 그림을 배웠으나 화법과 이념에서 중국인들의 그것을 절대시 하지않았다. 조희룡은 남의 뒤를 따르지 않겠다는 ‘불긍거후’라는 낱말을 통해 조선 문인화의 단초를 열었다. 조희룡은 중국의 예술이론에 있어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가슴에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들어있어야 한다’라는 이론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중국인들은 ‘문인들이라면 서권기(書卷氣) 문자향(文字香)이 가슴속에 들어 있어야 한다’ 라고 했고 ‘산수화를 그리려면 먼저 가슴속에 언덕과 절벽(邱壑)이 들어있어야 한다’ 라고 했다. 그러나 조희룡은 비록 가슴속에 ‘서권기 문자향’이나 ‘구학(邱壑)’이 이루어져 있다 하더라도 손의 기량이 따라주지 않으면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산이 높고 달이 작다’ 라는 개념을 그림으로 그릴 때 가슴속의 그것과는 별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손의 기량에 그림의 성패가 달려 있음을 강조한 말이다. 조희룡은 가슴속에 이루어져 있는 ‘심의’보다 화가로서의 ‘기량’을 중시하는 화론을 새로이 정립하였다. 이를 조희룡의 수예론(手藝論)이라 한다. 조희룡의 친구들과 그를 따르는 후배들이 조선 문인화의 세계를 열었다. 그들은 벽오시사(碧梧詩社)라는 모임을 만들고 거기에서 이론을 토론하고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다. 조희룡은 ‘전기’, ‘유재소’, ‘유숙’ 등 시대의 맨 앞줄에 서있던 후배화가들에게 자신의 ‘수예론’을 지도하면서 중국의 문인화 이론을 우리의 시각으로 소화하였다. 전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화랑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화실 ‘이초당’에서 그림감정과 중개활동을 통해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였다. 그는 벽오시사의 맹원들에게 조선사람이 사랑하고 시장이 즐겨찾는 문인화를 요구하였다. 유숙은 도화서의 그림과 진경산수와 중국 문인화를 섭렵하면서 각자의 장점을 두루 수렴하였다. 벽오시사의 맹원들은 조선인의 미감각에 호소하는 그림을 그렸다. 벽오시사를 중심으로 한 화가들에 의해 조선인의 감각미가 강조된 ‘조선 문인화’가 첫발을 뗀 것이다. [중국 남종 문인화] 조희룡과 그 주변의 화가들이 문인화의 조선화를 추구한데 반해 추사 김정희와 그의 제자 허유는 중국 정통 남종 문인화의 이념에 충실했다. 김정희는 청년시절 중국의 신문물에 접한 이후 중국의 문예를 조선에 도입하였다. 김정희는 ‘서권기 문자향’이라는 중국 문인화의 이념미를 고집한데 반해 조희룡은 그림에서 중국식 이념을 탈색시키고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강조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3. 시련을 딛고 이룩한 절정 조희룡은 1851년 조정의 예송논쟁에 개입하였다가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도에 유배조치 되었다. 그는 유배지 오두막집에 ‘만구음관(萬鷗唫館)’이라는 편액을 붙이고 그 속에서 칩거하면서 집필과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당호가 있는 그의 그림 19점 중 8점이 이 때 나올 정도로 활발한 작품활동이 있었고 묵죽법(墨竹法)과 괴석도(怪石圖) 그림에 일가를 이룸은 물론 중국 송나라의 대가 ‘곽희’가 만든 산수화 개념조차 수정하여 ‘조선 산수화’ 특유의 감각미를 강조하였다. 유배 시기 조희룡의 기량은 이론의 정립과 기량의 완숙으로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1853년 조희룡은 3년간의 임자도 유배생활을 마감하고 서울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후배지도와 은거생활을 계속하다가 1866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조희룡과 김정희가 심어놓은 문인화의 씨앗은 계속 싹을 틔워 나갔다. 조희룡의 후배 화가 ‘유숙’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던 ‘장승업’이 자신의 스승처럼 벽오사(碧梧社)의 여러 세상을 수렴하여 찬란한 절정의 아름다움을 완성해 냈다. 조희룡 매화도의 맥이 ‘유숙’을 거쳐 ‘장승업’의 그림세계로 흘러 들어갔다. ‘장승업’의 시대에 오면 그의 앞 시대 선배들이 그토록 고민했던 ‘서권기 문자향’이란 이념미는 눈 녹듯 사라져버리고 대신 벽오시사의 ‘수예이념’만이 그림 속에 가득 차 있다. 중국 남종 문인화 특유의 ‘이념미’는 해체되고 조선인의 색감에 호소하는 감각적 아름다움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중국의 정통 문인화는 ‘호남 남화’로 맥이 이어졌다. 김정희의 제자 ‘허유’는 고향 진도에 운림산방을 짓고 자신의 그림세계를 열었다. 그의 후손들과 제자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쳐오면서 남종 문인화 특유의 이념미에 새로운 시대미를 더해갔다. 나라를 몽고족에게 빼았겼던 원 4대가의 이념미가 김정희에 의해 도입되었고 그 상실의 정서가 후손과 제자들에게 대물림되었다. 나라 잃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유민들은 이들의 그림에 정서적 공감대를 느끼며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 받을 수 있었다. 2004년 새해에 왜 조희룡을 제기하는가? 그것은 과거를 딛고 앞으로 나가는 조희룡의 ‘불긍거후’ 정신을 제기함이요, ‘남의 수레 뒤를 따르지 않으리라’라는 의지로 연 새로운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이기 위함이다. 기념 행사 계획 1. 기념행사 ○ 행 사 명 : 조희룡선생 출판기념회 및 학술세미나 - 기 간 : 2004. 1.20(화)~1.21(수) - 장 소 : 전남 신안군 임자면사무소 복지회관 - 주 관 : 신안군, 조희룡의 흔적을 찾은 사람들(☎061-240-8363) - 내 용 : 조희룡 평전 출판기념회 및 학술세미나, 학생 사생대회, 작품활동지 답사 등 ○ 행 사 명 : 조희룡선생 안내판 및 기념비 제막행사 - 기 간 : 2004. 7월중 - 장 소 : 전남 신안군 임자면 진리 - 주 관 : 신안군, 조희룡의 흔적을 찾은 사람들(☎061-240-8363) - 내 용 : 임자면 초입에 조희룡선생에 대한 연혁 및 업적 등에 대한 안내판 설치, 기념비 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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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지(支)의 동물들 - "소"소띠 해는 여유와 평화의 한 해이다. 소띠 해는 을축(乙丑), 정축(丁丑), 신축(辛丑), 계축(癸丑)의 순으로 육십갑자에서 순환한다. 십이지의 소(丑)는 방향으로는 북북동, 시간적으로는 새벽 1시에서 3시, 달로는 음력 12월을 지키는 방향신(方向神)이자 시간신(時間神)이다. 여기에 소를 배정한 것은 소의 발톱이 두 개로 갈라져서 음(陰)을 상징한다는 것과 그 성질이 유순하고 참을성이 많아서, 씨앗이 땅 속에서 싹터 봄을 기다리는 모양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丑]는 참고 복종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니 찬 기운이 스스로 굴복하기 시작한 것을 상징한다. 소는 우리나라의 농경 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단순한 가축의 의미를 뛰어넘어 마치 한 식구처럼 생각되어 왔다. 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노동력일 뿐 아니라 운송의 역할도 담당하였고, 급한 일이 생겼을 때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비상금고의 역할까지 하였다. 사람들은 사람 이외에는 소가 가장 친숙했던 동물이었다. 소는 우직하나 성실하고 온순하고 끈질기며 힘이 세나 사납지 않고 순종한다. 이러한 소의 속성이 한국인의 정서 속에 녹아들어 여러 가지 관념과 풍속을 만들어 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소가 말이 없어도 열두 가지 덕이 있다”라고 했다. [img:소.gif,align=,width=300,height=248,vspace=0,hspace=0,border=1] 우리나라의 민속에는 특히 소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우리 민속이 농경문화 중심으로 발달되었기 때문에 농사의 주역인 소가 여러 풍속과 깊은 관련을 맺어 온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앞서 우리는 소를 한 가족처럼 여긴다고 했다. 그래서 소에 대한 배려도 각별했다. 날씨가 추워지면 짚으로 짠 덕석을 입혀 주고, 봄이 오면 외양간을 먼저 깨끗이 치웠으며, 겨울이 올 때까지 보름마다 청소를 해 주었다. 이슬 묻은 풀은 먹이지 않고, 늘 솔로 빗겨 신진대사를 도왔으며, 먼 길을 갈 때에는 짚으로 짠 소신을 신겨 발굽이 닳는 것을 방지하였다. 우직하고 순박하여 성급하지 않는 소의 천성은 은근과 끈기, 여유로움을 지닌 우리 민족의 기질과 잘 융화되어 선조들은 특히 소의 성품을 아끼고 사랑해 왔다. 이처럼 소는 우리 생활과 가까운 곳에서 가장 친근한 동물로 함께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민속학적인 모형이 만들어 졌다. 소띠 해에 태어난 사람들은 과연 소를 닮았을까? “천천히 걸어도 황소걸음”이라는 속담처럼 끈기 있게 꾸준히 노력하여 결국 성공을 만드는 사람 중에 소띠 태생이 많다. 바로 소띠들의 공통점이 근면과 성실이다. 그러나 고집하나 대단해서 그야말로 황소고집이라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자기 페이스로 밀고 나가기 때문에 설득하기가 보통 힘든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귀에 경읽기’라는 말이 생겨났을 것이다. 사교적인 것 같으면서도 고독한 것이 소띠들이고 일을 위해 태어나 일을 하다 죽는 것도 소띠다. 그러나 ‘겨울 소띠는 팔자가 편하다’, ‘그늘에 누운 여름 소 팔자다’라는 말처럼 시절만 잘 타고나면 일하지 않고 편하다는 말이다. 이것은 일복이 많은 소에 대한 역설적인 표현이다. 또한 소는 둔한 것 같으면서도 신나는 일에는 ‘쇠뿔도 단김에 빼듯‘ 침식을 잊고 해내지 않으면 몸살을 앓는 것도 소띠들의 공통점이다. 한번 마음먹었다 하면 하늘이 두 쪽이 나도 해내는 사람 역시 소띠이다. 그러나 한번 화가 났다 하면 자신의 감정을 조정하지 못하고 한바탕 떠들썩하는 약점도 가지고 있다. 강자에 강해 강자에게는 결코 무릎을 꿇지 않지만, 약자에게는 예상외로 인정과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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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지(支)의 동물들 - "쥐"쥐띠 해는 풍요와 희망과 기회의 해이다. 쥐해에 태어난 사람은 식복과 함께 좋은 운명을 타고났다고들 한다. 쥐가 우리 생활에 끼치는 해는 크지만 위험을 미리 감지하는 본능이 있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살아남는 근면한 동물, 재물, 다산, 풍요 기원의 상징으로서 구비전승에 두루 나타난다. 중국에서 甲乙丙丁 등의 십간(十干, 天干)과 자축인묘(子丑寅卯) 등의 (十二支, 地支)의 글자를 아래위로 맞추어 날짜의 명칭으로 사용한 것은 3천년 전부터이다. 그것은 갑골문에 丙子, 癸未, 乙亥, 丁丑 등의 글자들이 보임으로써 알 수 있다. 그러나 십간과 십이지를 배합하여 60갑자가 합성된 것은 상당히 연대가 지난 뒤에 성립되었다. 이것을 가지고 연대로 표기한 것은 한대(漢代)인 기원전 105년인 丙子부터 시작되었다. 약 2천년 전이었다. 12지에 대하여 자를 쥐, 축을 소, 인을 호랑이 등 동물을 배정시킨 것은 2세기경인 후한(後漢) 왕충(王充)의 논형(論衡)에서 처음으로 생긴 것이다. 이런 것들이 생기면서 오행가(五行家)들이 십간과 십이지에다 金木水火土의 오행을 붙이고 상생상극(相生相剋)의 방법 등을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배열하여 인생의 운명은 물론 세상의 안위까지 점치는 법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것을 가지고 운명을 판단하는 것은 매우 근거가 없는 일이지만 다만 세상이 시끄럽고 개인의 미래 생활이 불안하여 해가 바뀔 때마다 어떤 새로운 기대를 걸어 보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정초가 되면 누구나 올해는 무슨 띠의 해이며, 그 해의 수호동물(守護動物)이라 할 수 있는 십이지의 띠동물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찾아서 새해의 운수를 예점(豫占)하려고 했다. 또한 그 해에 태어난 아이의 운명과 성격을 띠동물과 묶어서 해석하려는 풍속도 있어 왔다. 새로운 띠동물을 대하면서 그 짐승의 외형, 성격, 습성 등에서 상징적 의미를 만들어 새해를 설계하고 나름대로 희망에 찬 꿈과 이상을 품는다. [img:쥐.gif,align=,width=300,height=251,vspace=0,hspace=0,border=1] 물론 이들 12지의 띠짐승이 우리 일상생활에서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는 분명하게 제시할 수는 없지만 우리 조상들은 각 띠동물로부터 상징적 의미를 찾아서 나름대로 한 해의 운수를 예견하려 했고, 나아가서 생활 교훈과 행동 원리까지 얻었다는 사실은 여러 풍속과 문헌, 유물, 유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쥐가 십이지의 첫 자리가 된다. 그렇게 된 사연을 말해 주는 설화가 몇 가지 있다. 옛날, 하늘의 대왕이 동물들에게 지위를 주고자 했다. 이에, 그 선발 기준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정월 초하루에 제일 먼저 천상의 문에 도달한 짐승으로부터 그 지위를 주겠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각 짐승들은 기뻐하며 저마다 빨리 도착하기 위한 훈련을 했다. 그 중에서도 소가 가장 열심히 수련을 했는데, 각 동물들의 이런 행위를 지켜보던 쥐가 도저히 작고 미약한 자기로서는 먼저 도달함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그 중 제일 열심인 소에게 붙어 있었다. 정월 초하루가 되어 동물들이 앞다투어 달려왔는데, 소가 가장 부지런하여 제일 먼저 도착하였으나, 도착한 바로 그 순간에 소에게 붙어 있던 쥐가 뛰어내리면서 가장 먼저 문을 통과하였다. 소는 분했지만, 두 번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쥐가 십이지의 첫머리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미약한 힘을 일찍 파악하고, 약삭빠르게 꾀를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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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 민속이야기 "달집 태우기"달 집 태 우 기 글 김미선 그림 한성원 감수 엄기원(한국아동문학 연구소장) 드디어 정월 대보름입니다. 은석이가 정월 대보름을 애타게 기다려온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을이 온통 축제 분위기로 들떠 쥐불놀이며 횃불싸움을 벌이는 까닭도 있지만, 달집태우기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정월 대보름에 동네형들은 은석이가 아직 어리다고 달집태우기에 끼워주지 않았기 때문에 은석이는 무척 실망을 했었습니다. 형들이 내년에는 꼭 끼워주겠다고 약속을 해서 겨우 울음을 참은 은석이는 내년에는 자신도 근사한 달집을 만들어 형들과 달집태우기를 하겠다고 다짐했던 것입니다. "은석아, 아침부터 뭐하느라 이 수선이냐?" "어머니, 오늘 정월 대보름이잖아요." "정월 대보름이면 대보름이지 니가 왠 수선이야?" "어머니도 참... 이번엔 저도 달집태우기 하려구요." "니가... 그래 달집 만들려고 그 수선이냐?" "영호형이랑 이수형, 칠석이형들이 지신밟기하고 나서 다들 동네 뒷산에 모이기로 했어요. 저도 빨리 솔잎 모아가지고 달집을 만들어야 해요." 어머니는 어느 새 마을 청년들과 달집태우기를 하겠다고 수선인 은석이가 대견스러우신 듯 웃음을 지으셨습니다. 은석이는 솔잎이며 뒷간에 쌓여 있는 짚새기를 모으다가 모자라는지 결국 뒷산에 올라가 마른 나무까지 한짐을 해왔습니다. 마을 형들이 신나게 풍물을 치며 지신밟기를 마치고 뒷산에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을 때, 은석이는 이미 자리를 잡고 형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은석아 벌써 와있었냐?" "은석이, 네가 달집태우기 하려고 별렀던 모양이구나. 허허..." 은석이는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오는걸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형들은 어느새 능숙한 솜씨로 달집을 만들기 시작했고, 은석이도 일년내내 머리속으로 그려보던 달집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형들이 만들 때는 몰랐는데 직접 만들려니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습니다. 달집은 막대기 세 개를 적당한 간격으로 세워서 그 꼭대기가 한점이 되도록 묶으면 되는 것입니다. 달집을 만드는 방법은 어렵지 않지만 은석이가 만드는 달집은 곧게 서지 못하고 자꾸만 기울거나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게 왜 이러지... "은석이가 투덜대고 있는 사이에 어느새 이수형이 은석이의 등뒤로 다가왔습니다. "은석아, 달집이 잘 안 서지?" "엉. 이수형... 이게 잘 안서네." 은석은 멋적은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러길래 바닥이 편평한 곳을 택했어야지. 봐라, 여기는 조금 기울었잖아. 그러니까 이쪽을 더 파고... 막대를 여기에 묻은 후에 시작하면... 봐, 이제 잘 서지?" 이수형이 능숙하게 틀을 잡아주자 은석이의 달집도 금새 다른 형들의 달집마냥 똑바르게 서는 것이었습니다. 은석이는 속으로 '편평한 곳, 편평한 곳'을 되뇌이며 달집에 옷을 입히기 시작했습니다. 달집의 한쪽면을 남겨두고 다른 면을 모두 이엉으로 감싸는걸 마을 형들은 자기들끼리 옷을 입힌다고 말했습니다. 달집의 터놓은 쪽은 반드시 달이 떠오르는 동쪽을 향하도록 해야 하고 달집 속에는 새끼줄로 달모양을 만들어 달아야 했습니다. 새끼줄로 만든 달까지 다 매어단 은석은 이제 달이 떠오르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은석아, 달집 다 만들었냐?" "영호형! 응... " 은석은 자랑스레 자기가 만든 달집을 영호형에게 보였습니다. "처음 만든 것치고 아주 잘 만들었네. 근데 은석아, 너 달집 배도 채웠냐?" "배를 채우다니?" "그럴 줄 알았다. 배를 안 채우면 달집이 너무 빨리 타버려. 이수야! 너 솔잎 남은 것 있냐?" "여기" 이수형에게서 솔잎을 건네 받은 영호형은 달집 안에 솔잎을 차곡차곡 채워넣기 시작했습니다. "천천히 타라고 물을 조금 적시기도 하는데... 냄새도 나고하니 오늘은 우리 모두 물은 안 적시기로 했다. 이제 됐다." [img:달집1.jpg,align=,width=157,height=332,vspace=0,hspace=0,border=1] 은석이는 달집 만드는걸 여러모로 도와주는 형들이 고마웠습니다. '내년에는 혼자서 달집을 만들 수 있도록 해야지' 하고 생각을 하는 사이에 제일 나이가 많은 칠석이형이 앞으로 나섰습니다. "잘 들어라, 매년 하는거라 다들 알고 있겠지만 오늘은 은석이도 처음으로 자기 달집을 만들었고 하니까 내가 다시 말하마." 어느 새 달집태우는 걸 구경온 동네 꼬마들이 은석이를 부러운 듯이 쳐다봤습니다. 그중에는 연희의 얼굴도 보였습니다. 은석이는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이제 좀 있으면 달이 떠오를텐데... 달이 떠오르는걸 맨 처음 보는 사람이 달집에 불을 당겨라. 그리고 바로 달을 향해서 절을 해야 한다." 은석이는 영호형이 말을 하는 중간에도 연희 얼굴을 흘낏흘낏 쳐다보다가 그만 연희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얼른 고개를 돌리려는데 연희가 생긋 웃고 있는게 보였습니다. 늘 새침하게 외면하던 연희였는데, 은석이는 당장이라도 연희에게 달려가서 말을 걸고 싶은걸 가까스로 참았습니다. "딴짓 하지 말고 잘 들어. 어른들이 말씀하기를 달집을 태우고 달에 절을 하면 일년내내 부스럼도 안나고 더위도 안탄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장난치듯 하려면 아예 말아라. 경건한 마음으로 하란 말이다." 영호형의 긴 설교를 듣고 나서 모두들 달이 언제 떠오르나 동쪽 하늘을 뚫어져라 보았습니다. 은석이도 어슴푸레한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img:달집2.jpg,align=,width=167,height=329,vspace=0,hspace=0,border=1] 잠시 후 달이 떠오르자, 은석이는 자기의 달집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리고는 달에 절을 했습니다. 형들도 하나 둘 달집에 불을 붙였고, 수십개의 달집이 일제히 불을 밝히고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영호형을 선두로 형들은 신나게 풍물을 치며 달집 주위를 돌았고 꼬마들은 덩달아 소리를 지르며 달집 사이를 뛰어다녔습니다. 은석이는 신나게 타오르는 달집 사이로 연희의 모습을 찾으며, 나중에 어른이 되면 반드시 연희를 각시로 맞이하겠다고 달님께 약속을 했습니다. [img:달집3.jpg,align=,width=345,height=194,vspace=0,hspace=0,borde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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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세시풍속 - 머슴날, 영등제머슴날은 농가에서 머슴들의 수고를 위로해 주기 위해서 음식을 대접하며 즐기도록 하는 날로, 노비일 또는 일꾼날이라고도 한다. 가을 추수가 끝난 다음, 머슴들은 겨울 동안 크게 힘든 일없이 평안하게 지냈으나 2월에 들어서면 서서히 농사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고된 일이 시작되 기에 앞서 일꾼들을 하루 쉬게 하여 즐겁게 놀도록 하는 것이다. 머슴들은 농악을 울리며 노래와 춤으로 하루를 즐기는데, 주인들은 머슴들에게 돈을 주어 쓰도록 한다. 많은 노비를 거느린 대가에 서는 떡도 하고 많은 음식을 준비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 記)》에 의하면 정월 대보름에 세웠던 볏가릿대를 내려서 그 속에 넣었던 곡식으 로 송편 등의 떡 을 만들어 머슴들로 하여금 먹게 하였다고 한다. 크게는 손 바닥만하게 작게는 계란만하게 만드는 데, 모두 반쪽의 둥근 옥모양으로 한 다. 콩을 불려서 속을 만들어 넣고 시루 안에 솔잎을 겹겹이 깔고 넣어서 찐 다. 푹 익힌 다음에 꺼내서 물로 닦고 참기름을 발라 먹었는데, 머슴들이 이 떡을 나이 수대로 먹으면 좋다고 한다. 한편 경상남도 의령군이나 양산군에서는 머슴날이 성인식의 의미를 지니기도 하였다. 소년들은 신체가 건강해도 어른들과 노동력을 맞교환하는 품앗이를 할 수 없었는데, 그래서 그 해에 20세가 된 젊은이는 이 날 동네 어른들과 성인 머슴들에게 술과 음식을 한턱 낸다. 그러면 그 해부터 는 어 른으로 취급받아 성인과 품앗이를 할 수 있게 된다. 지방에 따라서는 20세 가 되어도 머슴날 성인들에게 한턱 내지 않으면 성인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경 우도 있다. 머슴날에 이렇게 성인식을 하지 않았을 때에는 두레가 났을 때 하는 수도 있다. 이처럼 머슴날은 평소에 대접받지 못했던 머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어, 그 해의 농사에 전념하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여는 농경 의례의 하나인 것이다. 2월 초하루에는 노래기를 퇴치하는 풍속도 전해진다. 노래기는 지방에 따라서는 '노내기'라고도 부르는 데, 한자로는 백족충(百足蟲)·마현(馬 )·마륙(馬陸)·환충(環蟲)이라고도 한다. 지네같이 생긴 벌레로 노린 냄새를 풍기며, 여름철이면 음습한 곳이나 짚 썩은 곳 등 지저분한 곳에 서 주로 산다. 이날 집안을 청결하게 하고 종이를 잘라서 향낭각씨(香娘閣氏)의 노리개 를 만들어 향낭각씨속 거천리(香娘閣氏速去千里)라는 한문 여덟 자를 써서 서까래에 매 달아 둔다. 이는 "향낭각씨는 속히 천리 밖으로 도망가라"는 뜻으로 향낭각씨는 곧 노리개 를 미화한 표현이다. 또는 소나무 잎사 귀를 추녀 끝에 꽂아 넣기도 한다. 영등은 바람을 일으키는 신으로, 천계에 살고 있다가 2월 1일에 지상에 내려와서 20일에 다시 올라간다고 한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영등할머니는 딸 혹은 며느리를 데리고 2월 초하룻날에 내려 왔다 가 3일, 15일 또는 20일에 하늘로 올라간다고 각기 다르게 믿고 있는데, 영등신앙은 주로 영남 지 방과 제주도에 분포되어 있다. 영등할머니가 인간 세상에 내려올 때 딸을 데리고 오면 일기가 평탄 하지만 며느리를 데리고 올 때에는 비바람이 몰아쳐 농가에 피해를 입힌다고 한다. 이는 인간관계 에 있어 친정어머니와 딸은 의합하지만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는 불화와 갈등이 있는데 그에 비 유해서 일기의 변화를 짐작한 결과이다. 일기가 불순하면 농작물이 피해를 입고 일기가 순조로우 면 풍작을 바랄 수 있으니 영등 할머니는 바람과 농작의 풍흉과 관계 되는 농신(農神)의 성격을 가진다. 또한 영등할머니가 지상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거센 바람이 일어 난파선이 많이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어부들은 이 기간 동안은 출어를 삼가며 일을 쉰다. 이와 같이 영등할머니는 농신이자 풍신 (風神)이어서 바람을 몰고 오기 때문에 농촌이나 어촌에서는 풍재 (風災)를 면하기 위해 영등할머니와 그 며느리에게 풍신제(風神祭)를 올리는데 이를 '바람 올린다'고 한다. 특히 바람이 심한 제주에서는 '영등제'를 지내는 데 '영등할망'이라고 불리는 여신이 섬 주변의 해산물을 증식시켜 준다고 믿고 있다. 영등할머니가 인간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금속(禁俗)이 있다. 즉 영등할머니를 맞이하기 위하여 황토를 파다가 문 앞에 뿌려 신성하게 하며, 대나무에 오색헝겊을 달아 사립문에 매달고,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금하며, 창도 바르지 않고 고운 옷을 입 는 것도 삼간다. 또 논밭 갈이는 물론, 땅을 다루거나 쌀을 집밖으로 내지 않는 다. 한편 영등할머니가 하늘로 오르는 날 비가 오면 풍년이 들고, 조금 흐려도 길 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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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과 김광석의 만남] <2. 21>□ 최고의 소리꾼 장사익과 기타리스트 김광석의 만남 부평문화사랑방에서는 개관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의미로 이 시대 최고의 소리꾼 장사익과 기타리스트 김광석이 한 무대에서 신명나는 무대를 이루어 냅니다. 1. 최고의 노래, 그리고 최고의 연주 2. 일 시 : 2004년 2월 21일 (토) 18:00 ~ 3. 프로그램 내용 장사익 공연은 일정한 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열린 형식을 지향합니다. 전통적인 판굿의 원리와 같은것이죠. 대개의 장사익 소리판은 여는 판, 몸판, 어울려 노는 판(일종의뒷전, 뒷풀이) 맺는 판으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관객의 반응에 따라 즉흥성이 더하는 순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가식이나 규격에 얽매이지 않은 솔직하고 순수한 장사익의 소리판에 기타리스트 김광석이 함께 합니다. 김광석은 2장의 독집앨범과 국내 4,000여장의 앨범에 세션으로 참여했으며, 이미 여러 차례 독주회를 열어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확보하고 있습 니다. 최고의 소리꾼과 기타꾼의 만남으로 음악애호가는 물론,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흥겨 움과 감동을 줄 수 있는 소리판을 만들 것입니다. 4. 출 연 : 소리꾼 장사익, 기타리스트 김광석 5. 공연문의 : 032)505 - 5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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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힘, 전통의 무게 <2. 14>1. 전통의 힘, 전통의 무게 2. 출 연 : - 채상상모놀이의 명인 ‘김운태’ - 우도 설장고 농악 ‘유점례’ - 우도농악 상쇠명인 ‘유순자’ - 경기 웃다리 농악 상쇠명인 ‘임광식’ - 젊은 타악그룹 ‘노름마치’ 3. 일 시 : 2004년 2월 14일 (토) 18:00 ~ 4. 내용 : 대한민국 국악계를 대표하는 문화재 명인분들을 초청하여 오랜 세월 연마한 전통의 힘과 무게 를 통해 부평문화사랑방의 개관을 축하하고 그 앞길을 축원할것입니다. 5. 공연문의 : 032) 505 - 5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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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에 달 떠온다.일 시 : 2004년 2월 5일 (목) 오후 5시 장 소 : 국립민속국악원 공연장 주 최 : 국립민속국악원 출 연 : 국립민속국악원 창극단, 연주단, 무용단, 사물놀이 (객원 - 사물 2명, 객원 8명) 공 연 내 용 1. 달하 노피곰 2. 달의 기원 - 성주풀이, 지신밟기, 터벌림 3. 흥겨운 마을 - 흥겨운 마을, 윷놀이, 널뛰기, 달맞이 4. 달맞이 - 강강술래 5. 만월 - 풍물놀이 ♥공연 이벤트♥ 부럼 깨기 정월대보름에는 밤․호두․땅콩등을 깨물며 일년 열 두달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도록 축원하던 고유의 풍습이 있었다. 대보름공연을 맞이하여 공연장을 찾은 관람객들에게 부럼을 나눠주고 우리 고유의 풍습을 다시한번 되새기는 기회를 마련한다. 대보름에 대하여... 전통사회의 절일로서 정월대보름(1월 15일), 백중(7월 15일), 한가위(8월 15일)등이 있는데, 이러한 명일(名日)은 보름을 모태로 한 세시풍속들이다. 대보름은 음력을 사용하는 전통사회에 있어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농경을 기본으로 하였던 우리문화의 상징적인 측면에서 보면, 달은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음양사상에 의하면 태양을 “양”이라하여 남성으로 인격화되고, 이에 반하여 달은 “음”이라하여 여성으로 인격화된다. 따라서 달의 상징적인 구조를 풀어보면 달-여신-대지로 표상되며, 대보름은 풍요의 상징적의미로 자리매김한다. ★ 공연장 내에서는 비디오, 사진촬영 및 화환증정을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공연문의 : 국립민속국악원 장악과 063-620-2333 [img:우리마을~.jpg,align=,width=300,height=425,vspace=0,hspace=0,borde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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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국악 실내악단 다스름과 함께하는 2004 가족음악회“어머니의 노래” 일 시 : 2003년 2월 12일 (목) 저녁 7:30 장 소 : 국립국악원 우면당 주 최 : 다스름실내악단, 주관 : 티앤씨매니지먼트 후 원 : 서울특별시, 국악방송, 협찬 : 서울음반 다스름 : (02) 596-8086 ■ 프로그램 창구만들기, 꽃분네야, 아버지의 노래, 어머니의 얼굴, 도라지꽃, 바람의 나라, 구연음악동화 , 나뭇꾼 할아버지와 이상한 샘물, 어버이 살아실제,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비나리, 가지꽃, 뗏목아리랑, 나비야 청산가자, 회심곡, 나비, 심청가 중 심봉사 눈뜨는 대목, Mother of mine ■ 다스름 단원 소개 * 유은선(대표) / 작곡, 편곡, 키보드, 사회, 구연 서울음대 및 이화여자대학원 졸업, KBS 1FM‘국악의 향연’, 국악FM방송 진행자, 서울 시립대, 목원대 출강 *이영신/ 가야금 병창 중앙대학교졸업,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박사과정 숙명여자대학교 출강,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병창이수자 *김애라/ 해금 중앙대학교 및 동대학원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박사과정, 서울시국악관현악단 단원 * 오경자 / 거문고 한양대학교 및 동 대학원 졸업 / 국립국악관현악단 * 권용미 / 소금, 대금 추계예술대학 졸업, 이화여자대학원 재학 / 서울시 국악관현악단 * 하가영 / 가야금 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 졸업 / KBS국악관현악단 * 강애진 / 아쟁 중앙대학교 졸업 및 동 대학원 재학 / 국립국악관현악단 * 김혜진 / 타악 추계예술대학 및 용인대학원 졸업 / KBS국악관현악단 * 채기원 / 피리 추계예술대학교 졸업, 추계예술대학 교육대학원 재학 ■ 객원출연 * 강정아(객원) / 대금 서울시국악관현악단 * 성지은(객원) / 타악 국립국악관현악단 * 안수련(객원) / 해금 국립국악관현악단 * 최지혜(객원) / 신디사이져 국립국악관현악단 ■ 특별출연 * 안숙선 / 노래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병창 및 산조 예능보유자,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 김영임 / 노래 중요무형문화재 제57 경기소리 전수조교 * 한 돌 / 노래 홀로아리랑, 개똥벌레, 터, 여울목 등 작곡 * 유희성 / 노래 서울예술단 뮤지컬 감독 * 박칼린 / 노래 뮤지컬 전문음악감독, 명지대 출강 * 안정아 / 노래 창동중학교 2학년 * 김삼진 무용단 / 무용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학생들로 구성 * 예쁜아이들 / 합창 (지도 : 한선혜) * OHP필름 연출 / 오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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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기독교 문화대상 수상작 및 수상자일시 : 2004년 2월 20일 (금) 늦은 2시 장소 : CCMM 빌딩 11층 영산 그레이스홀 02) 761-1587 주최 : 국민일보 , 기독교 문화예술원 02)477-4281 음악 - 오페라 “파우스트의 겁벌”------메조 소프라노 김현주 국악 - “전도곡“--------------서도소리 예능보유자 김광숙 뮤지컬 - “킹”--------------------------------테너 김필승 연극“마리아 마리아”------------------------연기자 강효성 방송 KBS TV"노란손수건“-------------------연기자 추상미 무용“우리들 시대의 노래”---------------------안무 김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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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연주회 2004년 2월 28일(토)공 연 일 자 : 2004년 2월 28일(토) 오후 4:00 공.. 연.. 장 : 소극장 주........ 관 : 부산문화회관 주........ 최 : 부산광역시 공 연 문 의 : 부산문화회관 (051-607-6051) < 개요 > 함녕지곡(집박/유경조·대금/이만형, 강은주, 황두호 ·피리/최성교, 박영은, 진형준 ·해금/조남순, 정수경, 이은주 외) 아쟁독주 ‘김일구류'(아쟁/최희정·장구/신문범) 가야금중주 민요메들리 ‘아리랑, 밀양아리랑'(18현 가야금/오은영, 옥경화 ·22현 가야금/이명일, 김혜련 ·장구/이장우) 기악합주 ‘남도굿거리, 금강산타령, 동백꽃타령'(대금/강은주·피리/김경수 ·해금/하지행·아쟁/윤영호 ·가야금/윤경선 ·거문고/한정임 ·장구/신문범) 태평소와 사물놀이(태평소/김용우·꽹과리/이주헌·장구/전학수·징/신문범·북/최오성) ※해설/박춘석(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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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연주회 2004년 2월 14일공 연 일 자 : 2004년 2월 14일(토) 오후 4:00 공.. 연.. 장 : 소극장 주........ 관 : 부산문화회관 주........ 최 : 부산광역시 공 연 문 의 : 부산문화회관 (051-607-6051) < 개요 > 수요남극(가야금/옥경화, 김혜련, 오은영, 송영남 ·거문고/이대하, 박하혜, 엄애리, 한정임 ·양금/정미자·장구/이장우) 해금독주 ‘황토길'(해금/성기만·가야금/김혜진·장구/이장우), 판소리(판소리/박성희·고수/신문범) 산조합주(대금/한영길·피리/김경수·해금/방병원·아쟁/권혜정·가야금/윤경선·거문고/강상호·장구/신문범) 사물놀이(꽹과리/이주헌·장구/전학수·징/신문범·북/최오성) ※해설/박성희(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부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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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구덕민속예술보존협회 정월대보름맞이 지신밟기공 연 일 자 : 2004년 2월 7일(토) 오후 4:00 공.. 연.. 장 : 대극장 주........ 관 : 부산문화회관 주........ 최 : 부산광역시 문........ 의 : 부산문화회관 (051-607-6051) < 개요 > 음력 정월 대보름날 농악대가 집집마다 돌며 지신을 달래고 한해의 복을 비는 정월대보름 지신밟기. 갑신년 올 한해의 안녕과 건강을 기원하는 이번 지신밟기 행사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출연 : 부산구덕민속예술보존협회 순서 모듬굿 - 길굿 - 인사굿 - 맞춤굿 - 마당굿 - 문굿 -오방진굿 - 굿거리굿- 덕배기굿 - 호호굿 - 우물굿 - 다드래기굿 - 농사풀이 - 풍년굿 - 개인놀이 - 연두발 상모 - 성주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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