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3 (화)
“우리 음악 뿌리찾기 60년… 이젠 살맛 납니다”
유신(維新) 말기였던 1977년 캐나다 맥길대 음대 교수로 있던 그는 단호했다. “돌아가겠어, 조국으로.” 교수도 아닌, 국립국악원장이란 공직으로 귀국을 결정했을 때 주위에선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혀를 찼다. 김포공항을 빠져나올 때 그가 보물처럼 가슴팍에 품었던 건 국악용어를 빼곡히 채워넣은 낱말 카드 수백 장. “이걸로 우리 음악의 용어사전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 후 ‘한국음악학’은 그가 “아내도, 자녀도 한쪽으로 밀쳐둔 채 모든 걸 바친 인생 최대의 과제”였다. 제25회 방일영국악상 수상자인 송방송(76)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얘기다.
방일영국악상이 음악이론 학자에게 주어진 것은 만당 이혜구(2회), 이보형(16회)에 이어 세 번째다. 송방송은 1960년대 말 국악계 인사로서는 드물게 선진 음악학의 정수(精髓)를 배워 국내 음악학의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국립국악원장, 문화재 전문위원, 한예종 교수를 지내며 우리 음악의 뿌리를 집대성한 산증인으로 꼽힌다. 1991년 펴낸 저서 ‘조선왕조실록 음악기사 총색인’은 후배 연구자들에게 든든한 발판이 됐다. 조선 세종 때 궁중음악 연주를 담당했던 아악서(雅樂署)와 전악서(典樂署)의 체제와 사회적 신분을 살피고 악공·악생들의 봉록 제도 등을 고찰했다.
하회탈 펜던트를 목에 건 송방송 교수는 “살면서 가장 잘한 결정은 자동차도, 스마트폰도 없이 국악이론 연구에만 매달린 한심한 남편을 뒷바라지한 아내와의 결혼”이라고 말했다. /장련성 객원기자
1942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그는 배재고 시절 성악가(바리톤)를 꿈꿨지만 입시 석 달을 앞두고 국악과로 진로를 바꿨다. 당시 서울대 성악과 김학상 교수가 국악을 공부하면 박사가 될 수 있고, 교수도 되어 우리 음악을 맘껏 연구할 수 있다고 권유한 덕이다. 황병기 선생에게서 가야금을 배워 서울대 국악과에 입학한 그는 이혜구·장사훈 선생에게서 국악이론을 사사했다. 규장각의 ‘악장등록’ 같은 문헌들, 국립국악원의 고악보를 필사하며 학업에 전념했다. 논문을 읽을수록 “기본적인 국악 용어조차 제대로 정리한 사전이 없다”는 걸 절감했다. “서양의 음악학 체계를 보고 배워 우리 음악을 우리 식대로 정리해보겠다는 포부”로 캐나다 토론토대를 거쳐 1975년 미국 웨슬레얀대에서 음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명문 맥길대를 떠나 월급 14만원인 국립국악원 원장으로 온 건 모두를 놀라게 한 행보였다. 초등학생 아들에게 180원짜리 짜장면을 사줄 수도,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250원짜리 국밥을 사 먹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좋았어요.”
1980년 영남대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오전 7시 30분이면 그의 연구실 형광등은 어김없이 불을 밝혔다. 1984년 ‘한국음악통사’를 발간하면서 “우리 음악의 특수성은 외래 음악을 자주적으로 수용하는 능력과 전통음악을 창조적으로 계승해내는 한민족의 창조 역량에 의해 이뤄질 수 있었고, 이러한 능력이야말로 우리 공연예술 미의식의 근간이 된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가 1988년 설립한 한국음악사학회는 1세대 학자들이 일궈놓은 학문적 업적을 발굴하고 색인 작업을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나는 반찬으로 치면 짭조름하지도 매콤하지도 않은 무덤덤한 사람. 1991년 뇌졸중으로 죽음의 고비도 넘겼지만, 그런 나를 방일영국악상이 인정해 줬으니 세상 살맛 납니다.” 수상 소식을 알릴 때 그는 여느 때처럼 집 앞 커피숍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2007년 국립중앙도서관에 책을 모두 기증해 ‘송방송문고’를 세웠지만, 음악학연구회(현 한국음악학학회) 회장 외에는 자리 욕심, 상 욕심 없기로 유명하다. 평생의 나침반은 모교 배재학당의 교훈 ‘큰 인물이 되려는 자는 사람의 정도를 걸으라’와 초등 교사였던 선친이 일러준 ‘사나이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바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 희수(喜壽)를 앞둔 학자는 “팔순이 되는 날 자서전을 내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방일영·방우영 선생이 설립한 방일영문화재단이 국악 전승과 보급에 공헌한 명인·명창에게 수여하는 국내 최고 권위의 국악상이다.
1994년 첫 회 수상자인 만정 김소희 선생을 비롯해 이혜구(2회) 박동진(3회) 김천흥(4회) 성경린(5회) 오복녀(6회) 정광수(7회) 정경태(8회) 이은관(9회) 황병기(10회) 묵계월(11회) 이생강(12회) 이은주(13회) 오정숙(14회) 정철호(15회) 이보형(16회) 박송희(17회) 정재국(18회) 성우향(19회) 안숙선(20회) 이춘희(21회) 김영재(22회) 김덕수(23회)에 이어 지난해 가야금 이재숙 명인까지 최고의 국악인들이 수상했다.
자료 조선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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