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목)

[연재소설] 흙의 소리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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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42

  • 특집부
  • 등록 2021.06.24 07:30
  • 조회수 1,289

흙의 소리

 

 

이 동 희

 

절정 <5>

그것은 왕이었다. 임금이었다. 맹사성이 늘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시로 읊은 것-역군은 이샷다-처럼 임금의 은혜였다. 은혜래도 좋고 그런 뜨겁고 크나큰 바위와 같이 불덩이와 같이 햇살과 같이 그를 누르는 어떤 힘이었다. 빛과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기보다 누리고 베푸는 것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일을 하고 몸을 바수는 것이었다. 자신을 다 쏟아붓는 희열이었다.

어떤 대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계산에서 다른 무엇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하고 수고하는 즐거움이었다. 그것을 받아주고 인정하여 주는 보람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그는 능동적으로 결행을 하고 책임도 그가 졌다.

세자 시강원 문학으로 임하면서 가르치고 타이른 대로 스스로 행하고 실천하여 본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뿌듯하고 값진 일인가. 아름다운 일인가. 그 자리같이 함께 있지 않을 때도 같은 하늘 아래 숨을 쉬고 있다고 생각할 때 잠시도 다른 생각을 하고 해찰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나라에 관직을 맡고 있어 무슨 일을 하든 어느 곳에 가 있든 늘 하늘이 내린 하늘 같은 임금을 생각하였다. 그가 문학으로 있으면서 무엇을 가르쳐서가 아니었다. 백성으로서 신하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이며 임무라고 여겼던 것이다. 어버이를 하늘같이 스승을 하늘같이 모시고 받들어야 한다고 어려서부터 배우고 몸에 배어있는데 그렇게 실행하였었는데 이제 부모가 되고 스승이 된 그는 스스로 행하는 것이었다.

의영고義盈庫 부사副使 사재부정司宰副正 노중례盧重禮 교수를 거쳐 봉상판관奉常判官 겸 악학별좌樂學別座에 제수除授되는 등 여러 일을 맡아 하였는데 어디서 무얼 하든 직무에 매달려 퇴청할 줄 모르고 끼니를 거르며 밤을 새우기를 밥 먹듯이 하여 끊임없이 새 정책을 입안하고 발의를 하였던 것이다.

박연이 쉰이 되던 해 세종 9(14237) 석경石磬을 만들었고 다음 해 편경編磬과 특경特磬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53세 때는 그동안 정신없이 밀어붙이던 개혁의 상주는 봇물이 터지듯 마구 쏟아졌다.

2월에 향사享祀 때 악율을 바로잡으라는 글을 올리고 3월에 아악의 음절을 조정하라는 글을 올렸다. 7월에 봉상 소윤으로 아악에 향악을 쓰지 말라는 글을 올렸다. 9월에 헌가를 고제대로 만들라는 글 11월에 조회악공은 공사비자公私婢子로 충당하라는 글, 12월에 조회악을 조정하라는 글, 악현樂懸을 고제대로 만들라는 글을 올렸다. 그리고 토고土鼓를 만들라는 글, 당상악堂上樂에 부를 쓰라는 글, 대고大鼓를 만들라는 글, 토부土缶를 구어 만들라는 글, 뇌고雷鼓 영고靈鼓의 제도를 바꾸라는 글, 편종編鐘을 갖추어 만들라는 글, 종경鍾磬을 교정하라는 글, 죽독竹牘을 고쳐 만들라는 글, 궤제机制를 고치라는 글, 석경石磬을 만들기 전에는 아직 와경瓦磬을 쓰도록 하라는 글, 생호笙瓠를 본제대로 만들라는 글들을 올렸다.

얘기가 더러 중복되지만 도무지 숨이 가쁘다. 밤중에 고불 대감을 찾아가서 의논하기도 했던 대로 무무武舞에는 형관을 쓰지 말라는 글, 일무佾舞는 고제대로 하라는 글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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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이무성 화백의 작화 : [연재소설] 흙의 소리 42

  

예악 전반에 관한 정책 제도 그리고 악기 하나하나의 운영 관리 체계를 과감하게 고치고 유지하고 모든 영역 부분 부분을 샅샅이 세밀하게 점검하고 주물렀다.

악공들의 복식을 갖추라는 글도 올렸다. 여러 제소祭所마다 각기 창고 하나씩을 세우라는 글, 제향악祭享樂을 갖추라는 글, 제사 때 쓰는 율관律管을 지으라는 글을 올리고 재랑齋郞과 공인工人을 엄히 다스리라는 글, 악부樂部마다 음악을 교정하라는 글, 화악華樂에도 아조我朝의 가곡을 쓰라는 글을 올렸다.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헌가軒架를 고제대로 하라는 글, 조회악에 악공을 예습시키라는 글, 좌전坐殿 때 풍류를 시종 갖추라는 글, 조회악과 당상당하의 조하朝賀 때 헌가만을 쓰라는 글, 조회악에 월율月律을 쓰라는 글, 악가樂架를 예비하라는 글, 악감조색樂監造色을 설치하라는 글들도 올렸다.

스스로도 정신이 없었다. 허둥지둥하였지만 어느 하나 잘못 올린 것은 없었다. 모르고 빠뜨린 것은 있어도 알고서 올리지 않은 것은 없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이 닿는 데까지 젖 먹던 힘 사력을 다하였다.

그해는 한 달이 더 있었다. 12월에는 또 아악보雅樂譜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 판서判書에서 이조吏曹판서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 또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하였다.

너무 숨이 찼다.

이듬해 정월에는 왕으로부터 안마鞍馬가 하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