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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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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1

서양인이 본 조선

  

                 박대헌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고서를 수집하여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수집가에 따라 다르다. 이는 고서 수집을 하기 전에 이미 그 목적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목적이 어떻든 간에,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자연히 그 방면에서는 저절로 많은 지식이 쌓여 전문가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저술가 중에는 유명한 고서 수집가가 많다. 나는 고서를 수집하면서 서양인이 본 조선(호산방, 1996)우리 책의 장정과 장정가들(열화당, 2008), 한국 북디자인 100(21세기 북스, 2013)이라는 세 권의 책과, 몇 편의 논문을 썼다. 나야말로 고서를 수집하다 보니 저절로 글이 써지고 책이 만들어진 경우라 할 수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가 서양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이며 또 우리나라를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은 누구일까 하는 막연한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30여 년 전, 서양에서 출판된 한국 관련 자료들을 하나 둘 접하면서부터 우리나라와 서양의 접촉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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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4] 저자의 『서양인이 본 조선』(호산방, 1996)

 이렇게 시작된 한국 관련 서양 도서의 수집은 서양인이 본 조선을 출간하기에까지 이르렀다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모리스 쿠랑의 한국서지와 마에마 교사쿠의 고선책보의 영향을 받아서다나는 이 두 책을 알고 난 후 우리의 서지 작업이 외국인에 의해 이렇게 정리되었다는 것에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그것이 결국 나로 하여금 서양에서 출간된 조선 관련 서지를 정리하도록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

 

서양인이 본 조선1655년부터 1949년까지 약 300년 동안 서양의 선교사·탐험가·군인·학자들이 조선을 관찰하고 연구한 바를 서술한 188261판본 287책의 여러 서양어계 도서들을 서지학적으로 정리한 책이다.(*사진 84)

 

각 도서의 제목과 저자·출판사·출판지·출판연도·판수·책수·면수·크기와 삽화 수 등을 표시했고, 책에 실린 흑백과 컬러 사진 몇 점을 실었다. 그 다음에는 저자와 책 내용을 소개하면서, 그 동안의 국내 연구 상황을 주석으로 소상하게 밝히려고 했다. 그 다음 장에는 각 책에 들어 있는 목차와 삽화 목록, 사진과 삽화를 수록했다. 목차에는 17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영어·불어·독어·네덜란드어·스웨덴어·러시아어 등이 원전 그대로 실려 있다. 따라서 이 목차만 보고도 원전의 내용이 어떠한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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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5] 맥레오드의 『조선 서해안 항해기』(영국, 1816).

  

설명한 대로이 책은 서지에 관한 전문서적인 동시에 역사서이다서지는 모든 학문의 기초이자 출발점이다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그가 정한 연구대상이 지금까지 어떻게 조명되었고 또 어떤 관련 자료가 있는가를 가장 먼저 검토해야 한다어떤 시대에 어떤 내용의 책이 어떻게 출판되었는가를 종합하여 밝히는 일은 모든 학문에 기초를 닦는 작업이다더구나 그 자료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희귀본이라면 그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서양인들이 기록한 우리의 역사적 사실은 한국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자 민족문화의 자산이라고 할 만하다우리 선조들이 미처 기록하지 못한 당대의 역사적 사실들을 밝혀 주기도 하거니와무엇보다 이 땅의 역사를 제삼자의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이 중요하다그것이 어떤 목적으로 연구되었는가 하는 것은 서양 접촉사와 관련해 큰 의미를 갖는다.

 

이들 책 중에는 개항 이전 조선의 모습뿐만 아니라, 조선어의 소개, 서양에서 제주를 일컫는 명칭, 서양 술의 조선 전래, 성서의 조선 전래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조선이 나라 문을 걸어 잠근 채 집안싸움만 하고 있을 때 서양 여러 나라들은 앞 다투어 조선을 방문 또는 탐사했으며 그때마다 이러한 사실들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껏 이러한 사실조차도 잘 모르고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진 이 방면의 자료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사진 8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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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6] 1816년 마량진첨사 조대복에 의해 서양의 포도주가 두 번째로 전래되는 장면. 이때 조선 최초로 성경이 전래되었다(맥레오드, 『조선 서해안 항해기』, 영국: 존 머레이 출판사, 1817)

 

고서 수집에서 수집 대상의 주제는 독창적이어야 한다다른 수집가나 박물관에서 미처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이라면 더욱 좋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이런 면에서 볼 때 조선 관련 서양 도서는 매우 매력적인 주제라 할 만하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주제가 정해졌다 하더라도 자료가 저절로 구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유능한 파트너와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유능한 파트너는 모든 자료를 한곳으로 모으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자료들을 오랫동안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외국에 직접 나가서 구하기도 하고, 국제적인 고서적상을 한국으로 직접 불러들여 구입하기도 했다. 이미 조선 관련 서양 고서가 미국·독일·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스웨덴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출판된 관계로 나는 각 나라별로 유명 고서점 또는 중개인을 선정해 이들과 긴밀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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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7] 하멜의 『하멜표류기』(네덜란드, 1920)

나는 이들 파트너가 제공하는 자료를 거의 다 구입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책을 대여섯 권씩 사기도 했다. 하지만 파트너들이 나를 위해 구해 준 것들이므로, 중복되는 책이 있어도 싫은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가격이 점점 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고서에서 초판본은 의미가 각별하다. 당연히 모든 고서 수집가들이 초판본을 선호한다. 그러나 나는 초판본 못지않게 모든 판본의 책이 각각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국 관련 서양 고서를 수집할 때부터 모든 판본에 의미를 두었다.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앞에서 소개한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은 1897년 뉴욕 플레밍 레벨 출판사(Fleming H. Revell Company)에서 초판본이 간행된 이후같은 해에 삼판본까지 출간되었다. 1898년에도 판본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책이 간행되기도 했다한편 1898년과 1905년에는 런던 존 머레이(John Murray) 출판사에서도 출간되었다흥미로운 것은 이들 각 판본의 표지 장정과 편집책의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사진 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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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8] 1653년 하멜 일행이 난파되어 제주도에 상륙하면서, 서양의 적포도주가 조선에 최초로 전래되었다(『하멜표류기』, 네덜란드, 1920)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의 목사이자 동양학자인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가 쓴 은자의 나라 한국(Korea, the Hermit Nation), 1882년 뉴욕 찰스 스크리브너스 선스(Charles Scribner’s Sons) 출판사와 런던 앨런(W. H. Allen) 출판사에서 같은 해에 출간되었는데, 이 두 책은 내용은 똑같으나 접혀 있는 지도 한 장과 책등 부분에 인쇄된 글자가 약간 다르다. 그후 이 책은 1888·1897·1904·1907년에 각각 증보판이 나왔으며, 여러 차례 중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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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9]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영국, 1989)

 나는 이들 중 1882년 뉴욕과 런던에서 나온 초판본과 또 다른 갈색 장정의 1882년 뉴욕판본, 1888년 뉴욕 삼판본, 1894년 뉴욕 사판본, 1897년 뉴욕 육판본, 1904년 뉴욕 칠판본, 1907년 뉴욕 팔판본을 서양인이 본 조선에 소개했다.

 

서양인이 본 조선은 사업성이 없는 책이다. 그러니 어떤 출판사에서도 욕심낼 이유가 없다. 그래서 나는 호산방에서 직접 출간하기로 마음먹었다. 서양인이 본 조선이 출간되기까지 자료수집에 10수 년, 집필·제작에 5년이 걸렸다. 교정도 스무 번 넘게 보았다. 그러나 이게 무슨 자랑이겠는가. 지금 생각하면 모든 면에서 부족하고 아쉬움만 남는다. 그나마 이 책이 이만큼의 모습이라도 갖추게 된 데는 사진의 역할이 컸다. 사진 작업만도 꼬박 삼 개월이 넘게 걸렸는데, 이때 테스트로 찍은 필름만도 한 박스가 넘는다. 사진작업은 구름 사진가로 유명한 김광수 선생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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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0]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영국, 1989, 2책)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반향이 대단했다. 광화문 일민문화관에서 가진 서양인이 본 조선출판기념 전시회는 성황을 이뤘고, 관련 학자들에게도 대단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쑥스러운 얘기지만 이 전시는 우리의 고서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고서 전시와는 분명 그 궤를 달리했다. 장소부터가 전문 미술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시기획에서부터 디스플레이, 진행에 이르기까지, 고서가 미술의 한 장르에 포함되어도 아무런 손색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사진 91~92)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나는 이 책의 출간과 전시를 통해 나의 문화적 역량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이때의 모든 전시기획과 진행을 내가 직접 주도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평생의 꿈인 책박물관 설립의 가능성을 미리 점쳐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이렇게 책을 내고 성대한 전시를 하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서양인이 본 조선에 소개된 책들은 고서 수집가들은 물론 학계에서도 잘 모르고 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내 주위의 연구자와 수집가들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나는 미처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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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1] 1996년 10월 일민문화관에서 열린 『서양인이 본 조선』 출간기념 전시

 

어쨌든 출판기념 전시회의 열기가 구매로 이어지지는 못했다예상치 못한 바는 아니었다위안이라면이 책으로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한 것이다이 책을 출판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열정을 바쳤는지 모른다또 나의 전 재산을 이 작업과 맞바꾸는 오기를 부려야만 했다이제 그 대가로내가 지금까지 책을 수집하고 글을 쓰고 또 출판을 하기까지 겪었던 어려움보다 더 큰 고통이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