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목)
서양의 고전 음악은 세계 각국에서 연주가 거듭될 때마다 놀라운 찬사로 이어진다. 또 그 음악을 듣는 사람들의 품격까지를 격상시켜 주고 신분 상승 효과마저 곁들여 주는데 왜 한국인에게는 우리의 고전, 전통 음악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푸대접까지 받아야 하는가.
황병기(黃秉冀ㆍ57, 이대 음대) 교수는 자신이 스스로 찾아낸 ‘학문적 화두’를 부둥켜안고 확신에 찬 해답을 얻어내기 위해 매일매일 골몰하고 있다. 깨어 있을 때마다 가야금의 현으로 퉁겨져 표현될 인간 내면 세계의 악상을 가다듬고 때로는 선정에 든 편안한 마음으로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서울 재동국교―경기중―경기고―서울대 법대. 누구 앞에서도 ‘꿀리지 않을’ 한국 사회에서의 학벌이다. ‘서울 법대’를 졸업한 그가 가야금 주자로 ‘천시받는 국악 인생’을 보무도 당당히 걷고 있다. 그래서 황병기 교수의 국악 인생은 우리 국악의 희망과도 통한다.
"자신이 하는 일을 놓고 사명감 운운하는 사람을 가장 경멸합니다. 본인의 능력껏 분수대로 열심히 사는 것이지요.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늘 긍지와 소신을 스스로 찾아감이 윤택하게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황 교수는 가야금을 통해 결혼(부인은 여류작가 한말숙 씨, 한씨도 대학 시절 가야금에 심취돼 국립국악원서 황씨와 만남)을 했고 민간인으로는 최초로 판문점을 통해 평양에 간 음악인이 됐다. 1990년 10월 평양에서 개최된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작곡가 윤이상 씨의 초청을 받았던 것. 연주 여행을 통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구미 각국을 몇 차례 순방했고 현지 대학 교수로도 한국 음악의 세계화를 위해 쉴새 없이 뛰고 있다. 미국 현지에서 내놓은 ‘황병기 가야금 창작곡집’은 매년 판매율이 20% 증가하는 베스트셀러로 입지가 확보돼 있다.
제자들 또한 기라성 같다. 이재숙(李在淑, 서울음대 교수), 김정자(金靜子, 서울음대 교수), 조청자(趙靑子, 이대 강사), 서원숙(徐元淑, 단국대 교수), 이승열(李承烈, 국립국악원장), 양연섭(梁連燮, 한양대 교수), 양승희(梁勝姬, 서울대, 이대 강사), 문재숙(文在淑, 이대 강사), 박현숙(朴賢淑, 이대 강사), 윤소희(尹素姬, 이대 강사), 곽은아(郭銀雅, 이대 강사) 등을 우선 손꼽는다. 앤드루 킬릭(영국인, 미 워싱턴대 박사 과정), 바버라 스미스(미 하와이대 교수), 로버트 가피어스(전 워싱턴대 교수) 등은 그가 아끼는 외국인 제자들이다. 황 교수는 혹시 거명 안 된 수많은 제자들이 섭섭히 생각하면 어쩌느냐며 교단을 통해 사제지연을 맺은 후학들이 수백 명은 될 것이라고 했다.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1의 316번지 그의 자택. 서울 종로구 계동 147의 13번지에서 태어나 처음 ‘문밖’으로 나온 것이 현재의 집이라고 한다. 부친(황태문)의 고향은 전북 옥구로 선대 시묘(侍墓)는 그곳에서 받들고 있다. 부친은 우주 황씨 전국중앙종친회 초대회장을 지냈다.
사업가였던 아버지 덕에 풍요로웠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경기중 2년 시절 6ㆍ25로 피란 가면서 ‘소년 황병기’의 운명이 바뀐다. 부산 최초의 국악 연구소인 김동민(金東旻) 씨 사무실에서 김철옥 씨가 뜯어 내는 가야금 소리를 들은 것이다. 황씨는 그 때 "저게 바로 우리 할아버지들이 듣던 소리구나.” 하는 깜짝 놀람과 함께 등 뒤에서 "너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느냐.”는 다급한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 후로는 만류도 아랑곳없이 가야금에 미쳤다고 한다. 부산 용두산공원으로 피란 내려와 있던 국립국악원에 찾아가 김영윤(金永胤) 씨한테 정악 가야금을 밤낮 가릴 것 없이 열중했다.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지는 공부나 일의 능률은 그 성취 효과가 놀랍습니다. 인생사의 어떤 일이든 억지로는 안 되는 법이지요. 아무튼 그 당시는 잠을 자면서도 가야금 꿈을 꾸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도 왜 가야금을 보고 그렇게 전율했고 어째서 숙명 같은 것을 느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황씨가 학교 공부에 소홀한 건 절대 아니었다. 경기고 시절에는 영문 소설을 써 당시 교내 신문이었던 ‘경기 타임스’에 게재했고, 특히 수학에 뛰어나 각고 끝에 찾아낸 방정식의 답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 얼굴’ 같았다고 말한다.
황교수의 두 아들도 그를 닮아서인지 장남은 미 하버드대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막내 아들은 보스턴대 물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두 딸은 시집보낸 지 오래이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국립국악원이 서울에 자리잡으며 황씨의 가야금에 대한 정열은 더욱 농익어 간다. 이즈음 김윤덕(金允德) 선생을 만나 그 유명한 정남희(丁南希)제 산조를 전수받는다. 김씨는 정씨의 수제자로 가야금 산조의 뛰어난 명인. 여기에 활기를 더해 준 것이 심상건(沈相健) 씨의 민속악 가야금 산조.
"정남희 선생의 가야금 산조는 별다른 치장이 없어 담백합니다. 일반대중이 이해하기는 좀 힘든 편이나 구성감이 좋고 지적이어서 맛을 알면 그냥 흠뻑 취해 버리고 말아요. 가야금 연주 기법 중 10여개의 유파가 전해 오고 있으나 정남희제 산조는 들을수록 기품이 와 닿죠.”
정남희 씨는 월북 국악인으로 한때 그의 음악 세계가 수난을 당한 때도 있다. 1990년 평양 범민족통일음악회에 가 낯익은 연주 가락이 있어 찾아가 만나니 바로 정씨의 제자 김길환 씨(평양 음악무용대 교수)였다고. 이처럼 대가들의 연주 기법은 확연히 구분되는 계통이 확립돼 있다는 황 교수의 말이다.
고3 때의 전국음악콩쿠르 1등(덕성여대 주최), 대학 3년 시절 차지한 KBS 주최 전국음악콩쿠르(가야금) 최우수상 수상 경력 등으로 졸업(1959년)과 동시 서울음대 강사로 발탁된다. 1959년 신설된 음대를 현제명 학장이 맡으며 국악 쪽을 떠맡긴 것이다.
"서울법대를 나와 판ㆍ검사 안하고 가야금이나 메고 다니느냐는 소릴 수없이 들었지요. 그럴 때마다 저는 우리 전통 민속 음악을 제대로 분별해 내는 음악 판ㆍ검사가 되겠노라고 다짐을 거듭했습니다. 국내에서 잘 몰라 그렇지 우리의 전통 음악이 유럽과 미국에서 각광받고 그들의 심성 속에 깊이 파고든 지 오래예요.”
62년부터 내딛은 황 교수의 가야금곡 작곡 편력은 ‘한국의 국악 작곡사’ 와도 통한다. 나원화(羅元和) 씨한테 전수받은 정악 가곡과 어우러진 곡풍은 신비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국화 옆에서’, ‘숲’, ‘전설’, ‘영목’, ‘비단길’, ‘가라도’, ‘침향무’ 등은 국악 입문생도들의 ‘고전 음악’이 되어 버렸다. 황교수의 작품 중 ‘미궁(迷宮)’은 최저현을 활로 때려 진동하는 신비음과 인성이 조화를 이룬 상승악으로 매우 충격적이다. 인간의 ‘원초적 공포’를 도출시켜 현대 문명과의 괴리 현상을 비틀어 낸 이 곡은 한때 ‘금지곡’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황 교수는 1974년 이화여대 음대로 자리를 옮기면서 ‘음악가’로서의 인생을 새로 굳혔다고 회고한다. 경기고 4년 선배인 전위 미술가 백남준(白南準) 씨와 서울 법대 1년 선배인 가수 최희준(崔喜準) 씨와도 예술적 교류를 갖고 있다.
"스승의 학풍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학문 세계는 늘 새롭게 창조해 나가야 합니다. 국악의 학문적 접근이 ‘국악의 세계화’를 앞당기고 균형 감각을 상실 않는 세계 음악으로 깊숙이 뿌리내리게 할 것입니다.”
가야금 연주와 그만의 작곡 기법으로 국내는 물론 세계적 명사가 되어 버린 ‘신세대의 재인 황병기 교수’. 오랜 작곡 생활 속에 곡이 많지 않은 이유를 "곡을 쓰는 데는 2주일이 소요되나 구상하는 데만 2년이 걸린다.”고 대답한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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