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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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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21

  • 특집부
  • 등록 2021.01.28 07:30
  • 조회수 1,614

흙의 소리

 

이 동 희

 

소명召命 <1>

 

때가 이른 것이다.

새로운 예악 정책이 시작되었고 박연의 상소가 계기가 되었다. 같은 무렵 같은 생각을 하였는지 모르지만 세종조 초기부터 예악 특히 악의 정립에 나섰다. 태종 6(1406)에 설치하였던 악학樂學을 재가동시킨 것이다. 고려 말 유학 무학武學 음양학 의학 등 십학十學의 하나로 설치된 기관으로 음악에 관한 옛 문서들을 고찰하여 음악 이론과 역사 등 악서樂書를 편찬하고 악공들의 의례, 악기 제작, 악공 선발 등의 일을 하는 기관이었다.

예문관 대제학 맹사성孟思誠 유사눌柳思訥 등을 제조提調로 삼고 박연을 악학 별좌別坐에 임명 실무 책임을 맡겼다. 제조는 겸직이었고 별좌는 정5품 종5품의 별 보잘 것이 없는 자리였지만 박연은 어떤 직에 있을 때나 변함이 없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혼신의 힘을 다 하였다. 특히 무엇보다 예악 분야의 직을 맡고부터는 그것을 천직으로 알고 불철주야 용맹 정진하였다. 저녁에도 밤늦도록 직무에 관련된 책을 읽고 공부를 하였다. 집현전 서고에서 밤을 새기도 하였다. 서생 때와는 달리 무슨 책이든 어떤 시간에든 전적을 볼 수 있었다. 식음을 폐할 때도 많았다.

언젠가부터 서울 살림을 하였고 아이도 너 댓명 되었지만 박연은 늘 서생이었다.

"어떻게 갈수록 더 힘드신 것 같애요.”

며칠 집에도 안 들어가자 아내 송씨가 걱정스레 말하는 것이었다.

"미안하오.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소.”

박연은 허리까지 굽히며 참으로 송구한 낯빛을 하였다.

그러자 셋째 아들 계우季愚가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도 그러냐고 묻는다.

"그럼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고 어려운 것이 너무 많구나.”

박연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뒷날 그에게 많은 기쁨을 안겨주기도 하고 단종의 편에 썼다가 처형되며 엄청난 고초를 겪게도 하였다.

너무 잘 하려고 하다가 그런 게 아니냐고 아내가 다시 말하자 이번에는 으음하고 큰기침을 하는 것으로 분위기를 제압하였다.

일은 갈수록 많아졌고 힘들어졌다. 아내의 말대로 정말 너무 잘 하려고 하고 자청하여 일을 만들어서였다. 그가 강설講說한 것이었고 그의 분야였다. 평소 그가 탐구하고 연마한 영역이었다. 아니 그가 해야만 되는 일이었고 이루어야 하는 일이었다. 예 그리고 악은 하늘의 명령이고 땅의 명령인 것 같았다. 그것은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이고 힘이라는 신념을 갖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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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작화 : [장편소설] 흙의 소리 21

 

박연은 다시 왕에게 청하였다더욱 과감하였다.

세종실록 27권 세종 7년 2월 24일 갑자에예조禮曹에서 악학별좌 박연의 수본手本에 의거하여 계하기를… 의 기사를 보자.

음악의 격조가 경전 사기 등에 산재하여 있어서 자세히 고찰하여 보기가 어렵고 또 문헌통고文獻通考 진씨악서陳氏樂書 두씨통전杜氏通典 주례악서周禮樂書 등을 사장私藏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비록 뜻을 든 선비가 있더라도 얻어보기가 어려우니 진실로 악율樂律이 이내 폐절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청컨대 문신 1인을 본 악학에 더 설정하여 악서를 찬집하게 하고 또 향악鄕樂 당악唐樂 아악雅樂의 율조를 상고하여 악기와 악보법을 그리고 써서 책을 만들어 한 질은 대내大內로 들여가고 본조本曹와 봉상시奉常寺와 악학관습도감樂學慣習都監과 아악서雅樂署에도 각기 1질씩 수장하도록 하소서

계는 진계陳啓의 뜻으로 임금에게 상주上奏하는 것이다대내는 대전大殿을 말하고 본조는 예조봉상시는 국가의 제사 시호諡號를 의론하여 정하는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이다.

박연의 청은 즉각 받아들여졌고 그대로 따랐다.

그는 다시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악기의 세밀한 음율 체계에 대한 청원을 하였다.

이제 봉상시에 있는 중국에서 보낸 악기 가운데, 소관簫管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곧 악기도설樂器圖說에서 소관이라 이르는 제도이니, 황종黃鍾의 한 음성을 고르게 한 것에 족한 것인데, 이를 팔척관八尺管이라고도 하며 혹은 수적垂篴이라고도 하고 중관中管이라고도 하며 궁현宮懸에서 사용합니다. 민간에서는 소관小管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음율의 소리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봉상시에서는 과거부터 헌가軒架에 적이 있었기 때문에 소관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헌가에 사용한 적은 봉상시 서례도序例圖에 주례도周禮圖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적은 옛적에는 구명이 넷이었으나 경방京房이 한 구멍을 더 내어 오음五音을 갖추었는데 오늘에 사용하는 저가 곧 이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모양과 제도가 비록 수적竪笛과 비슷하나 음율에 있어서 응종應鍾과 무역無射의 소리가 부족하오니 헌가에 사용하기는 부족합니다. 바라옵건대 헌가에 종래에 쓰던 저를 버리고 중국에서 보내온 소관을 사용하여 음악의 소리를 조화 시키소서

이것은 세종실록 318110일 을사의 기록이다. 이 역시 그대로 시행되었다.

소관은 대금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황종은 동양 음악에서 십이율의 첫째 음이고 응종은 열두 번째 음, 무역은 열한 번째 음이다. 헌가는 대례나 대제 때에 연주하는 아악 편성으로 종고鍾鼓를 틀에 걸어놓고 관악기와 현악기에 맞추어서 치는 것이다. 저와 적은 피리이고.

너무도 전문적이며 해박하고 치밀한 음율에 대한 견해여서 어느 누가 거기에 토를 달수가 없었다. 거기에다 왕의 믿음이 두터웠다. 절대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