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금)
박대헌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우리나라 사진의 역사는 한말의 서양 외교관과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다큐멘터리 사진들은 거의 이들이 남긴 것들이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1883년 고종(高宗)의 초청으로 우리나라를 내한한 미국의 외교관이자 천문학자인 로웰(P. Lowell, 1855-1916)과, 1900년 내한한 미국의 여행가 홈스(B. Holmes, 1872-?), 1904년에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왔던 영국 기자 매켄지(F. A. McKenzie, 1869-1931) 등이 있다.
로웰은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Chosö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보스톤, 1886)에서 고종과 왕궁의 모습 등 조선의 풍물을, 직접 촬영한 스물다섯 컷의 사진으로 소개하고 있다.(* 사진 50) 이 사진이 바로, 외국 책자에 실린 최초의 우리나라 관련 사진이 아닌가 싶다.
홈스는 『버튼 홈스 사진집(The Burton Holmes Lectures)』(미시간, 1901)에서 백서른네 컷의 사진을 소개하고 있다. 이 사진집은 간략한 여행기와 함께, 사진이라는 매체를 동원해 당시 조선의 모습을 철저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매켄지는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런던, 1908)에서 ‘의병 사진’ 등 모두 스물일곱 컷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51~52)
나는 이들을 포함해, 한말을 전후하여 우리나라를 다녀간 외국인들이 남긴 사진들을 대하면서, 혹시 필름 원판이 어딘가에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곤 했다. 당시의 필름은 유리판 위에 감광유제(感光乳劑)를 도포(塗布)한 유리필름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를 유리건판 또는 유리원판이라 한다.
내가 소장했던 유리건판으로는, 1906년 공주 영명학교를 세운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스(F. E. C. Williams)가 소장하던 공주 영명학교 관련 유리건판 구십여 점과, 일제시대 어류학자 우치다 게이타로(內田惠太郞, 1896-1970)가 남긴 물고기 유리건판 천팔십여 점 등이 있다.(* 사진 53~54)
우치다의 물고기 유리건판은 그가 1927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총독부 수산시험장에 근무할 당시 한국산 어류의 생활사 연구와 생태학적 조사를 주도하면서 남긴 성과물이다.
이때의 연구 조사를 바탕으로, 한반도 어류의 서식 실태를 자세히 기록한 『조선어류지(朝鮮魚類誌)』(조선총독부, 1939)를 펴내기도 했다.(*사진 55)
우치다는 1942년 일본 규슈 대학 교수직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유리건판을 포함한 자신의 연구자료와 표본, 문헌자료 등을 그대로 남겨 둔 채 한국을 떠났다. 언제라도 다시 한국에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해방된 후에는 영영 한국을 다시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한국에 두고 온 유리건판을 포함한 연구자료들에 대한 그리움을 "육신의 일부가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치어(稚魚)를 찾아서』, 1964〕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 연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학자인 정문기(鄭文基, 1898-1995)도 참여했는데, 사진 촬영은 주로 나카노 스스무(中野進)가 맡았다고 전한다.
정문기는 우치다보다 두 살 아래지만 동경제대 수산과 칠 년 후배로, 실제로는 그의 제자로서 조선총독부에 근무했던 유일무이한 조선인 수산 기사였다.
해방 후에는 부산 수산대학장 겸 농림부 수산국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한국어보(韓國魚譜)』(1954)와 『한국어도보(韓國魚圖譜)』(1977) 등이 있으며, 1977년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를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우치다의 유리건판 자료들은 원래 정문기가 소장하고 있던 것들로,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이십오여 년 전 어느 날, 제법 늦은 시간에 서울의 한 고서점에 들렀다. 이 서점은 삼십 년 이상 다녔지만 쓸 만한 책 한 권 구한 적이 없던 곳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서란 서점 주인의 안목에 비례해 좋은 책이 갖춰지기 마련인데, 고서에 대한 식견이 별로 없는 주인이 운영하는 서점에서 귀중본을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느 날처럼 그날도 서점 한편에 마대자루 여러 개가 있었다. 한데, 삐져나온 책들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두어 권 살펴보니 눈이 번쩍 띌 만한 것들이었다. 보지도 않고 전부 사겠다고 하자 주인은 평소 모습과는 달리 안 팔겠다고 버텼다.
하여튼 쓸 만한 책을 수십 권 골라 값을 치렀다. 주인은 흡족했던지, 길가에 세워 둔 자신의 승용차로 나를 데려갔다. 뒷좌석과 트렁크에 여러 개의 박스가 있었는데 왠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주인이 손바닥만 한 유리 조각 하나를 보여주었다. 유리건판이었다. 거리의 불빛에 물고기 모습이 희끗 비쳤다.
어떠한 사정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문기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자료가 많이 쏟아져 나와 한동안 여기저기 흩어져 돌아다녔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것들을 찾아다니며 계속 수집하는 중이다.
2004년에는 영월책박물관에서 「유리물고기—1930년대 한국어류사진」전을 열었다. 이 전시에는 우리나라 담수어류·연근해어류의 유리건판 사진과, 이 중에서 이름이 확인된 이백여 점의 물고기 사진을 소개했다.
우치다의 어류 사진 중에는 해부도를 재연한 사진, 발생·성장 사진, 부분·확대 사진도 있었다. 이러한 사진들은 어류형태학 연구에서 사진 활용의 가능성을 실험적으로 보여주었다. 유리건판 위에는 각 물고기의 이름과 채집 날짜, 장소, 크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감돌고기·꼬치동자개·묵납자루·열목어·황쏘가리·흰수마자 등의 천연기념물과 보호대상 어류 사진이 포함되어 있어, 사적(史的) 기록으로서의 학문적 가치는 물론 한국 사진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또 이들 자료 중에는 우치다가 관찰과 기록이라는 근대 과학자들의 기본적인 연구방식으로 어류들을 조사 정리한 자료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우치다가 직접 그린 도감용 그림(*사진 56~57)에, 사진기의 전사(前史)로 언급되던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를 사용한 것이다. 물론 이때 구입한 자료가 유리필름뿐 만은 아니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 필사본(*사진 58)을 비롯하여 수백여 권의 물고기 관련 도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후 2011년 인사동 호산방 시절. 나는 이 자료들을 모두 해양박물관에 양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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