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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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18

국악의 위상정립 사업(5)

  • 특집부
  • 등록 2021.01.25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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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악신문 특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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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봉 선생의 <國樂運動 半生記>는 해방전후 국악의 위상 정립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자전적인 글이다. 이를 국악신문은 제9820001025일자부터 재수록 하였다. 취지는 당연히 국악의 중심이 민속악에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제6회는 초대 내각마저 국악을 외면하여 설득하고 이해시켜 지원하게 하는 상황을 회고한 대목이다.

 

국악학교설립기성회는 이승만 초대 내각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래서 요리집 청향각(淸香閣)에서 주요 각료들을 초청하여 국악감상회를 개최했다. 우선은 각료들이 국악을 이해하여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범석 국무총리 이하 9장관 3처장을 대상으로 선생이 국악의 가치를 설하고, 이어 김소희와 박귀희 명창을 통해 국악학교설립기성회의 난관을 호소했다. 공연은 판소리, 민요, 기악곡, 춤 등 전 분야를 통해 국악의 분야를 보여주었다. 각료들은 나름 심취한 모습으로 박수갈채를 보냈다. 더불어 일부 각료는 자진하여 지원을 하겠다는 언약도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전례로 보아 이 언약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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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언약한 각료를 개별 방문하여 도움을 청하려고 연락해도 정무가 바쁘다는 답변만이 올 뿐이었다. 다만 총무처장 전규홍, 동아일보 사장 최두선, 채신부 장관 후보 장기영씨는 격려와 후원금을 지원해 주었다. 이 후원금은 유용하게 쓰게 되었다. 19497월 경, 부민관(府民館) 개관기념 공연으로 향토민요대전(鄕土民謠大典)’을 준비할 수 있었다. 해방후 전국 대상 지역민요를 무대화 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규모도 컸고, 의미도 있어 꼭 치러야 할 무대였다. 이 기념공연에는 신익희, 윤보선, 이기붕 등 주요 인사들이 참관을 하여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결과로 정부에서 23십여만환의 보조금을 받게 되었다. 물론 큰 돈은 아니지만 국가 지원금이라서 인건비를 제하고는 예산을 비축하기로 하였다.

 

1950년 봄, 시민위안 공연을 준비했다. 시민위안이라는 명분은 실내보다는 야외여야 했고, 창경원이라면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 문제는 이승만 대통령이 창경원 등의 궁궐을 보호하라는 엄명이 있어 이를 관리하는 구황실재산관리국이 이를 용납할 리가 없다는 소문이나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시장 이기붕을 만나 요청했다. 예상대로 이기붕은 이승만 대통령의 허가를 받아내었다. 당연히 구황실재산관리국 이병주 국장은 대통령의 용단을 따르겠다며 허가와 관련한 협조를 하겠다고 했다. 장소문제가 해결됨으로 6개 국악단체를 동원하여 재담 같은 프로그램을 배치하는 등 시민위안을 목표로 구성했다. 공연료는 창경원 입장료 80원에 20원을 더하여 받는 것으로 낙착(落着)을 보았다. 대회는 대성공이었다. 돈암동과 원남동이 막힐 정도라 기마대가 출동하여 공포탄을 쏘며 관리할 정도였다. 당시 여론은 해방후 최대인파 집결이라고 보도했고, 창경원 관객도 최고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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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위안대회의 성공 여세는 이어져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이를 대학생 국악행사로 방향을 정했다. 당시 선생의 장남 예종(당시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3)을 통해 전국 대학생 대상 학생국악동연회(學生國樂同演會/회장 연세대생 박노우)를 조직, 450여명의 회원을 확보한 상태였다. 이 공연 역시 국악보급을 위해서는 대학생들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는 당면과제로 관심 속에 준비되었다. 학생 중에는 호기심으로 회원이 된 이들도 많았지만, 의외로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학생들이 있었기에 고무되어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행사는 73, 그러나 8일을 남기고 6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당연히 행사는 무산되었다. 이 전쟁은 모든 분야의 발전을 가로막았으니 국악에도 지대한 지장을 주었음은 물론이었다. 특히 대학에서의 국악 운동은 싹을 틔우지도 못한 것이다.

 

7회는 자유당 때 大統領에게도 呼訴라는 제하로 한국 전쟁 후의 상황을 증언하였다. 폐허에서 국악의 씨를 다시 틔우려면 당연히 재정이 절실했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직접 호소할 기회를 갖고자 했다. 최규남 문교부장관에게 가능하도록 다리를 놓아 달라고 협의하였다. 그러나 소식이 없었다. 다시 내무부장관 이익홍을 찾아가 국악을 살릴 길을 열어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통보가 왔다. 그런데 단 30분만 시간이 된다는 것이었다. 다급히 대학생 중에서 기량있는 학생을 선발하고 명인 명창을 꾸려 경무대로 갔다.


가설로 꾸민 무대 옆에는 대통령 내외가 앉았고, 그 옆에 두 장관이 양수거지(兩手据地)로 서있었다. 친히 방문자를 악수로 치하해 주어 안심한 분위기에서 공연을 하였다. 대통령도 진지한 분위기로 함께하는 것에 고무되어 공연은 예정보다 20분을 더하여 끝났다. 대통령 내외의 미소를 본 박헌봉 선생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각하 자고로 예와 악이 무너지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는데 지금 우리 현실이 바로 예괴악붕(禮壞樂崩)입니다. 각하께서 지금 칭찬하신 명창과 명인들이 연습할 장소가 없어 방황하고 있읍니다.”


이에 두 장관이 뒤에서 옷자락을 당기며 말렸다. 그래도 선생은 기회를 놓칠 수 없어 말을 이었다. 그러자 당황한 최장관이 말을 가로 막았다.

 

"각하 대학생들과 국악인들에게도 매년 일정액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거짓 보고이지만 선생은 두 장관의 체면을 위해 꾹 참았다. 다행히 대통령이 두 장관에게 양악만큼 국악에도 지원을 하라고 지시하여 결국 소득은 거둔 것이다.

 

이렇게 경무대를 방문하여 호소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예산 부족이라는 답변이었다. 결국 선생은 화병으로 병석에 들게 되었다. 병명은 황달(黃疸)이었다. 그러나 적수공권(赤手空拳)에 치료비 문제로 입원은 못하고 여관방에서 견뎌야 했다. 무교동의 락천여관인데, 주인장은 의원까지 불러 치료해 주었다. 물론 여관비와 치료비도 모두 외상이었다. 다행히 와병 7개월만에 차도가 있어 일어나게 되었다. 선생은 50을 넘긴 나이에 홀로 눈물 짖는 신세로 서글픔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19582, 사경(死境)을 헤치고 나서 다시 뛰었다. 김은호, 문영희, 이병각, 박귀희선생과 함께 장교구락부(張橋俱樂部)를 구성하고 학교설립 후원금을 모집하는 일에 매진했다. 유수한 재벌들과 사회 동호(同好)를 찾아가 호소했다. 다행히 삼성의 이병철씨만 500만환을 기부했다. 500만환으로는 학교설립은 불가했다. 1959년 초, 이재학 국회부의장을 필두로 이병철과 자유당 중진들을 운니동 박귀희 선생 댁으로 초청하여 저녁을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선생은 산궁수진(山窮水盡), 이 자리가 최후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선언(宣言)하였다. 선생의 떨리는 손에는 원고뭉치가 들려있었다.

 

"각종 경축 행사나 외국 귀빈이 올 때면 국악을 소개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왔습니다. 장고와 가야금을 둘러메고 고생을 하면서도 언젠가는 사람들이 국악의 진가를 알게 될 날이 오겠거니 했습니다. 그러나 당대의 고관대작인 여러분조차도 이처럼 국악을 무시하고 홀대하는 것을 보면 지난날 우리들의 노고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이 4천장에 달하는 원고를 모두 불 살라버리고 심산유곡의 절을 찾아 여생을 마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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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 만에 이 부의장이 다른 장관들은 정무에 바쁜 탓이고, 문교부와 재정부에서 각 1천만환을 준비한다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 이 말이 끝나자 이병철씨가 받았다. "정부에서 그만한 돈을 기부한다면 나도 작년의 두 배를 기부하지요.”라고 밝혔다. 예상 외의 결과다. 35백만환이 약속 된 것이다.

그러나 정부 지원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 대신 이하단, 이용주, 방일영씨 등이 참가하여 관훈동에 학교 부지를 사고 설립 인가를 받게 되어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 9회는 국악예술학교 설립 과정을 진술한 부분으로 마지막 회의이다. 196035일 국악예술학교가 개교되었다. 학생은 27명이고 교사는 22명이었다. 선생은 "나는 이날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5천년 한국역사상 최초의 국악예술학교가 그 문을 연 날이기 때문이다. 초대 교장으로 취임한 나는 그날 목이 메어 취임사를 제대로 읽을 수 없었고, 자리를 같이 했던 국악인들도 모두 뜨거운 감루(感淚)를 흘리고 말았다.”라고 회고했다. 이는 선생뿐만 아니라 당연히 우리 국악사에서 기념할 만한 일대 경사인 것이다.

 

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시국은 격동에 휘말렸다. 개교 15일 만에 4.19가 일어났고, 8월에는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 모든 기관장들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아세아재단의 후원을 받는 전국 민요조사이다. 유기룡, 지영희, 김광식, 이태극, 정병욱 등이 함께한 조사로 전국 산간벽지에서 조사되었다. 70세를 넘긴 이들을 대상으로 희귀한 민요 300여곡을 채록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무형문화재로 지정할만한 민속음악을 조사하여 나갔다.

 

19644월 서울시의 협조로 관훈동에서 전 조선신궁(朝鮮神宮) 사무실인 남산으로 교사를 옮겼다. 위치나 규모에서 개선되었다. 학생수도 270여명, 20여종의 악기 300여개를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교과 과정도 국어 영어 수학 같은 일반과목도 하고, 창작, 농악, 무용, 시종 등 과목도 늘였다. 또한 구미 각국의 국제 대회 등에도 출전시켜 예능을 향상시켰다.


이상과 같은 선생의 공적은 문교부 표창과 서울시 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공적을 인정한 것이다. 반생의 회고록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아직도 우리나라 국악의 길이 험준하기만 하니 국악의 참다운 민족음악의 자리에 서는 날까지 헤쳐 나갈 각오이다.”


국악조직창설 및 관련활동, 국악예술학교 교육 및 산하 기관 창설, 창악대강편찬 등 저술활동, 민요채집 및 무형문화재 조사 연구 등에서 박헌봉 선생의 업적은 길이 빛난다. 그 업적을 국악신문36년만에 다시 게재하여 국악사 정립과 참 국악인의 생애를 조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