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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 박헌봉. 민속예술을 살리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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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 박헌봉. 민속예술을 살리는 길

  • 특집부
  • 등록 2021.01.2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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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 박헌봉 (朴憲鳳, 1907-1977). 국악이론가 및 교육가. 한국국악협회(韓國國樂協會) 이사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韓國藝術文化團體總聯合會) 부이사장,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본관은 밀양(). 호는 기산(). 경상남도 산청 출신. 성호()의 2남이다. 6세에 서당에서 한학을 시작하여 15세까지 사서삼경을 공부하였다. 1921년에 상경하여 한성강습소() 보통과를 거쳐 1923년에 중동중학교() 고등과 3부를 졸업하였다.

1924년진주()에서 김덕천()·임한수()에게 2년간 가야금풍류()·가야금병창()·고법() 등 전통음악을 공부하였다. 1934년에 진주음률연구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있으면서 풍류와 민속악을 연구하였다.

1936년에 상경하여 정악견습소()에서 정악을, 아악부()에서 아악풍류()를 연구하였고, 1938년에 조선성악연구회()에 근무하면서 2년간 전통음악을, 조선가무연구회()에서 경서도(西) 가무를 연구하였다.

1941년 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 소속 조선음악부의 상무이사를 역임한 그는 함화진(부장)·김석구(창악)·최경식(민요)·김정실(섭외), 이상의 임원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5년 조국해방과 더불어 처음에 함화진(咸和鎭)·현철(玄哲) 등과 함께 국악건설본부(國樂建設本部)를 구성하였다. 1945년 8월 29일에는 국악건설본부를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국악회(國樂會)를 창설했으며, 다시 그해 10월에는 그 명칭을 국악원(國樂院)으로 개칭하고 원장에 함화진, 부원장에 박헌봉을 선출하였다.

1947년 8월 함화진의 뒤를 이어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의 원장으로 취임했고, 유기룡(총무국장)·임서방(공연국장)·이치종(기획국장)·정기중(서무부장)·박동실(창악부장)·최경식(민요부장)·정남희(기악부장)·김천흥(무용부장)·조상선(국극부장)·채동선(연구부장)과 함께 활동하였다. 대한국악원장·서울시문화위원·국립중앙극장 운영위원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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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예술학교 교장인 박헌봉이 [동아일보]1962년 2월에 ‘민속예술을 살리는 길’을 게재하며 민족문화발전책을 논하는 기사이다

 

1960년 개교한 국악예술학교의 초대 교장에 취임하여 11년간 재직하였다. 일평생 국악발전에 헌신했다. 국악협회(國樂協會) 이사장과 문화재위원을 역임했으며, 특히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유기룡(劉起龍)·홍윤식(洪潤植)과 함께 많은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를 조사·연구·발굴하였다.1956년에 대한국악원()을 창설하고 원장 겸 이사장에 취임하여 국악 진흥에 힘썼으며, 1960년에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60년 설립된 국악예술학교의 초대교장 시절 그는 이사인 이병각·김용주·전용순·박선기·문영회·박귀희·박초월·박소군, 그리고 감사인 김은호·박영권과 함께 활동하였다. 

1960~1971년 재단법인 국악학원(國樂學院) 기성회 초대 이사장 및 국악예술학교 초대 학교장으로 재임했으며, 국악원장·국립중앙극장 운영위원·한국국악협회(韓國國樂協會)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서울시문화상·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수상했고, 저서로 『唱樂大綱』이 있다. 2012년 4월 26일 기산국악제전위원회는 기산 박헌봉 선생 현창사업회 설립과 기산 박헌봉 국악당 건립추진위원회 결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받은 홍윤식(洪潤植) 동국대 명예교수를 제2회 박헌봉국악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1963년에는 국립극장운영위원 및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이사장을 역임하였고, 1964년에는 문화재위원회()의 위원을 역임하였다.

국악, 특히 민속악의 부흥과 교육에 공헌하여 1963년에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저서로는 『창악대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