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연재소설] 흙의 소리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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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9

  • 특집부
  • 등록 2021.01.1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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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소리

 

 

이 동 희

<5>

박연은 관로官路라고 할까 벼슬 길에 나간 후 주로 청직淸職에 있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집현전 교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세자 시강원 문학 등 간원諫院 헌부憲府 춘방春坊의 요직을 두루 거치었다. 문장과 학문에 단연 두터운 인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예악의 중심에 서서 조선조 국악의 중추적 역할을 하기까지 다른 관직들을 맡기도 하였다.

전지하기를, 제생원 의녀 중 나이 젊고 총명한 3 4인을 골라 교훈을 시키어 문리를 통하게 하라고 하였다. 인하여 의영고義盈庫 부사副使 박연을 훈도관으로 삼아 전적으로 교훈을 맡게 하라고 명하였다.

전교수관前敎授官 박연 등이 조정에 들어와서 질의하기를, 본국에서 생산되는 약재 62종 안에 중국에서 생산되는 것과 같지 않은 단삼(丹蔘) 누로(漏蘆) 시호(柴胡) 방기(防己) 목통(木通) 자완(紫莞) 위령선(葳靈仙) 백렴(白歛) 후박(厚朴) 궁궁(芎藭) 통초(通草) 고본(藁本) 독활(獨活) 경삼릉(京三陵) 14종을 중국 약과 비교하여 새로 진짜 종자를 얻은 것이 6종이나 된다고 하여, 중국에서 생산되는 것과 같지 않은 향약(鄕藥)인 단삼 방기 후박 자완 궁궁 통초 독활 경삼릉은 지금부터 쓰지 못하게 명하였다.

세종실록 195317일 무술과 322일 계묘에 실려 있는 대목이다.

그 후 시기를 보아 박연은 심혈을 기울여 문맥을 다듬고 정성스런 글씨로 왕에게 상소를 한다.

성조聖朝가 새로이 일어남에 바야흐로 예악의 순수한 다스림을 일으키려는데 개혁의 초기인지라 습속에 폐조廢朝의 잔재가 남아 있으니 심히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대락 그런 내용이었다. 참으로 용기 있고 혁신적인 청원이었다. 성조는 조선, 폐조는 고려를 뜻하였다. 이 상소는 즉각 받아들여졌고 박연은 그 일을 하게 되었다.

세종이 등극해 나라 만들기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박연은 예악을 맡아 활약하게 된다. 자신이 강설講說한 내용이 되돌아온 것이었다. 책상물림으로, 이론이며 지식일 뿐 실제로 행해 보지 못한 고대 중국의 고사 옛 성현의 덕목을 시정施政 현장에서 실현할 안을 내놓아야 하였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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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작화 : [장편소설] 흙의 소리 19

 


개국 초기의 어수선한 정국과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어지러운 풍파를 딛고 조선 건국 27년만에 즉위한 세종의 입지는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백골이 흙이 되고 먼지가 되어 넋이 한 내끼도 없이 산화되더라도 변함없이 나라와 왕을 지키겠다는, 그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를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려의 대표적인 충신이자 성리학의 조종이며 만인의 추앙을 받는 정몽주鄭夢周를 제거하고 새 나라 조선을 세운 할아버지(태조 이성계)와 새 나라를 꿈꾸며 정몽주에게 철퇴를 가하는 아버지(태종 이방원)는 할아버지를 도와 개국을 설계한 정도전鄭道傳의 등에 다시 칼을 꽂는다. 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일인가. 지금도 개성의 선죽교에는 정몽주의 핏자국이 보인다고 한다. 태조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조선 건국을 하였지만 민심을 장악하지 못하고 지식인들의 이반離反을 막지 못하였다. 가령 삼은三隱으로 불리는 목은牧隱 이색李穡 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吉再 같은 대선비들과 함께 하였더라면 나라가 어찌 되었을까. 그리고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원천석元天錫 같은 선비도 있었다.

역사에 그런 가정법이 무슨 소용인가.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다. 1398(태조 7) 8월과 1400(정종 2) 1, 두 번 왕자들의 혈난血亂이 벌어진다. 태조는 신의왕후 한씨가 낳은 방우 방과 방원 등 여섯 형제와 계비 신덕왕후 강씨가 낳은 방번 방석 형제 중에 여덟 번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사병私兵을 동원하여 건국공신인 정도전 남은南誾 등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무참히 살해한다. 그리고 다시 같은 어머니 배에서 태어난 왕자 형제끼리 칼부림을 한다. 하륜河崙 이거이李居易 등 방원의 심복들은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하여 둘째인 방과가 세자가 되고 1339년 왕위에 오른다. 정종이다. 그런데 이후 정종과 정비 정안왕후 사이에 소생이 없자 또 다시 세자의 지위를 놓고 방원과 방간은 갈등을 겪는데 공신功臣 책정 문제로 불만을 품고 있던 박포朴苞가 방간을 충동하여 방원과 무력 충돌을 하게 되고 싸움에 이긴 방원은 왕이 된다. 태종이다. 정종 211월이다.

2차 왕자의 난을 지켜 보며 자란 두 형에 대한 이야기는 앞에서 했다. 왕권에 신물이 나서 십리 백리 떠나갈 법하지 않은가.

어떻든 그것은 지나간 일들이고 세종은 왕위에 오른 후 타고난 영명英明으로 새 나라 새 문물제도의 정립에 정열을 쏟았고 거기에 필수적으로 대두한 것이 예악이었다. 예와 악은 국가 문물제도의 핵심이었다. 내용이며 형식이고 얼굴이요 몸체였다.

예가 인이라 한다면 악은 어지러운 시대를 뚫고 나가는 인정仁政의 열쇠 구멍이었다. 열쇠 꾸러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