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금)

진도북춤 #박병천 #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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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북춤 #박병천 #강은영

전라남도 진도 지역에서 양손에 채를 쥐고 몸에 밀착된 북을 치며 추는 춤.

  • 편집부
  • 등록 2021.01.12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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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북춤. 행사명:86문화예술축전 전통명무공연.일시:19860920. 장소:국립극장 대극장. 출연:박병천. 해설:국수호) #진도북춤#박병천

 

(진도북춤  (박병천류 진도북춤), 행사명: 팔일 八佾. 장소 : 한국문화의집. 일시 : 2019.04.30.화 오후8시, 주최 : 한국문화재재단, 후원 : 문화재청)

 

진도북춤

 

진도북춤은 전남 진도 지역에서 양손에 채를 쥐고 추는 춤으로, ‘진도북놀이’라고도 일컫는다. 북은 몸에 밀착시켜 어깨끈을 메고, 허리끈으로 조여 묶는다. 양손에 채를 쥐고 양쪽 모두 연주한다는 뜻에서 양북이라고도 하고, 채를 쌍으로 들고 춘다고 해서 쌍북이라고도 한다.

진도북은 통나무로 된 오동나무나 미루나무의 중앙 부분을 파서 여기에 소가죽, 말가죽 등을 대고 소가 죽 줄을 X자로 매서 가죽을 고정시킨다. 1980~1990년대의 양태옥이나 박관용의 경우, 소리북을 메고 북춤을 추기도 했다. 북춤을 출 때 고깔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이후 북춤이 변화를 겪으면서, 특히 박병천 등에 의해 상투머리를 하기도 했다.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김행원金行元, 1878~1935(진도 출신, 김득수의 아버지)이 북춤이 뛰어나 호남 일대에서 명성을 크게 떨쳤다고 전해진다. 이외에 김기수金基洙, 김성남金成南, 임장수, 박태주 등이 명성을 날렸다. 지산면 소포리의 박태주는 북을 잘 쳤다는 의미에서 흔히 ‘북태주’라고 불렸다. 진도에서 최초로 고법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던 김득수金得洙도 아버지 김행원의 예술적 기질을 타고 태어나 명인의 반열에 올라섰다.

 

또한 북을 전문으로 다루는 사람들이 점차 생겨났는데, 양태옥梁太玉, 1919~2003(군내면 정자리 출신), 장성천張成天, 1923~1993(임회면 석교리 출신), 박관용朴寬用(진도읍 출신), 곽덕환郭德煥(임회면 상만리 출신), 박병천朴秉千(지산면 인지리 출신) 등이 선조들의 기예를 계승했다. 양태옥은 "북을 치려면 양태옥 만큼 쳐라.”라는 말로 유명하며, 곽덕환은 "다듬이질 사위가 일품이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박관용 또한 춤사위가 유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뒤이어 이름을 날린 북고수들은 대개 본명보다 조도 꼴기미의 최우물, 포산의 돌무채, 해남 옥동의 꼭지바 등의 속명으로 알려졌다. 삼당리의 김길선은 장성천의 뒤를 이어 북놀이 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고, 소포리의 김내식은 일명 ‘북태주’의 북춤을 계승한 인물로 명성이 자자하다.

 

1983년 정병호鄭炳皓가 진도 의신면 청룡리에서 진도북춤을 보고 적극 홍보하면서 진도북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84년 2월 16일에는 진도북놀이보존회가 창립되었다. 1987년 전라남도 지정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면서 전형적인 진도북춤의 양식이 고정되기 시작했다. 또한 장성천, 양태옥, 박관용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면서 유파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양태옥은 14세 때부터 김행원에게 북춤을 이어받았고, 박관용과 장성천은 소포리의 박태주에게서 북춤을 전승받았다고 한다. 박관용은 유년시절을 소포리에서 보냈으므로 직간접적으로 박태주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초창기 진도북놀이보존회는 장성천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1984년 10월 25일 국립중앙극장에 초청되어 공연을 하는 등 전국적인 공연행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85년 제7회 명무전에는 진도북춤이라는 이름으로 박관용과 한순자韓順子가 출연하였다. 1985년에 양태옥이 전국 국악기악 부문 경연대회인 제3회 신라문화제에서 수상하였다. 이어 1987년 9월에 진도북놀이가 전라남도 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예능보유자로는 장성천·양태옥·박관용이 지정되었고, 만가 예능보유자로는 설재복·김항규가 선정되었다.

 

박관용의 북춤은 박태주의 대를 이었다고 알려져있다. 이후 지산면 인지리의 조태홍의 춤가락을 곁들였다고 한다. 박관용의 북춤은 느린 살풀이, 중모리, 당악, 휘몰이까지 정연한 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양태옥류 북춤은 신청농악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비무계로서 신청에 가입했던 경력이 있고, 소방대농악을 이끌며 북춤을 계승해 왔기 때문이다. 이는 진도의 농악을 ‘신청농악’이라고 한 데서도 드러난다. 신청농악에 소고놀이, 방고(반고)놀이, 북놀이, 장고놀이, 상쇠의 부포놀이 등의 개인놀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진도북춤의 연마에도 심혈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양태옥류의 북춤은 흔히 걸북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양태옥류 걸북춤의은 2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장 1절은 머리춤, 2절은 살신무殺神舞인 살풀이가락춤으로 되어 있다. 2장 1절은 오신무娛神舞인 삼채가락춤, 2절은 풍악무風樂舞인 당악가락춤, 오방진가락춤, 벙어리삼채가락춤, 영산다드래기가락춤, 3절은 송신무送神舞인 이채가락춤, 휘모리가락춤, 4절은 뒷풀이춤인 굿거리가락춤으로 되어 있다.

 

장성천은 임회면 십일시에 전수관을 열어 북춤뿐만 아니라 판소리, 가야금 등을 후학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였다. 특히 진도북놀이보존회를 이끌면서 조직화에 힘썼다. 타계 후에는 1997년 6월 24일자로 김길선이 예능보유자로 승계되었다.

 

진도북춤 예인들은 각종 대회에서 입상하여 기예능을 인정받았고, 발표회를 통해 진도북춤을 무대화하였으며, 후학을 양성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박관용은 1987년 진도 의신면 진설리에 북춤연구원을 열었다. 또한 박관용은 1984년 8월 호남농악경연대회에 출전하여 최우수상을 받았다. 1984년 광주에서 열린 전국예술제 무용부문에서 장려상을 받았고, 서울예술제에서 북춤을 발표했으며, 국립중앙극장의 명무전에 출연하였다. 1985년 제14회 남도문화제 북춤 개인 연기상을 수상하였으며, 국립중앙극장에서 북춤 발표회도 가졌다. 1987년 5월 전주대사습에서 북춤으로 입선을 하였다.

 

양태옥은 1988년 3월 1일, 광주에 전수학원을 차렸다. 이곳에서는 진도북춤뿐만 아니라 타악, 법고, 관악, 현악 등의 다양한 악기를 학습시켰는데, 특히 사물놀이, 북가락, 대금, 태평소, 가야금, 아쟁 등에 주력하였다. 박병천은 양태옥에게 사사했다고 한다. 진도북춤은 다양한 가락과 춤사위를 곁들인 놀이이자 춤으로 연행되어 왔다. 박병천은 북춤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서울의 집(코리아하우스) 악장 시절에 진도의 기교적 춤사위를 곁들인 진도북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인정받았다. 박병천은 서울의 집 때부터 안무하고 재창조한 북춤을 한국예술종합학교와 대불대학교에서 가르친 바 있다.


특징 및 의의

진도북춤의 특징은 양손을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다듬이질가락과 엇박가락의 활용에 있다. 또 진도씻김굿의 지전살풀이춤에서 보이는 바람막이 춤사위와 외바람막이 춤사위, 가세치기 춤사위 등이 활용된다.

 

양태옥류 북춤은 흔히 걸북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어깨에 메고 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태옥 북춤의 특징은 원박을 치면서 오른쪽 팔과 다리를 올렸다가 내리치는 춤사위에 있다. 박관용류의 북춤은 여성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의 진도북춤은 박태주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후 지산면 인지리 조태흥의 춤가락이 곁들여졌다고 한다. 특히 박관용 북춤의 가락은 더더구 가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가락을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한다. 첫 박은 길고 강하게 두드리지만 다음 가락부터는 유연하게 넘기는 것이 보통이다. 손목을 먼저 들어 올려 누르듯 북을 두드려 북의 울림을 부드럽게 조절한다. 양태옥류 북춤에 비해 다듬이질가락을 많이 사용한다.

 

장성천의 북춤은 굿거리, 자진모리, 당악, 구정놀음 등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구정놀음은 버꾸놀음으로 대치될 수도 있다. 장성천류의 북춤은 곽덕환을 중심으로 전승된 임회면의 진도북춤이라고 할 수 있다. 박병천류의 북춤이 모리가락에서 왼손의 손등을 저면으로 보이면서 사뿐히 넘기는 것에 비해, 장성천류의 북춤은 왼손 바닥이 전면을 보일 수 있게 뒤집어서 넘기는 가락을 특징으로 한다. 이때 허리를 곧게 세우거나 아예 뒤로 젖히기도 한다. 특히 첫 박을 강하게 치는 경우와 첫 박부터 아예 엇박으로 치는 경우가 혼용된다. 다른 유파들이 엇박을 주로 2박자 이후의 박에서 운용하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참고문헌

걸북춤(허순선, 도서출판 금광, 1997), 구술진도음악사(이윤선, 이소북, 2003), 민속놀이 진도신청농악(양태옥, 운제전통기악연수원, 1993),장성천·김길선의 진도북놀이(진도북놀이 연구회, 동심원, 2012), 진도 마당놀이에 관한 연구(반혜성,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8), 진도군의 발전방향의 모색과 전망(김혜정, 전남대학교 사회교육원, 1999), 진도북춤에 관한 고찰(김은희,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4), 진도의 농악과 북놀이(국립남도국악원 총서11, 국립남도국악원, 2009).


출처:박혜영(朴惠英). 진도북춤 (한국민속예술사전 : 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