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8 (목)
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여 궁궐 내부와 정문인 오문(午門/세종 때 광화문으로 개명)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10월 임금이 정좌하여 법궁으로서의 경복궁(景福宮)이 탄생하였다.
세계에서 한 도성 안에 5개의 궁궐을 갖고 있는 도시는 서울 밖에 없다. 그 중 으뜸이 경복궁이다. 이 궁은 조선조 500년의 정궁으로서 그 역사를 새기고 오늘에 이른 의연한 서울의 상징이다. 도심 한복판에 대궁을 갖고 있어 역사와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가 되었다.
오늘의 경복궁은 외국인 대상 최고 관광명소가 되었다. 인왕산과 북악산을 차경(此境)한 자연친화성이 으뜸이고, 유교이념에 기반한 건물배치나 내부 장식, 햇빛 반사와 미끄럼 방지를 위한 다듬지 않은 박석 사용이나 건물의 높이를 조정하여 사생활 보호를 위한 배려 등은 너무나 돋보인다. 세계적인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s Rohe)가 ‘디테일은 아름답다’라는 말을 "God is in the deteils(신은 디테일 안에 있다.)”라고 표현했다. 경복궁의 티테일은 이를 입증하듯 경탄을 발하게 한다.
그러나 오늘날 경복궁의 이러한 아름다운 디테일만큼 수난의 역사를 겹겹이 갖고 있다. 명종 8년(1553년) 9월의 대화재로 인하여 역대로 내려오던 진귀한 보배와 서적, 왕과 왕비의 고명(顧命/임금의 유언장), 의복, 거마 등이 유실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는 선조가 피란을 떠나자 노비 문서와 노략의 흔적을 없애고자 난민들이 난입하여 불태웠고, 왜군과 조·명 연합군의 전투가 거듭되면서 남은 건물들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이후 273년간 폐허로 있었다.
이후 오늘날 경복궁은 존재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1865년 4월 26일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효명세자(孝明世子/1809~1830) 비 신정왕후와 대원군 이하응 주관 하에 중건이 시작되었다. 대원군의 권세로 몇 고비를 넘기며 마무리 되었다. 1868년 7월 2일, 국왕과 왕실의 이어(移御)로 경복궁이 정궁으로 되살아났고, 7년 후에 오늘의 모습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수난은 계속되었다. 1895년 경복궁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시해당하고(1895년 을미사변), 이듬해 양력 2월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면서 경복궁은 왕궁으로서 운명을 다하게 되었다. 더욱이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경술국치를 당하여 훼손이 시작되었다. 일제가 여러 건물을 헐고 민간에 팔며 이른바 '시정오년기념 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상품 진열관이 설치되었다. 이어서 음악당을 설치하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세우기까지 했다. 많은 비난에도 조선총독부 건물은 1926년 10월 1일 완성되었다. 이는 273년 만의 중건 경복궁의 가장 큰 훼손이었다. 이후 1945년 한국전쟁과 미군정청시대(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후 복원기를 맞아 오늘의 경복궁 시대를 맞았다.
그런데 이 경복궁의 역사에서 대원군의 업적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서원을 철폐할 때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를 모시는 곳인데, 하물며 도적들이 숨어 살아서야 되는가. 나는 공자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우리 백성들을 힘들게 한다면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한 의연한 뱃심이 없었다면 재정과 공력을 써가며 7년 완공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대원군은 순/헌/철종 3대 60여년의 세도정치기 매관매직과 3정문란 등을 혁파하여 탐관오리 집단을 정리했다. 이후 10년(1863~1873)이란 바탕이 없었다면 밀고 갈 수가 없었다. 결국 대원군의 개혁정책은 일정하게 민중의 호응을 얻어냈고, 그 힘으로 경복궁을 중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런 개혁 주체가 300년만 앞서 태어났어도 조선조 역사는 달랐을 것이다.
2019년, 광화문 안 경복궁에서 아리랑 큰잔치를 벌였다. 전국 아리랑 전승단체 43개가 모인 역사적인 행사 ‘경복궁아리랑 告’였다. 남북을 합해 단일 노래를 계승하는 전승단체 최다(最多)를 갖는 아리랑의 실체를 보여준 행사였다. 경복궁 중수 7년의 민중 교류로 ‘아라리’에서 ‘아리랑(렁/롱/성)’이 후렴으로 자리 잡는 형식이 형성되어 국왕으로부터 온 백성이 함께 부르는 노래를 갖게 한 역사적 사실을 새기고, 1926년 10월 1일 총독부 청사 완공에 저항하여 <아리랑>을 개봉일자로 삼은 감독 나운규의 저항정신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이런 역시적 배경에서 기획되어 금년에도 두 번째 ‘경복궁아리랑 告2’를 개최하려 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하여 이 연례행사가 무산(無産)되었다.
무산을 선언해야 하는 이 12월 중순, 대원군의 개혁정신과 경복궁 중건 업적을 새롭게 생각한다. "고집불통 쇄국 꼰대 대원군, 원성(怨聲)의 상징 경복궁 중건”이란 표현은 억울한 허울이 아닐까. 공사기간 전국 민중들의 갖가지 소리와 춤을 펼치는 ‘8도 민속 교류의 장’에서 ‘아리랑’을 형성시킨 역사적 사실은 묻혀있다. 아리랑의 존재, 이를 통해 대원군을 변호하고 싶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아리랑인물 제1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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