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토)

[장편소설] 흙의 소리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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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흙의 소리 9

  • 특집부
  • 등록 2020.11.05 07:30
  • 조회수 881

흙의 소리

 

 

 이 동 희

 

 

빈 터 <3>

아내는 차마 자신의 입으로 왜 이러고만 있느냐고 말하지 못한 것이고 그런 내색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어떻다고 표시는 내지 않았지만 돌아가신 분들만 위하고 명분에만 매달려 있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고 답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 마디도 그런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장독대의 천룡신에게 정화수를 떠다 놓고 빌 뿐이었다. 새벽마다 우물에서 찬물을 길어 떠다 놓고 어떨 때는 몇 번 물을 길어올 때마다 새 물을 갈아 놓았다. 밤늦게까지 서서 간절히 빌었다.

남편의 눈에는 한 번도 띄지 않았던 것이다. 멀리 피리 소리 퉁소 소리가 들릴 때도 송씨는 천룡신에게 부엌의 조왕신에게 아니 집안의 모든 신에게 산신 천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그런데 그 효험이라고 할까 남편 스스로 과거 시험을 보러 가겠다고 하는 얘길 듣고 황공하여 감동의 눈물이 쏟아지고 흐느껴지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어느 것이 앞섰는지 모르지만 성적인 만족감을 소나기처럼 흥건히 느끼면서 마구 흐느껴지는 것이었다. 모처럼 다 흐트러진 내외의 야단스런 모양이 황홀하게 감읍되어진 것이었다. 수줍음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었다. 아니 뭐라고 표현되어도 좋지만 두 사람은 한 몸 한 덩어리가 되고 불덩이가 되었던 것이다.

날이 희붐하여서야 두 사람은 서로 떨어졌고 남편은 금방 코를 골았다. 아내는 말똥말똥 잠이 오지 않았고 해방감을 느끼며 자리에서 몸을 빼어 밖으로 나왔다. 달이 다 지고 뿌옇게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미명 속이지만 송씨는 옷매무새를 고치고 살금살금 장독대로 가서 천룡신에게 손을 싹싹 비비며 빌었다. 중얼중얼 진언을 하면서.

남편의 과거 길이 순탄하고 빛이 밝게 비치길 빌고 몸 건강하고 무사 안녕하길 축수하였다. 날이 밝아지자 샘으로 물을 길러 갔다.

일어난 김에 잠자리로 다시 가지 않고 쌀을 씻어 안치고 잡아온 물고기 말려두었던 것을 찾아 비늘을 떨고 석쇠에 구울 차비를 하였다. 산나물 묵나물 말린 것도 찾아 손질을 하고 된장에 고추장을 풀어 뚝배기에 앉혔다. 언제 떠날지 모르지만 그녀는 밥상부터 더욱 정성스럽게 차리고 싶었던 것이다.

 

흙의소리9.jpg
이무성 화백의 작화 : [장편소설] 흙의 소리 9

 

 박연도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무언가 분주히 왔다 갔다 하다가 큰기침을 몇 번 하며 아침상 앞에 앉는 것이었다. 의젓한 그 기침 소리는 어젯밤의 모든 일을 휘감아버리는 듯하였다. 아내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상 앞에 앉고 약속대로 밥그릇을 방바닥에 놓지 않고 손에 들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박연이 말하였다.

"말이 난 김에 바로 한양으로 떠나려 하오. 여기 일은 당신에게 다 맡기고 가니 잘 부탁하오.”

"아니 왜 갑자기 그러세유?”

아내는 어제저녁과 같은 말을 하며 안절부절 하였다.

"갑자기가 아니고 많이 늦었소. 남아이십미평국이면 어떻고 하였는데 내 나이가 지금 몇이오?”

스물일곱 여덟, 서른에 가까웠다.

"차비는 아침에 다 하였소. 짚신도 한 죽 얻어다 놨고, 향교에 가서 인사를 하고 바로 갈 터이니 이웃과 집안에는 당신이 잘 말해 주시오.”

그런 얘길 하느라고 밥숟가락은 들지도 못하였다.

송씨는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너무 대견스러운 남편이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정말 갑작스럽게 남편이 하늘같이 우러러 보이고 자신이 한없이 행복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녀는 눈물이 자꾸 흘러내려 부엌으로 나왔다. 얼굴을 닦고 숭늉을 끓여가지고 다시 들어왔다.

그런데 또 남편은 밥을 먹고 있는 대신 이상한 몸짓을 취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진지를 안 드시고 뭘 하시는 기라유?”

숭늉 그릇을 남편의 밥상에 올려놓으며 놀라서 물었다.

"어서 그리로 앉기나 하시오.”

"?”

"내가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소. 그동안 이리저리 닦은 내 소리를 들려주리다. 당신에게 주는 내 마음이오.”

너무 의외의 해괴한 말을 듣고 송씨는 어리둥절하다가 다시 눈물은 펑펑 쏟았다. 그러면서 분별 있게 말하는 것이었다.

"잘 알았으닝께 진지부터 드시고 하세유.”

"아니요. 그러면 맥이 빠질 것 같소. 내가 조금 있다 당신의 정성을 다 먹으리다. 자 그럼

더욱 황공한 송씨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는다.

이윽고 박연은 그동안 쌓은 실력을 있는 대로 다 발휘한 소리를 가다듬어 피리를 부는 것이었다.

아름답고 희한한 피리 소리는 해도 멎고 바람도 멈추는 신기한 음률이었다. 온갖 새들도 뜰로 날아와 짹짹짹짹 반주를 해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