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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흙의 소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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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흙의 소리 2

  • 특집부
  • 등록 2020.09.17 07:00
  • 조회수 1,040

 

흙의 소리

 


 

                                                                              이 동 희

 

  피리 소리 <1> 

 

삐리 삐리 삐리

삘리리 삘리리

필닐니리 필닐니리 

피리 소리가 들리었다.

산 속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곱고 부드럽고 애절하게 그리고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맑은 가락의 소리였다. 어머니 묘 앞 여막에서 박연朴然이 부는 피리 소리였다.

심천 마곡리 뒷산 한참 숨이 차게 올라간 산골짜기이다. 피리 소리를 따라 뭇 새들이 모여들고 저마다 자기 이름의 울음소리를 내었다. 뻐꾸기 산비둘기가 목청껏 소리를 질러대고 꾀꼬리 까막까치도 기승을 부렸다. 풀벌레들도 앞다투어 자기 소리를 보태었다. 우는 게 아니고 예쁘게 노래하는 것이다. 간절한 피리 소리에 제각각 장단을 맞추고 화답하는 새들 벌레들의 코러스였다.

소리는 더욱 간들어지고 구성지고 신이 들렸다. 혼신을 다하여 피리를 부는 것은 삼시 상을 차려 제주를 올릴 때 권주가이기도 하고 때때로 즐겁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려는 효성이다. 

어머니 묘 옆에 여막을 짓고 풍설한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애통한 마음으로 엎드려 있었다. 세 살 때 여읜 아버지에게는 더욱 한이 되어 지극정성을 다해 시묘侍墓를 하였다. 뒤의 얘기지만 모친상을 당하고 3년 그리고 다시 3년을 여막에서 살았 고 그 효행으로 나라의 정려旌閭를 받아 마을에 붉은 정문旌門을 세우기도 하였다.

박연은 어려서부터 피리를 잘 불었다. 들판을 지나며 보릿대를 뽑아 불기도 하고 물오른 버들가지를 꺾어서 가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 짤막하게 토막을 내어 굵은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풀대궁을 꺾어 불기도 하고 나뭇잎을 말아서 소리를 내기도 하고 손에 잡히면 다 노래가 되고 곡조가 되었다. 

모두들 소리가 남다르다고 하였다. 고당리 마을 강촌 사람들도 뭘 잡고 소리를 내든 참 듣기 좋고 신통하다고 하였다. 열두 살 때부터 나가고 있는 영동 향교에서도 서생들이 그의 음악적 재질이라고 할까 피리 부는 재주를 다 인정하였다. 훈장 선생도 그의 예악禮樂에 대하여 여러 번 칭찬을 하고 범상치 않다고 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가 피리를 불면 여기저기서 온갖 새들이 다 모여들어 즐기고 함께 어우러졌다. 들판이나 강가나 산중에서 그의 옥구슬이 구르는 듯 별이 쏟아지는 듯 간들어진 음율은 언제나 유정하고 귀설지 않았다. 

그의 음악은 신묘한 경지에 도달해서 산에 올라가 악기를 연주하면 산새들이 모여 가락에 맞추어 노래하고 토끼와 너구리가 한 편에서 춤을 추었다고 문헌에 기록이 되어 있다. 참으로 믿기가 어려웠다. 한 다리 건너 두 다리 건너 조금 보태고 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 대목은 그대로 믿기 바란다. 매일 밤 여막으로 찾아와 함께 지낸 호랑이 얘기 말이다. 실은 그 호랑이 때문에 다른 노루나 토끼 너구리 들은 얼굴-수면獸面-을 들이밀 수가 없어 먼발치서 즐겼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날도 어김없이 달빛을 받으며 어슬렁 어슬렁 녀석이 모습을 보이고 여막 아래 젊은 주인의 짚신짝을 깔고 앉는 것이었다.

 

난계선생-시묘살이1-2.JPG
작화:이무성

  

 "왔는가.”

박연이 눈을 맞추며 인사를 하였다.

호랑이는 킁킁 콧소리를 내며 수인사를 하고.

벌써 몇 년째 교분이다. 어머니 3년 시묘를 마치고 다시 3년을 더 하겠다고 주저앉아 있을 때서부터 매일 밤을 함께 한 것이다. 엉엉 같이 울기도 하고 눈비를 맞고 떨며 끌어안기도 하고 자꾸 산 밑으로 떠밀어내는 녀석과 드잡이를 하며 싸우기도 하였다. 불알을 찼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색정이 동하였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고맙고 미안하고 반갑네.” 

이날따라 피리 소리는 영혼을 울리는 선율이 되었다. 그리운 어머니 다시 못 뵐 아버지 언제 어디서 우리 다시 만나리까.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간절한 효성이 배인 가락은 산중 달빛 아래 교교하데 울려 퍼졌다.

박연은 뒤에 이름자를 연으로 바꾸었다. 빈 터라는 뜻이다. 아호는 난계蘭溪, 강마을에 난초가 많았고 난처럼 연하나 꺾이지 않고 청아한 생을 기록하였다. 묘는 고당리 생가가 있는 마을 뒷산 너머 금강으로 흘러가는 개여울을 내려다보는 곳에 썼다. 내외의 묘가 앞뒤로 있는 묘비 앞에는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산신령과 잘 생긴 호랑이가 자기 무덤-의호총-옆에 늠름한 자태를 보이고 있다.

묘소 입구 올라가는 길목에는 난계를 기념하는 재각 경난재景蘭齋가 새로 단장되어 있다. 여러 기록에 박연이 시묘살이를 하던 곳이라고 되어 있는데 위치 거리가 사실과 같지 않았다.